고전,문화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 & 파생 실재

팔락 2010. 11. 24. 17:43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반영이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을 감추고 변질시킨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이다.”

 

 

쟝 보드리야르는 마샬 맥루한과 함께 미디어 연구의 쌍두마차로 평가받는 사회학자이다. 그러나 미디어의 기능에 대해 맥루한은 낙관적인 입장을, 보드리야르는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현대 소비사회에서는 상품이 아닌 광고를 소비한다. 미디어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현실속에 존재하는 실재 사물보다 영화, 텔레비전 등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를 더 사실처럼 여긴다. 사람들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닌 미디어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를 먹고 마시고 생활한다. 이 책, <시뮬라시옹>은 미디어 발전의 어두운 그림자를 파악한 그의 독창적인 탐구가 잘 드러난 대표작이다.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시뮬라크르의 동사적 의미로 ‘시뮬라크르 하기’이다. 여기서 ‘시뮬라크르’란 한국말로 가상(假像), 가장(假裝), 모방(模倣), 흉내 등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저자의 의도를 온전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원어(불어)를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한국말로 정확히 번역이 가능하다면 좋겠으나, 현대 프랑스 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개념 만들기’의 특성상 우리말에 딱 들어맞는 용어가 없는 점이 아쉽다.

 

 

시뮬라시옹 현상은 인터넷 이용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모티콘과 유사한 특징을 갖는다. 이모티콘은 우리가 원래 사용했던 기호의 고유한 의미를 없앤 다음 새롭게 조합하여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나 ‘>.<’ 등을 떠올리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뮬라시옹도 원래는 상징체계가 현실속의 어떤 실재하는 대상을 가리켰지만 그것을 잃어버리고 나서, 스스로 복제할 능력을 갖추고 현실을 대체하는 현상을 말한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지는 사실을 모방하고 재현한 것이다. 물론 작가의 주관적 관점과 의식에 따라 재구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복사물이나 사진처럼 대상을 완벽히 복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대상을 변형하고 추상하여 인간의 욕망과 결합시킴으로써 이미지를 다양화한다. 예술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사물을 단순화하거나 복잡화하여 이미지를 재창조한다. 그러나 아무리 변형된 이미지라 하더라도 그 이미지의 궁극적 근거는 현실 속에서 발견되고 사실과 관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전통적 관점이었다.

 

 

그런데 보드리야르는 이미지야말로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이미지는 사실성이 배제된 ‘시뮬라크르’로 존재할 뿐이고, 시뮬라르크가 자신을 끊임없이 복제하는 과정이 바로 ‘시뮬라시옹’인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의 모델을 ‘디즈니랜드’에서 발견하였다. 디즈니랜드는 각종 놀이기구와 환상적인 공간연출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유희 공간을 현실 속에 구축했다. 디즈니랜드는 곧 미국 사회에 대한 이미지이며 상징이다. 디즈니랜드로 재구성된 이미지는 무한히 반복되면서, 디즈니랜드 밖의 세상 즉 실제 미국의 현실을 감춘다. 그리하여 미국은 미국의 현실이 아니라 디즈니랜드의 이미지로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우리의 생활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최근의 ‘얼짱 열풍’은 예뻐지고 싶은 자연적인 욕망과 그것을 과시하고자 하는 유행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얼짱 열풍이 급속도로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현대 소비사회의 치열한 광고 경쟁과 연예 산업이 요구하는 새로운 스타 발굴 때문이다. 정보와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서 예쁜 얼굴은 짧은 순간이라도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는 유리한 방법이다. 자본이 집중된 각종 미디어산업은 연예인 위주의 스타 산업과 공생하고 있다. 얼짱을 요구하는 사회는 대중매체를 통하여 끊임없이 얼짱을 만들어내고, 개인은 얼짱이 되기 위하여 고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얼짱이라는 이미지는 인간의 내면적 아름다움이나 가치있는 삶의 의미를 배제시킨다. 이제 인간적 가치는 꽃미남, 꽃미녀에게로 집중되고, 우리가 살아 숨 쉬는 현실은 부정되어 간다.

 

 

이미지 복제의 영역은 기술의 발전과도 맞물려서 점점 확대된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는 상상의 인물과 공간이 살아 움직인다. 스포츠 중계방송은 현장에 있는 것보다 더 자세하게 순간을 반복적으로 확대해준다. 현실로부터 벗어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고, 진짜보다는 가짜가 더 진짜같은 진짜가 된다. 보드리야르는 이 현상을 일컬어 ‘파생실재(hyper-real)'라 부른다. 이제 세상에는 진짜는 사라지고, 파생실재들만이 가득 차 있다. 반복적으로 조작된 짝퉁들이 마침내는 원본을 이긴 셈이다.

 

 

보드리야르는 기술발전을 통한 각종 매체의 발달과 확대로 세계는 시뮬라시옹에 의해 전일화(全一化)되었다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고, 사전보다는 검색명령어로 정보를 수집한다. 사이버 카페에서 동호회 활동을 하며, 컴퓨터 게임과 싸이월드로 친구를 사귀고 여가활동을 즐긴다. 인터넷과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광고들은 끊임없이 구매의 욕구를 충동한다. 인기있는 영화배우가 한국인을 대표하게 되고, 연예인을 잘 따라하면 사람들에게 매력을 인정받는다. 소비와 여가의 중심에 미디어가 핵심 축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세계 전체가 시뮬라시옹이 된다. 대중매체는 끊임없이 이미지를 제시하여 현실세계를 대체함으로써 시뮬라시옹은 더더욱 강하게 구조화된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정보는 의사소통과 사회적인 것을 삼켜버린다”라고 주장한다. 소비사회의 중심에 있는 대중매체는 의사소통을 연출할 뿐 진정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의사소통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이미지는 소비되어 버린다. 매체속의 대중은 수동적인 방청객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흔히 미디어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비롯한 미디어의 발전이 문화적 교양을 확대시키고, 의사소통의 새로운 장을 열어 참여민주주의를 활성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스팸메일, 불건전한 정보의 확산, 온라인 사기, 온라인 중독 등의 부정적 요소는 정부의 적절한 규제와 네티즌의 교육, 그리고 윤리의식의 강화로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네티즌의 참여를 확대시키고 매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정부의 규제를 확립하더라도 매체 그 자체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에 반대하는 그 어떠한 노력도 결국은 시뮬라시옹의 일부로 포섭될 뿐이라고 선언한다. 시뮬라시옹의 ‘저지전략’이라 불리우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보드리야르는 미디어로 구축된 가상 세계에 대해 암울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매트릭스의 바깥 세상에서 가상세계와 맞서 싸울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보드리야르는 대답한다. 시뮬라시옹 체계의 바깥은 없다고. 우리가 매트릭스에 대항할 수 있는 출구는 단 하나다. 시뮬라시옹에 대하여 거리를 두거나 침묵하는 것! 그런데, 이것이 과연 우리의 삶에서 가능한 일인가? 함께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