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화

볼테르 [1694.11.21~1778.5.30]

팔락 2010. 11. 11. 17:56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 관용(똘레랑스)에 관한 글이나 책에서 종종 인용되는 이 문장은 볼테르의 명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볼테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다만 후대의 어느 작가가 볼테르에 관한 책에서 지어낸 문장이 마치 볼테르의 말처럼 오인된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마디에는 볼테르가 평생 견지한 관용에 대한 견해가 잘 요약되어 있다. 설령 볼테르라 하더라도 자신의 입장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볼테르의 생애

 

 ‘볼테르’(Voltaire)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는 1694년 11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공증인으로 전형적인 부르주아였다. 어린 시절에는 예수회 학교를 다녔으며, 이때 그를 가르친 신부들은 “총명한 아이이지만 비상한 악동”이라고 평가했다. 졸업 후에 볼테르는 아버지의 권유로 잠깐 법률 공부를 했지만, 곧이어 문학에 관심을 두고 여러 살롱에 출입하며 타고난 재치로 많은 사람을 사로잡는다.

 

 1717년, 볼테르는 루이 14세의 사후에 섭정으로 있던 오를레앙 공을 비방하는 글을 썼다는 죄목으로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된다. 문학사가 랑송의 재치 있는 설명에 따르면, 볼테르는 이때 처음으로 한 자리에 앉아서 뭔가를 깊이 생각할 여유를 얻었던 모양이다(우선 그는 ‘바스티유에 처넣다’(embastiller)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수감 생활 동안에 집필한 희곡으로 볼테르는 출옥 후에 큰 성공을 거두고 명성을 얻었다.

 

 ‘아루에’라는 본명 대신 ‘볼테르’라는 유명한 필명을 쓰게 된 것도 이때였다. 그에게는 이것 말고도 무려 160가지의 다른 필명이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를 ‘볼테르’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문학적 성공과 사교계의 명성으로 기고만장했던 볼테르의 인생은 1726년에 벌어진 한 가지 사건 때문에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의 명성과 교만을 못마땅해 하던 어느 귀족과 말다툼을 하다가 결국 상대방의 하인들에게 몰매를 맞았던 것이다. 격노한 볼테르는 결투를 신청했지만, 고작 평민 주제에 귀족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또다시 바스티유에 수감되었다. 당분간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가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금세 풀려나긴 했지만, 볼테르는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에 눈뜨게 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당시의 프랑스보다 더 개방적이었던 영국에서 볼테르는 사회적, 사상적 자유를 만끽한다. 특히 아이작 뉴턴의 연구에 각별히 관심을 두었으며, 당대 최고의 작가인 앨릭잰더 포프와 조너선 스위프트와 교제했다. 귀국한 볼테르는 영국에서의 경험을 글로 써서 [철학서간](1734)이란 책으로 펴냈다. “구체제(앙시앵레짐)에 던져진 최초의 폭탄”(랑송)으로 평가되는 이 저서에 내포된 체제 비판을 눈치 챈 프랑스 정부에서는 곧바로 금서 조치를 내리고 저자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볼테르는 이를 피해 애인 에밀리 뒤 샤틀레의 시골 별장으로 내려가 이후 10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볼테르의 저서 [뉴턴 철학의 요점](1738)에 수록된 그림. 내용 대부분은 뛰어난 여성 수학자인 에밀리 뒤 샤틀레가 썼지만, 당시 여건상 애인인 볼테르의 단독 저서로 간행되었다. 대신 이미 세상을 떠난 뉴턴의 빛을 에밀리가 거울로 반사해 볼테르에게 전해주었다는 뜻의 그림을 책에 덧붙여서 그녀의 공적을 기렸다.

 

 1743년, 파리로 돌아온 볼테르는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고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도 선출된다. 벼락출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에 분개한 볼테르는 1750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초청을 받고 프랑스를 떠난다. 하지만 프로이센 국왕과의 관계도 좋지 않게 끝나자, 볼테르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스위스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 지역에 집을 여러 채 마련해 두고, 양국 가운데 어느 한쪽과 마찰을 빚을 경우에 언제든지 신속하게 도피할 수 있게 했다. “뒤쫓아 오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철학자라면 땅 속에 굴이 두세 개는 되어야 한다.” 볼테르의 말이다.

  

 스위스에 체류하는 동안 볼테르는 [백과전서](1751~1781)의 편찬에 관여하여 여러 항목을 집필했다. 그런가 하면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장 칼라스 처형 사건의 재조사와 공정한 판결을 호소해서 큰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런 활동 덕분에 볼테르는 말년에 들어서까지도 프랑스 정부와 마찰을 빚고 스위스에 계속 머무르다가, 루이 15세가 사망한 이듬해인 1778년 초에야 파리로 돌아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주명철 교수의 표현대로 “스위스에서 계몽 사상가의 왕으로 살다가 (...) 파리에서 계몽사상가의 신이 되었던” 볼테르는 그해 5월 30일에 84세로 다사다난했던 생을 마감했다.

 

볼테르의 사상

 

 문학사가 랑송은 유명한 저서 [프랑스 문학사]에서 “볼테르는 18세기를 지배했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볼테르의 80여 년 생애는 루이 14세의 사망(1715년)부터 대혁명(1789)에 이르는 18세기 대부분에 걸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철학소설 [캉디드](1759)의 저자로만 알려진 볼테르지만 당대에는 극작가로 더 유명해서 [외디프](1717), [자이르](1732), [마호메트](1741), [메로페](1743) 등의 작품을 남겼다. 그 외에도 [철학서간](1734), [자디그](1747), [관용론](1763), [철학사전](1764) 등의 다른 대표작과 여러 권의 역사서 및 소책자를 발간한 바 있다.

 

 볼테르라고 하면 자연스레 ‘백과전서파’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백과전서]란 1751-1781년까지 전30권(본문 19권, 도판 11권)으로 간행된 백과사전으로, 오늘날에는 프랑스 계몽주의를 상징하는 저술로 평가되며 여러 번에 걸쳐 금서로 지정된 바 있었다. 편찬에는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핵심 역할을 담당했으며 루소와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저술가들이 항목별로 공동 집필했다. 볼테르도 이 가운데 여러 항목을 기고했으며, 이후에는 [백과전서]의 형식에서 힌트를 얻어 유사한 방식의 [철학사전](1764)이라는 독립적인 저술을 펴내기도 했다.

 

 루소와 볼테르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지만, 기질이나 사상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볼테르는 [학문예술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고 나서 루소가 인간을 향해 짐승처럼 네 발로 걷고 야만인처럼 행동하라고 부추긴다며 조롱했다. 유럽 지성사의 대가인 자크 바전은 이처럼 “그럴듯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해석으로부터 이른바 ‘고결한 야만인’, ‘자연으로 돌아가라’ 같이 루소의 사상을 요약한 유명한 문구가 생겨났다고 지적한다. 루소의 낙관주의와 상반되는 볼테르의 비관주의는 [캉디드]에서 잘 나타나는데, 저자는 여기서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로 상징되는 낙관주의를 철저히 조롱한다.

 

 볼테르는 ‘관용(똘레랑스)’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더 역설한 사상가였고, 1762년에 있었던 장 칼라스의 처형 사건에 크게 분개했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 살던 60대의 상인 칼라스는 신교도였는데, 어느 날 그의 아들이 목매달아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곧이어 아들이 구교(가톨릭)로 개종하려 했기 때문에 칼라스가 홧김에 죽여 버리고 말았다는 헛소문이 돌면서, 관청에서는 정확한 조사도 없이 칼라스를 범인으로 몰아 처형하고 말았다. 그 직후에 볼테르는 [관용론](1763)에서 이 사건 처리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반박함으로써 결국 3년 만인 1765년에 칼라스의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볼테르는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단순히 기독교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증오했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었다. 프랑스와 유럽 여러 국가에서도 오랫동안 권력과 밀착되어 있으면서 갖가지 특권을 누린 기독교야말로 볼테르의 눈에는 온갖 권위와 인습과 부조리와 미신의 상징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볼테르는 무신론자까지는 아니었다. 그는 당대의 주요 계몽주의자처럼 이신론자를 자처했다. 이신론의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하는 것으로 임무를 다하고 더 이상 인간에게 관여하지 않는 신이었고, 따라서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성)에 의한 진리가 더욱 중시되었다.

 

 볼테르는 비록 과학자까지는 아니었지만, 과학의 합리성이 지닌 가치를 높이 평가해서 과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뉴턴과 사과에 관한 유명한 일화도 [철학서간]에서 사상 최초로 소개된 것이다(물론 그 신빙성 여부에 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볼테르는 영국 체류 중에 뉴턴의 부고를 듣고 그때부터 물리학에 각별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전하며, 그의 애인이 된 탁월한 여성 수학자 에밀리 뒤 샤틀레와 함께 뉴턴 사상의 해설서를 쓰기도 했다. 에밀리는 훗날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번역, 해설했으며 이 책은 그녀의 사후인 1759년에 출간되어 격찬을 받았다.

 

 이처럼 다재다능한 볼테르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가령 기독교는 철두철미 공격했지만 사회 제도에 관해서는 사뭇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으니, 한편으로는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오히려 기득권층에 편승해서 이익을 얻기도 했다. 랑송은 볼테르의 성격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매우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로, 거기에는 모든 상반적인 것이 섞여 있었다. 자존심이 세고, 신경질적이고, 원한을 잊지 않고, 타산적이고, 아첨에 능하지만, 반면 친구에게는 의리가 있고, 가난뱅이 문인들에게는 지갑을 털어 주고, 모든 올바른 일에는 아낌없이 몸을 바쳤다.”(정기수 옮김)

 

 볼테르는 18세기의 계몽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과학사가인 제이콥 브로노프스키는 볼테르의 사상사적 업적을 “데카르트의 방법에 뉴턴과 로크의 사상을 결부시킨 것,” 다시 말해 “영국적 사고와 프랑스적 사고의 합류”로 요약한다. “볼테르는 의도에 있어서는 혁명론자가 아니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념에 있어서는 확실히 혁명적이었다. 영국 경험론과 프랑스적인 회의방법을 그가 결합시킨 것은 폭발적인 결과를 가져왔다.”(차하순 옮김) 하지만 볼테르의 진정한 업적은 오히려 랑송의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더 잘 표현되리라. “볼테르는 일평생 인간의 오류를 고발하기에 전념했다.”

 

볼테르의 영향

 

  윌 듀런트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있을 동안에 볼테르처럼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때까지 없었다.” 스위스에 체류하던 중에는 에드워드 기번, 제임스 보스웰 같은 영국의 저명한 저자들과 만났고, 희대의 엽색가인 카사노바도 볼테르를 찾아갔던 이야기를 회고록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볼테르의 사망 소식을 들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독실한 기독교인답게 “악당의 괴수가 드디어 죽었답니다”라고 아버지에게 편지하며 기쁨을 드러냈다. 당대에 볼테르를 향한 상반되는 시선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당대의 영향력은 오늘날 모두 잊혀지고 말았지만, 그의 최고 걸작인 [캉디드]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찬사의 대상이 된다. 아나톨 프랑스는 “볼테르의 손 끝에서 펜은 달리며 웃는다”고 말했고, 앙드레 지드는 만약 세계 문학의 최고 걸작 가운데 단 열 권만 골라야 한다면, 우선 성서를 고른 다음 셰익스피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그리고 볼테르의 [캉디드]를 고르겠다고 말했다.

 

 윌 듀런트는 [캉디드]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유쾌하게 비관주의를 논한 책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이 슬프다는 것을 배우면서 사람들이 마음껏 웃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볼테르의 영향이 의외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있음은 다음의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어떤 여행자가 길을 가는데, 저만치에서 어떤 사람들이 잃어버린 말을 찾고 있다. 그러자 여행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말의 색깔이며 습성이며 이름까지 척척 읊어서 모두를 놀라게 만든다. 볼테르의 [자디그](1747)에 처음 등장한 이 일화는 이탈리아의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1980)에서 패러디해 더욱 유명해졌다. 바로 주인공 윌리엄 수사가 이야기의 무대인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으로 향하던 도중, 길에서 만난 수도원 사람들에게 셜록 홈스 뺨치는 추리력을 자랑하는 대목이다.

 

 볼테르를 소재로 한 미술 작품 중에서는 장 앙트완 우동(1741~1828)의 [볼테르](1781) 석상이 아마도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어떤 물체를 두 가지 모습으로 해석이 가능한 모습으로 그리는 이중 영상 그림을 많이 남겼는데, [사라지는 볼테르의 흉상이 있는 노예 시장](1940)은 바로 위에서 말한 우동의 유명한 볼테르 석상의 한 부분을 소재로 이용한 것이다. 당대에는 대단한 명성과 영향력을 발휘한 볼테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그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특정한 학파나 사조가 있는 심오한 사상가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나 자신을 명료하게 표현한다. 나는 깊지 않기 때문에 밑바닥까지 보이는 작은 개울과 같다.” 볼테르의 이 말은 그의 가벼움과 쾌활함 속에 들어 있는 맑은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 각지에서 현대의 수많은 오류와 미신을 깨트리기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들, 거대한 권력과 재력을 지닌 압제자들에게 맞서는 무모하리만치 용기 있는 사람들 모두는 볼테르의 정신을 계승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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