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atheism) 얘기가 나왔다하면 대한민국의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리차드 도킨스가 거의 그 소신의 저작권자라도 되는 것처럼 대우를 받곤 합니다. 그러나, 실상 무신론의 확산에 기여한 사람은 리차드 도킨스 외에도 아주 많고 리차드 도킨스가 본격적으로 무신론 운동을 하기 이전에도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니얼 대넷(Daniel Dennett)이나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 샘 해리스(Sam Harris) 같은 이가 그러한데, 다들 도킨스와 조금씩 방향성은 다르지만 영미권에서 무신론이 퍼지는데 도킨스 못지 않게 큰 기여를 한 사람들이죠. 오늘날 영미권의 서점에는 religion 뿐만이 아니라 atheism(무신론) 이 당당히 한 코너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소개하려는 Paul Kurtz 역시도 위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진보적 문화 변환에 아주 큰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 Paul Kurtz 는 뉴욕 주립대 명예교수(Professor Emeritus of Philosophy at 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uffalo)로서,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의 주창자이며, 과학적 회의주의, 비판적 사고와 관련된 책들을 집중적으로 펴내고 있는 프로메테우스 출판사(Prometheus Books)의 사장입니다. 그는 ‘세속적 휴머니즘 회의(Council for Secular Humanism)’의 수장이기도 하며, 라 그는 이런 갖가지 운동 및 사업의 리더십을 행사해온 것뿐만이 아니라 그는 지식인으로서 '과학적 회의주의', '세속적 휴머니즘'과 관련 45개의 책을 출간했으며, 무려 800개의 기사, 논설과 비평을 써왔습니다. 결국, 1999년에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국제 인도주의 및 윤리 연합(International Humanist and Ethical Union)으로부터 국제인도주의자상(International Humanist Award)을 받는 영광까지 누리게 됩니다. 정말 엄청난 정력의 사나이죠? Paul Kurtz 는 원래 좌익(left-wing)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서부터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해요. 나치에 의해 포로가 되었던 다른 나라의 참전포로들과는 달리 러시아 참전포로들은 공산국가인 소련으로 돌아가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 그에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Paul Kurtz 는 이후 좌파적 당파성에서 벗어나 휴머니즘의 세속화에 모든 힘을 쏟게 되죠. Paul Kurtz 가 세속적 휴머니즘을 제창하기 이전의 미국의 휴머니즘 운동은 (기독교 국가답게) 종교적 속성이 강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Paul Kurtz 가 '세속적 휴머니즘 회의(Council for Secular Humanism)’를 설립하면서 초기 휴머니즘 운동에서 종교적 속성을 빼내고 세속성을 새로이 강조하게 되지요. 흔히 인본주의, 인도주의 등등으로 번역되곤 하는 휴머니즘은 원래 르네 데카르트 이래 근대과학의 합리성과 결부된 개념이라고 합니다. 이는 '신의 은총'으로부터 벗어나 이성으로서 세계를 이해하고 인생의 지혜로서 정립된 철학체계라고 하지요. 이러한 휴머니즘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자연뿐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확장케 됩니다. 휴머니즘이 ‘근대’와 ‘진보’와 떼놓을 수 없는 개념이 된 것이지요. Paul Kurtz 는 영미권에서 종교에 의해 신성화되어버린 휴머니즘을, 이렇게 본원적인 근대정신으로서의 휴머니즘으로 되돌리는데 앞장서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겸허히 근대라고나 할까. 저도 최근에야 그 이름을 알게 되었을뿐 사실 Paul Kurtz 에 대해서 잘은 모릅니다. 국내에는 관련 번역 자료도 전혀 없구요. 그러나, 짧은 영어실력으로나마 인터넷 등을 통해 그의 활동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기엔 기꺼이 저의 새로운 롤모델이 될만한 분으로 여겨집니다. 근래 아주 눈여겨 보고 있지요. 일찌기 저의 롤모델로 지명된 바 있는 존 브록만(John Brockman)은 그야말로 사업가입니다. 사실은 무신론자이면서도 일부러 무신론자임을 숨기고 다니며, 저로서는 별 신빙성을 부여할 수 없는 신과학류나 반과학류의 책도 흥행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출판하기도 합니다. 이는 상업주의를 이용은 하되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제 지향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죠. Paul Kurtz 가 존경스럽게 느껴지는 점 중 하나는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근본 영혼을 확고히 지키면서도, 운동가와 사업가의 영혼을 결합시켜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Paul Kurtz 가 운동의 가장 핵심으로 삼고 있는 문제인 종교에 대한 공격은 한때 과학적 회의주의자들, 이른바 스켑틱스(skeptics) 사이에서도 매우 금기시된 문제였습니다. 과학은 ‘어떻게’라는 질문들에만 관심이 있고, ‘왜’라는 질문들에 대답은 종교만이 제공해줄 수 있다는 식의 진부하면서도, 사실은 종교우월론에 불과한 주장들이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같은 영향력있는 과학작가들 입에서도 버젓히 나오곤 했었지요. 미국은 워낙 기독교세가 강해서 종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문화적 금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비판하는 일은 한국으로 치면 거의 독도가 일본땅이다고 주장하는 일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죠. 당연 초창기 스켑틱스(skeptics)의 계몽 운동은 주로 창조론, 신앙치료, 초상현상 등 IQ 80 이 봐도 명백한 오류들에만 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Paul Kurtz 는, 초장부터, 스켑틱스 사이에서의 갈등, 분란은 전혀 아랑곳 하지도 않고,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일부 스켑틱스의 Religious Skepticism 은 진정한 휴머니즘이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립니다. 인간은 종교를 비롯한 그 어떤 교조성에서도 벗어나야만 완전하고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해버리죠. ![]() 성역과 금기를 깨버린 Paul Kurtz 의 용기있는 활동은 한국에서 반한의학 운동과 사이비 좌우파 척결운동에 기꺼이 동참, 지지를 보내면서 새로운 스켑틱스 운동을 전개해보려는 제게도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크게 두가지 차원인데, 하나는 인간을 억압하는 반지성현상의 목록 추가라는 차원이고, 또 하나는 그 목록의 모순없는 공유라는 차원입니다. 많은 과학자들과 의사들, 스켑틱스가 반과학적 행태와 사이비 의료 행위에는 기꺼이 분노를 표명합니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그들의 그런 분노가 어떻게 된 것인지 반과학적 사이비 의료의 모든 핵심 조건을 만족하는 한의학 앞에서는 빈번히 거세되어버리곤 하죠.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의학만이 한국의 스켑틱스에게 성역과 금기가 아닙니다. 그간 우리의 스켑틱스에게는 초자연현상 등의 문제라면 몰라도 현실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는 입을 다물어왔던 전통이 있었습니다. 좌파니 우파니 해대는 그런 것은 그저 정치적인 문제야, 하면서 현실도피식 거드름만이 늘 판을 쳤다는 것입니다. 스켑틱스의 먹이감인 교조성의 문제가 비정치적인 문제에서만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일텐데도 말입니다. 이런 태도은 미신에 비판적이면서도 정작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문제는 성역과 금기로서 외면했었던 Paul Kurtz 이전의 미국 스켑틱스의 태도와 분명 닮아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절대 진짜 스켑틱스의 태도라고 할 수 없죠. 제 생각하는 진짜 스켑틱스란, Paul Krutz 가 그것을 세속적 휴머니스트라는 이름으로서 재정의한 바, '과학적 회의주의(Scientific Skepticism)'와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자신의 직업적 관심이나 특정한 부분에만 가둬두지 말고 삶의 모든 측면으로 끊임없이 일관성있게 확산시키려는 근대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미국과는 달리 한국의 스켑틱스에겐 반종교운동보다 반한의학 운동이 훨씬 더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전자보다 후자가 스스로를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얼간이들에게 훨씬 더 큰 격분과 반발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터부(taboo) 중의 터부이기 때문입니다. 반과학과 반의학 문제, 삐뚤어진 민족주의 문제, 인권과 생명권 문제 등등 우리 사회의 갖가지 부조리가 이 한의학 이슈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 뜨거운 감자를 스켑틱스가 어떻게 피해갈 수 있단 말입니까. 사이비 좌우파 문제 역시도 스켑틱스가 기꺼이 필수적으로 관심을 가져야할 문제입니다. 반지성현상의 문제는 비정치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분명 독재자 찬양, 반미강박관념, 극단적 환경운동 등등 정치적인 문제에도 당연히 다 뻗어있기 때문입니다. 광우병 시위에 기어나온 사람들과 UFO 출현에 아직도 가슴이 설레는 사람들 사이에 무슨 의미있는 차이가 있는건 아닙니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전자 문제는 방관하거나 침묵을 지켜야한다고 보는 이가 있다면 그는 편의주의적 합리성에 빠진 위장 스켑틱스일뿐이죠. ( * 밝혀두지만 저는 저런 위장 스켑틱스 혐의가 짙은 이들로 이글루의 소위 '쿨게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스켑렙 보이코트하고 아크로 몰려갔던 이들도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지요.) ![]() 저를 아끼는 분들도 제게 종종 하는 고언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하면 앞으로 네가 만약 운동가나 지식인을 꿈꾼다면 제발 어떤 반지성현상과 관련 전문 주제 하나만 잡고 일단은 그거 하나만을 위해 돌진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주제와 관련 저의 전문성 부족을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시간을 들여 훈련을 하면 나아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 분들이 제게 특정 주제만을 잡으라는 충고를 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 운동의 힘을 살리는 문제와 관계있습니다. 즉, 설사 스켑렙이 그간 문제삼아온 반지성 현상 이슈에서 제가 하나같이 유리하거나 올바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다양한 주제를 동시다발적으로 지적하면 운동의 지지세력을 규합하는데 애를 먹는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반한의학 이슈에는 얼마든지 공감하고 기꺼이 힘을 보태고자 할 386 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이비 좌파 척결한답시고 좌파의 가장 핵심 전위세력인 386 의 교조성 문제까지 동시에 지적해버리면 386 이 이탈하고 그만큼 반한의학 문제가 의제화되는 동력이 떨어져 버립니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 386 운동에는 얼마든지 공감하고 기꺼이 힘을 보탤 수 있을 사람들이 반한의학 운동 때문에 나가떨어진단 말이죠. 이른바 '뺄셈정치'의 문제입니다. 물론 저도 꽤 오랫동안 고민해온 문제이지요. 저는 아주 최근에야 이 문제와 관련 입장을 완전히 정했습니다. 바로 Paul Kurtz 와 마찬가지로 반지성현상과는 절대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쪽으로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저는 결코 단일 이슈 파이터가 아닙니다. 저는 반한의학 운동에 목숨거는 사람이 아닙니다. 반386 운동에 목숨거는 사람도 아니고요. 그건 그것만 전문적으로 하겠다는 분들이 따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거 하겠다는 분들 적극적으로 도와줄 의지도 충만합니다. 다만, 저는 내일 당장 선거라도 나가야하는 대통령 후보가 아니라 공론 발전을 꿈꾸는 운동가로서, Paul Kurtz 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증류(distill)된 이성으로서의 합리주의자를 이 땅에 많이 양성하는 것에 꿈이 있는 사람입니다. 되고 안되고는 두고봐야겠지만 아무튼 '보편적' 합리성의 성채 구축이 바로 저의 꿈이란 말이지요. 제겐 한의학 문제나 386 의 교조성 문제는 단지 그 양성 과정에 매우 중요한 연습문제일뿐입니다. 물론 특정 이슈 해결을 위해서 그때그때 전략은 필요하지만, 특정 이슈 하나만을 위해서 제 정치적 양심을 팔며 자기검열을 할 수는 없죠. 저는 우리 사회에 이상한 믿음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일관성있게 미신을 부정하고자 한다면 종교도 부정해야하는 것이고, 일관성있게 사이비의료를 부정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한의학도 부정해야 해야 합니다. 당연히 무신론적인 한의사, 반한의학적 종교인도 말이 안됩니다. 이는 전혀 조화될 수 없는 믿음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경우입니다. 시사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미강박관념을 갖고 있으면서 친일을 한다든지, 급진적 여성운동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극우적 가부장 의식도 동시에 갖고 있는다는건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현실적으로야 이런 케이스가 부지기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 누군가라도 일단 합리주의자를 지향하고자한다면 이렇게 편의주의적이고 파편화된 인식을 가져선 안됩니다. 새로운 교조성 문제를 발굴해내고 교조성 하나하나와 투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관성있고 체계성있게 이미 증명된 모든 교조성을 거부하는 것도 세속적 휴머니스트와 스켑틱스의 중요한 미덕입니다. 솔직히 생물학자가 생물학의 진화론을 믿으면서도 자기 전공이 아니라고 물리학의 원자론은 안 믿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마찬가지로 스켑틱스가 특정 교조성만 거부하고 다른 교조성은 거부하지 않겠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과학지상주의적이고 비타협적이어서 과연 너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사람을 모을 수 있냐, 돈을 모을 수 있냐는 질문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Paul Kurtz 를 보세요.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에서 종교를 부정해버리는 통에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한 환경에 놓였는데도 할 말 다 하고 운동도 하고 심지어 매체운영에 출판사까지 다 꾸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저라고 못하라는 법 없지요. ![]() 쇼펜하우어는 철학이란 "무언가 이익을 주는 일은 아니지만 많은 것을 절약케해주는 일"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실 스켑틱스 활동은 독창성과 생산성을 생명으로 해야하는 학자의 본원적인 활동이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불필요한 생각, 삐뚤어진 사고를 할 일을 조금이라도 줄여준다는 점에서 큰 교육적, 공익적 가치가 있는 활동이지요. 불필요한 생각, 삐뚤어진 사고를 조금이라도 덜해야 독창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할 기회도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반지성현상이란 대부분이 엄청난 사회적 '기회비용'을 낳습니다. 지난해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광우병 파동이 낳은 직접피해액은 무려 1조 574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최고 인재들은 한의대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며 장래 의학적 범죄에 가담할 준비를 하고 있지요. 전국의 교회와 절이 다 도서관이나 공공자연공원으로 바뀐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풍요로워질 것인가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인생을 하루라도 더 산 사람으로서의 의무가 있다면, 그건 우리의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어른들이 빠졌던 오류와 시행착오를 덜 겪게 만드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어른들이 했던 나쁜 짓과 멍청한 짓을 너무나 빈번하게 아이들에게 강요해왔습니다. 누군가는 이 말도 안되는 비극의 순환을 끊어놔야 합니다. 제게 꿈이 하나 있다면, 지성인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반지성현상과 관련 목록을 만들고 또 제가 살아있는 동안 그 리스트를 하나라도 더 채워서 그것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의 첫 대목을 보면 리차드 도킨스가 책을 쓴 동기를 서술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도킨스의 아내는 어린 시절 학교를 너무 싫어해서 퇴학당하기를 수도없이 간절히 원했다는데 그런 마음을 20대가 다 되어서야 엄마에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왜 그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니?" "그래도 되는줄 몰랐어요." 그래도 되는줄 몰랐다. 그러나, 정말 뚜렷한 범죄를 제외하고는 우리 아이들이 기꺼이 그래도 되는, 그러니까 안해도 되고 부정해도 되는 일은 아주 많습니다. 저는 Paul Kurtz 에 이어 그 목록을 채워나가는 작업에 참여하게된 것을 참으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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