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회학

건강권과 醫權 (국민의 권리와 의사의 권리)

팔락 2010. 5. 31. 11:20

1. 의권과 건강권

 

언어는 사회와 문화의 반영이다. 그래서 갑자기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쓰던 말이 없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언어가 생기고 사라지는 과정을 추적하면 그 과정에 내포된 여러 의미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오늘의 주제인 “의권”이란 말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쓰이는 용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법률적 용어도 아니다. 단지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 어떤 주장을 하기위해 하나의 구호로 사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그 속에 내재한 의미를 폄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주장의 의미를 되새겨봄으로써 그 주장의 논리적 정합성이나 도덕적 적합성을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그 주장의 정당성과 적용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이 말이 쓰이는 맥락을 검토해 보면,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선 이러한 혼란을 없애기 위해 의권이란 말을 몇 가지로 구분해 보도록 한다.

 

첫째는, 의사라는 직업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경제적 권리이다 (socio-economic rights of physicians). 이러한 의미의 의권은 의사라는 직업에 합당한 “분배의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일차 폐업 때의 구도, 그리고 일반인이 생각하는 의권의 개념은 대체적으로 이러한 분배의 권리라는 개념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미의 의권은 노동자들이 주장하는 노동권, 또는 각종 이익단체의 단체행동권과 다름이 없으며, 이러한 관점 하에서 의사들의 파업은 집단이기주의로 비추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둘째는, 의사들이 자신들의 직업조직을 만들고 이를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직업전문가의 자율성; professional autonomy). 자신들의 업무영역을 정의하고 회원의 자격기준을 정하며, 윤리강령을 제정하고, 학문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의사의 권위를 실추시킨 자들을 징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등이 이에 속한다. 따라서 이것은 의사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권리라기보다는, 그들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 자율적 권리제한의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권리는 뒤에서 논하게 될 직업전문화 (professionalization) 과정을 통해 획득된 것으로써, 의사들의 자율적 통제가 사회 전반에 걸쳐 득이 된다는 판단을 사회가 내렸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지식과 기술의 독점이 이러한 자율적 통제권의 근간이며, 사회는 그 집단이 그러한 독점력을 악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회에 유용한 방향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주어지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환자의 진료에 있어 어떠한 외부적 간섭이나 제약도 없이 환자의 이익과 의학지식,그리고 양심에만 의거해서 진료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임상적 자율성; clinical autonomy). 이것은 의료법 제12조 (의료기술등에 대한 보호) 1항이 규정한 의료인의 권리이며, 전공의가 중심이 되어 벌이고 있는 2차 파업 때 그들이 내세운 “교과서적으로 진료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과서적으로 진료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은 원론적인 선언일 뿐 실제로 여러 경로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는 선진 각국의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의권은 다음의 세 가지 요인에 의해 침해될 수 있다.

 

첫째는 의학 자체에 대해 대중이 가지는 신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은 우려할 수준은 아니지만, 과학적 의학이 모든 질병을 몰아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는 것 같다. 암 치료법 발견을 위한 연구에 쏟아 부은 엄청난 예산이 별 성과 없이 낭비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서부터, 급성병보다 만성병이 늘어가는 추세 속에 현대의학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을 비판하는 사람, 그리고 이러한 경우 현대 의학보다는 각종 민간요법이나 대체의학에 의존하려는 사람, 과학적인 의학이 환자의 인간적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하는 일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 등은 이제 의학 자체도 절대불변의 진리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교과서적인 진료라고 할 때 교과서의 진실성 자체가 의심 받는 상황에서 그 교과서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의사의 권위는 크게 손상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임상적인 상황에서 자율적인 결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해지는 각종 관료적 제약이다. 어떠한 심각한 질병이 의심되어서 CT 촬영을 했더라도 결과가 심각한 질병이면 보험금이 지급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급되지 않는다. 어떤 항생제는 어떤 용량 이상으로 사용하면, 환자의 상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간호사 출신의 보험관리공단 직원에 의해 삭감된다. 하지만, 이러한 관료적 통제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미국에서조차 의사들은 HMO 라는 거대한 조직의 일부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으며, 진료 형태도 대체적으로 그 조직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가는 경향이 있다. 소위 managed care 의 문제가 여러 모로 지적된 바 있다. 유럽의 의사들은 대체적으로 피고용인의 위치에 있으며, 그들의 진료행위는 끊임없는 의학적 감시 (medical audit)의 대상이다. 따라서 문제는 의사의 진료권에 대한 관료적 통제를 가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기보다 그것이 어떻게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셋째는 상업주의의 침투로 인한 진료권의 침해 현상이다. 하지만, 이것은 타율적인 규제에 의한 침해라기보다는 의사들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시술을 선택할 때, 의학적 지식, 환자의 이익, 그리고 의사의 양심에만 의거해 판단하기보다 이윤이 많이 발생하는 시술을 선호하게 되는 현상이다. 이는 타율적 진료권 침해에 대응한 자발적 진료권 침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의권을 보는 네 번째 관점은 그것을 의학과 의사에게 부여된 또는 그들이 획득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권력으로 보는 것이다. 집단으로서의 의사가 행사하는 정책결정에의 영향력을 정치적 의권이라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그들이 누리는 경제적 부나 사회적 지위를 사회적 의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일반인의 건강과 질병에 대한 상식을 지배하는 정도를 문화적 의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의권이란 것은 다양한 의미와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의권을 침해하는 요소를 그렇게 단순히 유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이번 의사의 폐업과 파업 과정에서 일반인이 생각하는 의권이란 것은, 사회가 의사에게 부여한, 또는 의사로서 누려야 할 권리와 이익을 일컫는 것인 반면, 의사들이 보는 의권의 개념은 아무런 외부적 간섭과 통제 없이 전문적 의학지식에만 근거하여 환자를 돌보는 권리를 일컫는 (진료권, clinical autonomy)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일반인과 의사의 관점 차이와 오해의 근원이 있으며, 동시에 그 오해를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있는 것이다.

 

의권을 의사의 분배적 권리로 보는 시민단체와 일반인들은 여기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국민의 당연한 권리로서의 “건강권”을 들고 나온다. 하지만, 건강권이란 말도 의권이란 말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개념 규정이 되어 있는 말 같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건강권이란 말을 헌법 제10조에 규정된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제35조에 규정된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 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건강권과, 병에 걸렸을 때 차별 없이 최선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좁은 의미의 건강권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민단체의 논리에 의하면, 건강권은 헌법이 정한 국민의 기본권이며, 의권 (진료권)이란 것은 의료법이 정한 절차상의 규정이므로 건강권에 종속되는 하위 개념이 된다. 따라서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 의권은 제한될 수 있다. 건강권은 목적으로서의 권리인 것이며 의권이란 것은 이것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사에게 주어지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의사 쪽의 논리는 의사의 자율적 결정권 (의권)을 극대화함으로써 국민의 건강권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즉, 의사는 항상 환자의 편에서 생각하며 무엇이 환자에게 최선인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므로 그의 판단을 최대한 존중해야 하며, 보험 재정의 보호나 행정 편이를 위해 이를 제약하는 행위는 국민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건강권을 위에서 말한 좁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주장은 일견 서로 모순되는 듯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각자가 처해 있는 입장과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다른 해석을 하고 있을 뿐이다. 건강권과 의권은 공존 가능한 권리일 뿐 아니라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사들이 국민 건강권의 보장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의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나, 의사에게 의권을 보장해 줌으로써 국민의 건강권이 보장될 수 있다는 주장은 그래서 동전의 양면이다. 따라서 국민의 권리로서의 건강권과 의사의 권리로서의 의권을 조화시켜 나가는 일이 앞으로 우리 사회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의사권력의 형성과정

하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권리들이 산술적인 의미에서 균등하게 분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어느 곳 어느 때를 막론하고 힘 센 자는 많이 차지하고 약한 자는 적게 차지한다는 원칙이 지켜져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논의한 건강권과 의권의 관계는 관련 집단간의 역학 관계에 따라 다양한 위상과 층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역학관계 속에서 의사 집단이 차지하게 되는 힘과 이익의 총체를 우리는 “의사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의사권력이라 함은 자율적 결정권이라는 의미의 의권 뿐 아니라, 의학과 의사에게 주어진 모든 권위, 권한, 권리, 그리고 권력을 포함한다. 지금부터는 의권을 의사권력의 의미로 사용해 그 형성과정과 현상, 그리고 미래를 전망해 보도록 한다. 의권을 자율적 결정권이란 좁은 의미로만 생각해서는 그것이 자라온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배경과 맥락을 놓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의권이란 의학과 의사에게 부여된 또는 그들이 획득한 권력이다.”

 

구미 각국의 의사들이 경험했던 직업전문화 (professionalization) 과정은 이러한 의사 권력의 획득 과정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독자적 직업전문화 과정을 겪어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그들의 경험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어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중에 중요한 것을 지적하라고 한다면, 이러한 자율성이 거저 주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의 의사들은 각종 민간 치료법들이 난무하던 19세기말의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과학적 의학을 유일한 의학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대학을 세우고 그 시설과 교과과정에 대한 표준안과 윤리규정을 만들어 시행하는 등의 자기 정화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를 통해 의사가 국민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유럽의 의사들은 전통적으로 귀족에 봉사하는 직종이었지만, 그 귀족 또는 교회를 통해 일반 서민들을 무료로 돌보아주는 강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도 귀족에 버금가는 긍지와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활동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자신의 직업에 대한 긍지, 높은 도덕성 등이 전문직업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여건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고 그들에게는 자신의 직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의사는 직업전문화의 과정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 서양의 의학은 여과의 과정 없이 직수입되었으며, 일제가 한의학을 제도권 밖으로 밀어내버렸기 때문에 경쟁을 할 필요도 없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경쟁력을 갖춤으로써 획득한 권력이 아니라 정치권력에 의해 그냥 주어진 권력이었다는 말이다. (반면에 권력에서 소외된 한의학은 오히려 이러한 시련을 통해 직업전문화의 과정을 겪었으며 일정부분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의사 권력의 수동성으로 말미암아 그 권력이 침해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전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77년과 89년 의료보험이 시행되고 전국에 확대되는 과정에 국민의 건강과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소임인 의사로서 어떤 목소리를 내었는가?

 

게다가 한국 의사들은 대부분 개인이 소유한 의료기관에서 일했으며 그 기관의 소유주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소자본가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정말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훌륭한 의사가 많았지만, 일반적으로 의사라고 하면, 병원을 소유한 부유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의사의 자율권이 의료보험과 각종 관료적 통제, 그리고 무차별적인 상품화에 의해 심각하게 침해되는 과정 속에서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어진 현실에 안주한 의사들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직시하고 그에 대한 대응전략을 수립하는데 실패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회관계 속에서 파악하지 않고 천부적인 것으로 해석한 안이함에 기인한다. 그런 중에도 자신들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외부적 조건들에 대한 불만은 계속 쌓여갔고 의약분업이라는 촉매가 가해짐으로 해서 폭발하게 된 것이 이번 사태의 본질이라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의사의 권리와 권력이 무엇에 기반해서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해 냉철히 반성할 필요가 있다. 미국인 의사 Mirvis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로 요약한다. 첫째는 정보에 대한 독점이다. 의학은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체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지식에 통달한 의사만이 그 지식을 통제할 수 있다. 둘째, 의료전문직의 업무에 대해 대중이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며, 그들의 행위가 대중의 이익에 봉사할 것이라고 믿는다. 셋째, 의사들은 조직적으로 대중의 신뢰를 받기 위해 노력한다. 윤리강령을 제정하며 의학교육의 기준을 설정하고 부적절하거나 비윤리적인 시술을 행하는 구성원을 배제함으로써 의사라면 누구든지 학문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에 있다는 점을 인식시킨다. 넷째, 이러한 전문직업인의 자질을 국가가 인정하여 의사의 배타적 권리를 법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전문화된 지식체계에 근거한 의권은, 대중이 의사라는 전문 직업인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들에게 신뢰를 보냄으로써 법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의사전문직은 이러한 과정을 모두 거쳤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이제 그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 단계가 모든 나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요소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주요한 참고사항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의권의 존재근거

의사의 권리와 권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 근거는 시대에 따라 또는 역사적 경험에 따라 다양할 것이며 그것들이 모두 우리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우리나라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가를 살피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의사의 권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 근거는, ①노블리스 오블리제 noblessee oblige, ②유교적 도덕주의 Confucian moralism, ③사회주의적 도덕주의 socialistic moralism, 위에서 살펴본 바 있는 ④ 직업전문주의 professionalism, 그리고 ⑤지식-권력 모델의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노블리스 오블리제 noblessee oblige

이것은 유럽의 의사들에게 해당하는 말로써, 신분적으로 주어지는 지위에 상응한 도덕적 의무라는 뜻이다. 중세 권력의 상징인 교회와 귀족은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서건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건 각종 구휼사업에 투자를 하고 의사를 고용하여 부랑아나 극빈자를 돌보도록 한다. 이것이 오늘날 병원의 전신으로 그들은 이러한 병원을 통해 무료치료의 전통을 확립해 가는 한편, 영리를 목적으로 한 떠돌이 의사 (주로 이발외과의)들로부터 자신들을 차별화하는 동시에 도덕적 우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분적, 도덕적 우위를 바탕으로 의사에게 주어진 권리가 소위 의권이라는 것이다.

 

2) 유교적 도덕주의

한국 의학사에 족적을 남긴 의사들 중 많은 수는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이었다. 그들은 의학을 성리학적 이념 속에서 소화하고자 했다. 이렇게 의학을 공부한 성리학자를 우리는 유의(儒醫)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의 삼강오륜에 입각한 도덕주의는 계약관계에 입각한 유럽의 귀족적 가치와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의학을 공부한 목적은 대개 군주에 대한 충성이나 부모에 대한 효도의 수단으로서 이었고, 따라서 민중을 상대로 한 유의들의 의료행위는 극히 제한적이고 예외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최근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여준 의사 허준의 민중 사랑의 헌신적 행적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 드라마가 이 시대에 그렇게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어당기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청빈(淸貧)과 헌신(獻身)이라는 유교적 가치에 대한 갈망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에 익숙한 현대인으로서 그러한 가치를 실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유교적 도덕주의는 현실로서가 아니라 이상으로만 존재한다.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면서 민중에 봉사하는 의사의 이미지는 이렇게 바람으로만 존재하며, 그러한 이상형을 근거로 현실의 의사를 판단하므로 그들에게 객관적으로 타당한 권위를 부여할 만한 여유를 잃게 된다. 따라서 의권의 근거로서의 유교적 도덕주의는 의사로서 가질 수 있는 주관적 가치 기준일 수는 있으되 객관적 기준으로는 적당치 않다고 여겨진다.

 

3) 사회주의적 도덕주의

사회주의권 국가의 의사들은 직업전문주의가 매우 약하고 직업에 대한 긍지도 매우 약하다고 알려져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국가에 의해 결정되고 실행되기 때문에 의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만한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북한에서 진단서는 유급휴가의 중요한 근거이고 노동에서 면제될 수 있는 사유가 되므로 의사가 발행하는 진단서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감시의 눈초리가 모아지고 허위진단행위가 발각될 경우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된다고 한다. 영국의 의사들이 행하는 모든 시술은 그 결과와 함께 끊임없이 모니터 된다. 그래서 시술 성적이 좋지 않은 의사는 그 결과가 언론 등에 공개되어 도태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을 자율성 상실-의권 상실-로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자본주의적 체제에서 직업전문가 집단이 하는 역할을 국가가 대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전체로서의 의사의 권위를 높이는 의권 강화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주의적 의료체계를 가진 나라들에서 의사의 권위는 국가에 의해 유지되며, 의권은 국가의 이익에 복무하고 민중에 봉사하는 사회주의적 도덕에 충실한 대가로 주어진다.

 

최근 북한을 탈출한 한 의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곳의 의사들은 높지 않은 급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업무에 대한 만족도가 꽤 높으며 국민으로부터도 상당한 정도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다고 한다.

 

4) 직업전문주의

여기서는 일반적인 직업과 구별되는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그 서비스의 제공자에게 부여하는 권리 중 하나가 의권이라고 본다. 즉, ①의학은 그 전문적 속성으로 인해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고, ②그 이념 자체가 인류의 선에 봉사하는 것이며, ③의사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특별한 권리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적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의 의사들이 자신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서 주장하는 또는 사회가 인정해 주는 의권이란 것이다.

 

5) 지식-권력 모델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의 논의에 의하면, 지식은 바로 권력이라고 한다. 의학 지식도 예외가 아니어서, 인체에 대한 지식의 축적은 바로 그 인간을 지배하는 도구가 된다. 이러한 지식의 축적은 개인의 수준에서 뿐 아니라 집단을 대상으로도 행해지고, 의학적 지식의 축적으로 인해 권력은 더욱 쉽게 인구와 개인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에 의하면 의학은 도구적 권력이고 의사는 그 권력의 하수인이 된다. 물론 푸코의 권력 개념이 전통적인 지배권력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며, 누구나가 그 권력의 실행자이고 동시에 대상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구도에서 의학과 의사의 고유한 권위와 권력이라는 의미의 의권은 성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의사에게 부여할 수 있는 권리와 권한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많은 논란이 예상되지만, 필자는 높은 도덕성과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두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가 우리가 의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거나 한국의 의사는 의권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의권을 외칠 때 반드시 중요한 비중으로 함께 논의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을 때, 의료계의 투쟁은 한갖 밥그릇 싸움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나 언론의 비난에 대한 대응논리를 발 빠르게 마련하는 등의 대책으로는 실추된 의사의 위상을 회복할 수 없다고 본다. 무언가 능동적인 개혁 청사진을 제시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길만이 진정한 의권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능동적인 개혁은 위에 제시한 다섯 가지 기반 중에서 우리 현실에 가장 적합한 항목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은 수 천년이나 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앵무새처럼 외워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성 없는 유교적 덕목을 나열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급격한 신분제도의 와해를 경험한 우리에게 귀족적 가치를 강요하는 것도 무리다. 전체적으로 자본주의적 체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사회주의적 도덕률을 부과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 말한 다섯 가지의 기반 요소의 어느 것도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현실에 가장 적합한 것은 역시 직업전문주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에게 그러한 과정을 겪을 기회가 없었다면 지금부터라도 만들어 나가면 된다. 아니 지금이야말로 직업전문주의를 확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Pellegrino의 지적처럼 직업전문주의 prefessionalism는 탈전문화 de-professionalization와 재전문화 re-professionalization의 반복을 통해 발전한다. 지금과 같은 도덕적 위기의 시기가 재전문화의 기회였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직업전문주의에서 의권은 도덕성의 확립과 이타주의적 실천을 통해 획득된다. 제도의 개선을 위한 투쟁도 중요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러한 직업전문주의의 가치를 잃어버린다면, 결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을 것이고 의권의 확립도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다.

 

4. 열린 의권의 확립을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권력은 소수에 의해 배타적으로 소유되며 행사되는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 같다. 군사정권의 지배를 받는 오랜 세월동안 이러한 의식은 점점 더 굳어졌다. 획일화 된 정치권력과 함께 우리의 의식마저도 획일화로만 치달았다. 전부를 얻지 않으면 전부를 잃게 된다는 위기의식이 이러한 획일화를 부채질했다. 80년대의 운동권은 군대를 방불케 할 만큼 철저한 조직 규율을 신봉했다. 소위 대오론으로 자그마한 일탈조차 허용치 않는 철저함을 보였다.

 

최근의 의료계가 이러한 획일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분명 지나친 비난일 것이다. 내부에도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고 이를 조정하기 위해 각 직종이 망라된 위원회를 구성하여 협상에 임하고 있는 의사들에게 획일화 운운하는 것은 분명 그들에 대한 모독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한 연후에 나온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즉자적인 수준의 대응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의권은 이렇게 일방적으로 요구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해서 교사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교권의 회복을 외친다고 하루아침에 실추된 교사의 권위가 회복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 땅의 의사가 진정한 권력 (의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권력의 맥락을 바로 세우는 일이 긴요하다. 즉,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국민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음의 사항들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첫째, 의사 사회는 지금까지의 폐쇄적 전략을 개방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보건과 의료에 대한 정책의 결정권을 의사들만이 가질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의사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라고 해서 그를 매도하고 고립시키려고 하는 태도는 진정한 의권의 확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비판을 포용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이 그들을 배제할 때 얻게 되는 이익보다 클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제부터 의사사회는 뼈아픈 자기반성을 통해 손상된 국민과의 관계를 회복하기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남을 탓함으로써 반사적 이익을 얻으려는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여론을 이끌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셋째, 의권은 의사의 직업전문화 과정에서 이타적 서비스와 도덕적 헌신이라는 의사들의 자발적 자기투여를 사회가 인정해 주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미 확립된 것이므로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이나 그것을 신성한 불가침의 권리로 보는 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의권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꾸어 나가는 것이다.

 

넷째, 이상을 종합해볼 때, 의권이라는 말을 의료개혁의 화두로 삼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만약 진정한 의료개혁을 원한다면, 의권보다는 국민의 건강권을 그 출발로 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은 절대로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역사는 증거 한다. 의성으로 추앙 받는 히포크라테스의 윤리선서는 자신들을 다른 의료업자들로부터 구분하기 위해 선언된 것이었지만, 그것을 철저히 실천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이후 수 천년동안 후세에 모범이 될 수 있었다.

 

--강신익 (인제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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