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공법학자 칼 슈미트(1888∼1985)가 《헌법론》(1928) 기타 여러 저서에서 밝힌 사상.
원어명 Dezisionismus
이를 가장 체계적으로 논한 것이 《법학적 사고의 3종류에 관하여 Über die drei Arten des rechtswissenschaftlichen Denkens》(1934)이며, 법학적 사고를 제정법 사상(制定法思想)·결단주의·구체적 질서 및 형성사상(形成思想)의 3가지로 구별하였다.
결단주의란 주권적 결단의사가 규범과 질서에서의 무(無)와 혼돈(混沌)에서 비롯하여 모든 규범과 질서를 낳게 하는 절대의 근원이고, 그에 앞서 그것을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결단은 그 구속력의 근거를 오로지 결단 자체 속에 가진다고 하였다. 그 사상의 최초의 전형적 대표자는 T.홉스(1588∼1679)이다.
요컨대, 이는 비상시에 지도자의 정치적 결단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19세기적 법치국가주의·규범주의·형식적 합법주의가 특징을 이룬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바이마르 독일 민주주의에 대한 강권적 비판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슈미트는 그 후 그와 같은 결단주의를 포기하고 구체적 질서의 사상으로 이행하였다.
보수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에 대한 관심은 '긴급조치'와 같은 초헌법적 조치들이 '예외에 대해 결정을 내린다.'는 그의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의 예외란 비상사태를 말한다. 카를 슈미트의 이론 중에서 19세기의 주요한 법 이론과 국가이론에 대한 연구와 함께 주목받는 것이 결단주의적인 문제 해결책이었다. 카를 슈미트의 결단주의는 비상시에 지도자의 정치적 결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19세기의 법치국가주의. 규범주의. 형식적 합법주의가 특징을 이룬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바이마르 독일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슈미트는 그 후 그와 같은 결단주의를 포기했다. 슈미트의 정치적 결단주의는 국가의 결단과 관련이 있다. 슈미트는 정치적 결단주의가 합법적.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와 충돌할 경우에 나타난다고 했다. 슈미트는 비상사태, 특히 전쟁이 일어났을 때 힘을 발휘하는 권력의 힘을 정치적 존재로 보았다. 그 이유는 동지와 적의 구별은 결단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최근 들어 두드러진 카를 슈미트에 대한 관심은 미국 집권 세력인 네오콘의 정치적 스승으로 지목되고 있는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의 사상적 원천으로 알려지면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슈미트가 말하는 권력투쟁과 위임 독재 >
*권력투쟁은 정치 그 자체
권력투쟁은 정치의 과정을 말하면서도 정치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권력을 획득하고, 이를 분배하며, 획득한 권력을 행사하는 모든 과정이 바로 정치이다. 따라서 정치의 세계는 권력투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카를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고 하였다.
카를 슈미트와 같이 정치를 적과 자기편의 대립관계라고 한다면, 정치는 곧 적과 자기편으로 나뉘어 싸우는 권력투쟁이 되고, 권력투쟁은 곧 정치투쟁이 되는 것이다.
카를 슈미트는 비합법적인 권력투쟁으로 쿠데타와 혁명을 꼽았다. 그는 쿠데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무질서해야 한다는 조건에 야심적인 정치가나 군인이 요하다고 했다.
이에 반해 혁명은 지배계급의 부패, 통치자의 무능이라는 조건에 국민이 통치자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그 권력을 부인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합법적인 권력투쟁은 헌법적 한계 내에서 합리적으로 활동하는 정당과 선거와 의회 등을 통해 이루어지다고 하였다. 이때 정당은 여론을 형성하고 그것을 조직화하여 그 여론을 설득력 있게 전파시켜 나갈 때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합법적 권력투쟁을 통한 올바른 정치발전을 실현하기 해서는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정치적 관심으로 바꿔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헌법에 보장된 위임적 독재
1928년에 카를슈미트는 헌법이론'을 발표하였다. 그는 헌법을 보호하기 위해 권력을 합법적으로 위임받는다는 위임적 독재의 이론을 펼쳤다. 그리고 위임적 독재를 수행하는 당시의 구체적인 제도는 바로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제48조에 보장된 라이히 대통령의 비상대권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제48조는
"제1항
어떤 주가 라이히헌법과 라이히법률에 의해 부여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에는 라이히 대통령은 병력을 사용하여 이를 행하게 할 수 있다.
제2항
라이히 대통령은 독일 라이히의 공적 안전과 질서에 중대한 장애가 발생했거나 발생할 위협이 있을 때에는 공적 안정과 질서의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에는 병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카를 슈미트는 라이히 대통령이 전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비상대권은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대통령은 이 권한을 미리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헌법 제48조라는 합법적 수단에 의해 이를 위임받는다는 입장이었다.
카를 슈미트는 정말 나치스와 악수한 사상가일까?
카를 슈미트가 악마와 악수한 사상가라는 별명은 어떻게 하여 생긴 것일까? 1933년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된 카를 슈미트는 1933년 5월 1일 나치스에 입당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사상이 나치스의 이념적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히틀러라는 독재자를 국가의 '총통' 으로 법철학을 통해 정당화하였다.
카를 슈미트는 스스로를 급진적인 인종주의자로 생각했으며, 베를린에서 1936년 10월에 있었던 법학자들의 집회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하였다. 즉, 그는 이 집회에서 독일의 법이 유대 정신의 오염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 집회 이후 유대 인 학자에 의해 발표되는 모든 논문에는 유대인임을 상징하는 작은 심벌이 부착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적극적인 나치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슈미트는 나치스의 친위대로부터 가톨릭에 기반한 헤겔주의적 국가사상가라며 비판을 받았다. 그의 반유대주의는 단순한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카를 슈미트는 그의 주요한 공직들을 잃었으며, 법학자의 지위도 박탈당했다. 어쨌든 카를 슈미트는 나치스 체제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나치스의 권력 강탈에 대해 사법적인 근거를 제공해 준 인물이다.
카를 슈미트는 독재적 권력을 선호했으나, 그러한 권력의 형태가 히틀러의 체제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권위주의적인 비스마르크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이렇듯 카를 슈미트의 학설은 현대 정치학의 매우 민감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의 법 이론에는 전쟁상태에서 사법적으로 예외적인 권력에 대한 주장이 담겨있다. 이와 같은 권력은 영장 없는 체포와 같이 불법적인 것을 합법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는 전쟁상태 하의 최고통치권자인 대통령은 이미 의회에 의해 군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된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최근의 또 다른 예로는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고문 금지법이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국가 안보의 이름하에 무시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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