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시장경제와 정부의 역할

팔락 2010. 4. 19. 10:45

      시장경제와 정부의 역할:

                       정부주도의 경제사회 운영에 대한 비판과 반성

                                     최병선 (서울대 교수)




1.  서  론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경제사회 운영의 틀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온 지 20년, 「큰 정부」를 지양하고 「작은 정부」를 구현하겠다는 말을 들어온 지도 짧게 잡아 10년은 된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변함없이 정부주도의 사회, 「큰 정부」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민간주도로의 전환과 「작은 정부」의 실현은 현정권을 포함해 역대 정권의 변함없이 중요한 정치 슬로간(slogan)이자 개혁의 모토였다. 그런 이유로 그간 이 방향으로 다소의 제도개혁과 변화가 이루어져 온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이것으로 우리 경제사회의 운영방식이 과거의 틀에서 벗어났거나 벗어나고 있다고 볼만한 증거나 징후를 찾기 힘들다. 최근 몇 년간의 경험은 오히려 우리가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6.25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외환위기 속에서 출범한 현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개혁과 운영의 기조로 삼아 일련의 경제사회 제도개혁을 추진하고 있다지만 우리가 보는 현실은 외려 이런 개혁의 기치가 무색할 지경이다. 외환․금융위기의 와중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지만 대부분의 금융기관이 사실상 국유화된 상태다.1) 부실금융기관 및 기업의 퇴출과정은 기업의 생사여탈권이 아직도 정부의 손에 쥐어져 있음을 보여 주었다.2) 시장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는 정부의 의도와 성향이 조금도 꺾이지 않고 있음은 금리․주가․환율․가격 등 거시경제상황을 반영하는 지표들의 운영에서 다시금 확인되고 있다.3) 대학의 신입생 선발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면서 “논술고사는 안된다,” “기여입학제는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2002학년도에 대입시험을 치르게 될 고교생부터는 학교에서 사설 모의고사를 보게 해서는 안되고 입시관련 과목의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교육당국의 방침에 따라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학원에 가서 비싼 모의고사를 보아야 하는 난센스(nonsense)가 벌어지고 있다.

        

         우리 정부가 기업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부가 국민의 경제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속속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그리고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명분과 실질의 괴리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 현실, 바로 그것이다. 민간부문에 대한 정부개입의 범위와 심도, 제도의 투명성과 정책의 예측가능성, 「법의 지배」 원리의 확립 등 그 어느 면을 보든 민간주도의 경제사회나 「작은 정부」를 향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가 듣는 것은 그런 구호들이고, 날로 더 크게 들리는 그런 구호 아래 정반대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말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개혁의 피로감'을 말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는 이유도 이와 긴밀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개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부정해서가 아니고 '개혁'이란 것이 이처럼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기에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개혁의 피로감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제도개혁에 대해 국민들이 극도의 냉소주의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은 단기간의 개혁과정에서 정부가 특정 결과의 달성을 목표로 조급하고 재량적이고 차별적인 개입을 거듭함에 따라 수많은 정책영역에서 제도개혁이 실패하고, 실패가 거듭되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최병선, 2000b).

        

     현정부의 개혁을 비판하려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지 않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런 문제는 현정부만이 아니라 역대 모든 정부의 문제였다. 그 모두가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 경제사회로의 전환, 「큰 정부」에서 「작은 정부」로의 전환을 약속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정부주도와 「큰 정부」의 수렁으로 깊숙이 빠져들어 왔을 뿐이다. 도대체 이 모순과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 글에서 다루어 보려고 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이 문제는 결코 정권의 개혁의지나 개혁의 일관성 결여를 탓하는 차원에서 다루어지거나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복잡해질대로 복잡해진 경제사회의 효율적인 운영과 발전의 원리에 대한 성찰과 재발견이 없이는, 그리고 ‘제한적 권력의 정부(limited government)’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적 모델을 스스로 부정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현실정치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반성이 없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이런 모순과 역설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경쟁적이며 개방적인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

        

      또한 이 문제는 더 이상 인간이성의 상대적 합리성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될 성질의 문제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이 문제를 행정책임 및 윤리의 차원에서 접근해 보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롭고 경쟁적인 사회, 다양성과 창의를 북돋우는 사회는 현대사회의 이상이다. 이 사회는 오로지 정부와 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속박하며, 차별을 조장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며, 획일과 복종을 강제하지 않을 때 비로소 가져보고 누려 볼 수 있는 그런 사회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회, 자기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기회주의적 행동이 판을 치고 묵인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 정부와 권력이라면 그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물론 어떤 민주정부와 권력도 이런 사회를 만들려고 의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과 간섭이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이런 결과를 낳고 있다고 한다면, 또한 이로 인해 정부와 국민간에 불신의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면, 정부는 결코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만일 정부와 권력이 이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회피하려 하거나 부정하려 한다면 이는 비윤리적이다. 그것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국민의 무한대의 신인(trust and confidence)에 기초해 절대적인 권력을 보유하고 행사하는 정부의 도덕적 책임은 따라서 무한대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2.  정부주도 경제사회 운영의 정당성 전제: 비판적 평가


   가. 공익개념의 모호성


        경제사회를 정부주도로 이끌어 가는 것, 정부가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과 시장경제의 작동에 개입하는 것의 정당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공익을 정의하고, 보호하고, 촉진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흔히 공익으로 표방하는 것은 국가발전, 경제성장, 산업발전, 교육과 과학기술의 진흥, 국민보건․안전․후생의 증진, 환경보존, 소비자보호, 중소기업 보호, 계층간․지역간 소득격차의 해소, 사회의 안녕과 질서 확립, 경제사회적 형평성의 확보, 공중도덕․전통․문화유산의 보존 등등 무수하고 다양하다. 이런 가치들은 그 자체가 공익인 것처럼 보이고, 따라서 누구도 쉽게 이의를 달기 어렵다.

        

     그러나 우선 이런 가치개념이 하나같이 매우 추상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구체적으로 국가가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 때 그것이 국가발전인가? 소득의 완전한 평등이 이상이 아니라면 그럼 어느 정도의 소득격차가 바람직한 수준인가? 경제사회적 형평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각양각색일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가치들간에 존재하는 이율배반과 상충성(trade-offs)을 고려한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나 권위주의 사회와 달리 자유민주사회의 최대의 특징은 사전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된 공익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결함 같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여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과 가치가 있다. 그 사회가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와 공익은 국민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고, 그것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정의되어야 한다고 믿는 데 자유민주주의의 참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기에 대단히 큰 문제가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애로우(Kenneth Arrow)가 ‘불가능성의 정리(impossibility theorem)’로 잘 요약했듯이, 투표절차를 통해 개개인이 선호하는 선택(individuals' preferred choice)과 집단적 의사결정(collective decision)에 의한 선택이 확실히 일치되도록 개인들의 선호를 묶어(combine)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국민 개개인의 선호와 집단적 의사결정에 의한 사회적 선호는 일치할 수 없고, 따라서 국민의 ‘집단적 의사(collective will)’는 언제나 매우 불확정적으로 그것도 불완전하게 표현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런 가치들의 구체적 내용을 정의하고 규정해야 하는 역할은 어쩔 수 없이 정부에 주어지게 되나, 여기에는 다시 주인-대리인의 문제(principal-agent problem)가 수반된다. 일반적으로 주인의 의사와 주문이 분명할 때에도 대리인이 전적으로 주인의 뜻에 따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편의에 따라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기 마련인 바, 하물며 대리인인 정부에 공사(公事)를 맡길 수밖에 없는 주인인 국민의 집단적 의사와 주문 그 자체가 일의적으로 분명하게 정의되고 표현될 수 없을 때 정부의 기회주의적 행동(agent opportunism)의 여지가 얼마나 크게 남아 있을지는 불문가지의 일이다. 물론 민주주의의 헌법적 원리, 즉 삼권분립을 통한 권력의 견제와 균형(입법통제와 사법통제), 주기적 선거, 연방주의나 지방자치제도, 행정정보의 공개 등이 바로 정부와 권력을 견제하고 책임을 묻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강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부가 언제나 국민의 뜻에 맞게 공익을 정의하고 이를 실현해 나가도록 확실히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정부가 국가발전, 경제성장, 산업발전 등등의 가치의 실현, 즉 공익을 내세워 민간활동과 시장에 대한 간섭과 개입의 구실로 삼을 때 공익의 구체적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가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가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가치를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그것의 내용을 채우는 등의 일이 온통 정부에 맡겨져 있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국민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하고 따라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명령할 능력이 없는 한, 정부는 정부가 하는 모든 일을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정치적 책임의 역사는 공익 개념의 해석의 역사”라는 말의 의미가 이것이다(Goblentz, 1968).

       

     이처럼 정부가 공익이란 이름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상황은 대단히 위험천만하다. 나치(Nazism)의 경우가 잘 보여 주었듯이 정부는 공익을 위해 존재하고 정부가 하는 모든 일은 무조건 공익적이라고 한다면 인류사회는 결국 파국에 이르고 말 것이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공익’을 앞세워 등장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정부이고, 그 아래서 이루어지는 권력의 횡포다.


   나. 사익의 공익화 현상


        공익개념의 불확정성 문제는 정부가 ‘공익’으로 정의하는 공익이 구체적으로 누구의 이익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좀더 확연하게 부각된다. 우리가 공익이라고 할 때 그것은 최소한 사익을 추구하는 특정 이익집단의 이익의 확보나 증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불특정 다수 국민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공익을 쉽게 ‘국민의 이익’--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또한 현재와 미래에 걸쳐--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사실은 이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부주도의 경제사회에서는 ‘사익의 공익화’ 현상이 즐비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4)

        

     제한된 자원을 갖고 있을 뿐인 정부가 ‘공익’이란 이름으로 민간활동과 시장에 개입할 때 그것은 불가피하게 선택적 개입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정부가 산업발전을 도모한다고 할 때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산업의 발전을 지원하는 일이기보다는 정부가 중요산업․전략산업이라고 규정한 소수의 산업만을 특별히 보호하거나 지원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중요산업으로 선정된 산업의 입장에서 보면 정부의 이런 선택적 개입은 환영할 일이지만, 여기서 배제되거나 소외된 산업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부당한 차별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정부는 산업연관효과나 고용효과를 내세워 중요산업을 선정하고 이 산업에 대한 특별한 보호와 지원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어떤 산업이 중요산업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 객관적으로 확립된 기준은 아직 없다. 아니 어떤 산업이 중요산업이고 아닌지는 시장에서 판결이 날 문제이지, 정부가 미리 알거나 예측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면에서 정부의 선별적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거는 매우 빈약하고, 이것은 정부가 내세우는 ‘공익’이 과연 공익인지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사익의 공익화 현상은 우리 나라와 같은 정부주도의 경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정부가 특수이익집단에 포획(capture)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부가 국민의 이익, 소비자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취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특수이익집단의 이익에 봉사하는 경우들이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정부는 변호사서비스의 질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변호사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개입이 법률서비스의 질을 높이기보다는 경쟁을 억제하여 오히려 서비스의 질을 저하시키고 수임료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변호사 1인당 국민수를 보면 미국은 352명, 일본은 2,212명인데 비하여 우리는 12,628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민사본안사건(1심)의 변호사선임율이 14.1%(97년도 기준)에 그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또 다른 예로 1996년 재정경제원은 1972년 8.3조치의 후속조치로 사채양성화를 위해 설립을 허용했던 투자금융사(단자사)를 모두 정리해 이들을 종합금융회사와 통합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 하에 종합투자금융업법의 제정을 검토하였으나, 재무부 차관 출신의 종합금융협회장을 앞세운 업계의 반대에 부딪쳐 이를 백지화하는 대신 종합금융업법을 개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고, 이에 대거 종금사로 전환된 단자사들의 무리한 단기외채의 차입이 결국 1997년말의 외환위기를 촉발시킨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포획현상의 발생원인은 여러 가지다. 일반적으로 행정기관이 특수이익집단이 ‘공익’으로 포장해 제공하는 정보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자원 면에서 이들보다 매우 불리한 입장에 서 있으며, 이들과 갈등을 유발하는 것을 극히 꺼리고, 외부신호에 의존하는 성향을 보일 때 포획의 가능성은 높아진다(최병선, 1992: 200-6). 더 큰 문제는 국민의 눈으로 보기에 특수이익집단에 포획된 것이 분명함에도 정작 정부기관은 이것을 의식조차 못하는, 소위 공익과 사익의 착오, 착시현상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업자단체에 퇴직관료가 취업하는 관행도 이런 포획현상을 유발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1998년 규제개혁위원회의 사업자단체 규제개혁 대상이 된 155개 단체 중 건설기계협회, 전력기술인협회 등 48(31.0%)개 단체에 퇴직공무원이 취업하고 있으며, 이들 단체에서 실질적으로 협회의 운영을 담당하는 상근임원의 63.0%를 퇴직공무원이 점하고 있는 현실이 이런 점을 시사해 준다(사공영호, 2001).



   다. 정부개입의 유일한 정당성 논거: 시장실패의 존재


        정부가 민간활동에 개입하고 시장경제의 작동에 간섭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와 명분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공익의 보호와 촉진이다. 그러면 어떤 경우와 상황에서 민간활동과 시장경제는 공익을 저해하거나 공익에 반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거나 작동하게 되는가? 시장의 역할과 기능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든 인간이 사익만을 추구하는, 그래서 무질서와 혼란이 지배하는 야만적인 시장에서 공익이 확보될 리 만무하다고 보고, 정부의 개입과 간섭은 항상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경제학자들은 이런 경우를 시장실패(market failure) 현상이 존재하는 경우로 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① 의도한 바 없이 타인(또는 타기업)에게 비용을 초래하거나 편익을 주게 되나, 그것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가 시장을 통해 수수되지 않는 상황을 일컫는 외부효과(externalities)가 존재하는 경우, ② 거래상대방 간에 정보의 불완전성과 비대칭성(imperfect and asymmetrical information)이 존재하는 경우, ③ 독점이 존재하는 경우, ④ 무임승차(free ride)로 인해 공공재(public good)를 충분하고 적절한 수준으로 공급할 수 없는 경우, 또는 공공재의 속성상 일정수준의 공공재의 공급이 필요하고 일단 공급이 이루어지게 되면 수혜자를 제한해야 할 필요가 적은 경우에 한하여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목적에서 정부의 시장개입이 필요하고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소득과 부의 분배가 공평하지 못하다고 보고 경제사회적 형평성의 실현을 위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필요성과 정당성이 있다는 견해, 다시 말하면 시장결과의 불공평성을 추가적인 시장실패 요인으로 간주할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경제학자들도 매우 큰 시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시장과 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각자의 신념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이 이것을 시장실패요인으로 간주하는 반면, 비록 소수이나 이를 시장실패로 인정하지 않는 소수의 자유주의(에 투철한) 경제학자들이 있다. 그렇다고 후자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소득과 부의 분배가 결코 공평하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전자의 대다수 경제학자와 크게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은 시장결과가 불공평하다면 이는 시장 밖에서 명시적인 재분배정책을 통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서 결코 시장규칙과 원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그 부분이다.   

        

       이런 의미에서 명백하게 시장실패 현상이 확인되는 경우에 한하여, 다시 말하면 시장실패를 보정하는 차원의 정부개입은 공익적이고, 이 때의 정부개입은 당연히 정당화될 수 있다.5) 그러나 이런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부가 특정의 정책목표 또는 특정의 시장결과(market outcome)의 실현을 위해 민간활동과 시장경제의 작동에 개입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정부가 특정 정책목표 또는 특정 시장결과의 실현을 이유로 시장에 개입하려 하는 것은 시장에 맡겨두어서는 이런 목표가 달성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 정부가 이렇게 판단하는 기초와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정부는 산업정책 차원에서 특정산업의 발전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산업이 유망하고 경제사회적으로 중요한 산업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하면 누구나 이 산업이 그렇다고 믿고 알고 있다면, 굳이 정부가 나서서 특별한 지원을 베풀지 않더라도 이 산업은 시장에서 우대와 환영을 받아 빠르게 성장할 터이다. 왜냐하면 시장에서는 항상 좀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산업에 희소한 자원이 우선적으로 배분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때에는 언제나 왜 시장을 통해서는 정부가 성취하기 원하는 정책목표가 실현될 수 없다고 믿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고 입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사례에서 해당 산업이 정부가 바라는 만큼 빨리 그리고 충분하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면 문제의 근원은 이 산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융시장이나 노동시장, 토지시장 등--흔히 생산요소 시장이라고 부르는데--제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지 못하는 다른 시장에 있다. 예를 들면 이 산업에 충분한 자금과 인력이 공급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금융시장과 노동시장에 정보의 불완전성과 비대칭성 등의 시장실패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 시장의 시장실패를 교정하는 일을 우선하는 게 옳다는 말이다.



   라. 조정실패의 극복과 정부개입 확산의 메커니즘


        시장실패 요인의 극복이라는 미시적․정태적(static) 차원의 정부개입의 정당성 논거에 더하여, 좀더 거시적․동태적(dynamic)인 차원에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고 민간활동에 간섭해야 할 이유로 거론되는 것이 시장의 조정능력의 결여 또는 조정실패(coordination failure) 현상이다. 역사적․문화적․지리경제적 이유로 또는 장기간에 걸친 저발전 상태의 지속으로 여러 가지의 구조적인 발전 제약요인--병목(bottlenecks)--이 고착되어 있는 경제사회(혹은 시장)에서는 시장의 자생적인 발전의 계기와 동인이 마련되기 어려우므로 정부가 좀더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논지다. 이 논리는 위의 시장실패에 기초한 정부개입 정당화 논리의 변형(variant)으로서,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들기 위해 정부개입이 필요하다고 보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만 시장실패 이론이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정부개입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일반적인 논거라고 한다면, 조정실패의 극복을 위한 정부개입의 논거는 주로 일본 등 후발산업국(late industrializers)이나 우리 나라와 같은 후후발산업국(late, late industrializers)의 산업화 초기단계에서의 정부개입의 정당화 논거로 원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논리에서 (후)후발산업국의 정부는 대체로 외국으로부터 자본(차관)과 기술을 도입해 사회간접자본 부문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공기업을 설립하는 등 산업화의 기반을 구축해 나가는 개발전략을 채택하였다. 말하자면 경제사회가 장기․저발전 상태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민간이 결여하고 있는 자본과 기술, 그리고 기업가정신을 정부가 대신 메꾸어 주어야 한다고 보고, 정부가 스스로 기업가적 역할(entrepreneurial role)과 경제사회 발전의 촉매(catalyst) 또는 견인차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것이다. 문제는 시장원리를 좇아서가 아니라 정부가 경제사회의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전략적 육성산업을 선정해 이 산업을 빠르게 발전시키려 할 때 정부개입은 매우 빠르게 경제사회의 모든 분야로 확대되어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정부는 전략적 육성산업에 장기저리의 투자재원을 조달해 주고, 공업단지를 건설해 주며,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해 주어야 할뿐만 아니라, 이 산업의 확실한 채산성 확보와 지속적 성장을 위해 국내시장은 물론이고 해외로부터의 수입경쟁을 막아주고 노사관계의 안정을 보장해 주는 등 모든 특혜적 보호와 지원을 베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정부가 시장원리를 배제시킨 채 의도적 발전계획에 따라 경제사회의 발전을 주도하게 되면 경제사회는 불가피하게 정부의 기획 및 명령과 통제 아래 놓이고, 이에 따라 점차 시장기능이 위축되고 민간의 자율성이 약화되면서 경제사회의 모든 부문이 정부간섭과 개입의 질곡으로 빠져들게 되면서, 급기야 경제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정부가 매우 세부적으로 간섭하고 지도하지 않고서는 경제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정부주도(government-led)의 경제사회가 되고 만다. 이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부주도의 경제사회가 사회주의 체제를 닮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개입주의자나 정부간섭의 옹호자도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가 사회주의 경제사회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꿈에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사유재산제도가 보장되고, 정부가 시장경제의 제도적 미비점과 부작용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개입하고 간섭할 뿐인데 그것이 어떻게 사회주의가 될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 정부는 그저 공익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기업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에 간섭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중도적 개입주의(moderate interventionism)는 어떤 면에서 더 위험하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런 개입주의 하에서는 정부 스스로가 정부개입을 정당화하는 ‘공익’ 개념의 정의자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개입주의자가 말하는 자유기업주의는 어디까지나 “정부의 계획과 의도에 정확히 순응하기만 한다면 기업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자유기업주의일 뿐이고, 시장에는 정부가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온순하게 집행하는 권리 외에는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Mises, 1964: 59). 이런 상태는 정확히 말한다면 사회주의체제 하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중도노선을 추구하는 개입주의는 결국은 사회주의로 귀착되고 만다. 이런 중도적인 입장에 서 있는 정부개입의 옹호자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절충 또는 두 체제의 장점만의 조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소비자의 절대적 우위(supremacy)를 기초로 하는 시장경제와 정부주도 경제의 두 체제는 결코 하나의 합성물(practicable composite)이 될 수 없다. 미제스(Ludwig von Mises)가 개입주의는 ‘할부에 의한 사회주의(socialism by installments)의 실현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이유가 이것이다(Mises, 1964: 240).

        

      그의 논리에 따르면 시장경제에서 기업가는 무조건적으로 소비자의 우월성에 지배되며, 이들은 자신의 영업활동이 소비자에 의해 승인을 받고 그것을 통해서 이윤을 얻기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이런 노력에서 실패하면 손실을 보고, 그들의 방법을 수정하지 않으면 결국 도산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정부는 기업활동의 시장성패에 대한 궁극적 심판자인 소비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명령이나 금지로 정부의 계획과 의도를 관철시키려고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달성하기를 바랬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매우 어렵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정부개입으로 초래된 새로운 상황에 자기들의 행위를 적응시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런 반응은 정부의 눈(그리고 정부개입을 옹호하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정부가 바꾸기를 원했던 개입이전의 시장상태보다도 더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이 때 정부가 처음의 개입을 철회하고 더 이상의 개입을 자제하기를 원치 않는 한,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시장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부의 눈에 매 번의 정부개입의 결과가 정부가 교정하기를 원했던 전번의 상태보다 더 불만스럽게 보이는 이상, 정부개입의 폭은 점점 더 넓어지고 심도는 깊어지게 되며, 이 과정은 시장요인이 사실상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계속된다(Mises, 1964: 59).

        

      이처럼 정부개입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당초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할 때 개입주의자나 일반국민은 이런 문제가 자본주의나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구조적 결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이런 오해는 개입주의적 정책과 제도가 대부분 경제적 자유와 시장경제의 보존을 명분으로 삼아 이루어짐으로써 가중된다. 우리가 정확히 이해해야 할 사항은 이런 문제의 진정한 원인이 정부개입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이다. 시장경제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성급한 개입주의와 인간이성에 대한 자만이 정부개입의 악순환을 불러오는 장본인이다.



   마. 정부개입의 악순환과 ‘강한 정부’의 역설


        위에서 시장에 대한 정부개입은 그 속성상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경제사회는 본래 유기적이어서 정부가 어떤 정책목표의 달성을 위해 기획의 방법으로, 명령과 지시를 통해 시장에 개입하게 되면 필경 시장에 왜곡이 발생하고, 이 때 정부가 당초의 계획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한, 또한 이 왜곡을 시정하지 않고서는 당초의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없으므로, 모든 연관 산업과 분야로 개입을 확대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런 정부개입의 악순환 현상은 ‘약한 정부’에서 더 심하게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강한 정부’ 하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국제정치경제학자인 아이켄베리(John Ikenberry)는 이를 ‘강한 정부의 역설(irony of state strength)’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강한 정부’는 한마디로 말해 정부가 그 사회의 강력한 경제사회세력이나 집단의 압력과 관계없이 국가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자율성(autonomy)을 지니고, 이 목표의 실현을 위해 시장에 매우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수단을 보유하고 있는 정부다. 일반적으로 이런 정부 하에서 국민은 시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부 역시 이런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당연한 책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역설적인 상황이 야기된다.

        

       우선 ‘강한 정부’는 그것이 ‘강한 정부’이기 위해서는 특정 경제사회집단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정부의 자율적 의지에 따라 필요한 정책을 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정부가 완전히 자율적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강한 정부’는 필연적으로 과거의 정책약속(past policy commitments)에 묶이기 때문이다.6) 또한 겉으로 보기에 ‘강한 정부’가 속으로는 특수이익집단의 포로가 되어 있거나 이들의 지배를 받는 경우도 없지 않다. 정부가 비효율화된 공기업을 쉽게 어쩌지 못하는 것이 좋은 예다. 이런 이유로 기왕에 경제사회에 대한 정부개입의 정도와 폭이 크고 넓은 정부일수록 이후의 정부행동의 신축성은 떨어지고 정책선택의 폭은 좁아지게 된다.

       

        ‘강한 정부’의 또 다른 역설은 정부의 힘에 의한 문제해결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강한 정부’는 경제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해결을 시장에 맡겨 두는 것, 혹은 시장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이것을 ‘약한 정부’의 징표로 착각한다. 그러나 잘못된 시장개입을 철회하고 시장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도록 일임하는 일이야말로 ‘강한 정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성격의 일이다. 정치적 과정을 통해 좀더 쉽게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는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정부야말로 ‘강한 정부’이다. 예를 들면 사양산업을 마냥 보호해 주는 것과 시장원리에 따라 도산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후속문제를 처리해 나가는 것 중 어느 편이 소위 ‘강한 정부’가 취하기 쉽고 편한 길이겠는가? 정부의 지속적인 시장개입을 요구하는 정치적 압력을 거부하고 그런 정책관행을 단절하려는 결연한 의지와 능력이 있는 정부가 말 그대로 ‘강한 정부’다. 이런 정부만이 확실하게 경제사회의 개혁과 구조조정을 이룩해 낼 수 있다. 바로 이런 ‘강한 정부’의 역설에서 우리는 과거 김영삼 정부나 현 김대중 정부의 시장개혁이 공전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최병선, 2000b).



3.  자생적 질서의 존재와 정부주도의 한계 


   가. 자생적 질서의 존재와 중요성


   정부주도 경제사회란 한마디로 말해 정부가 경제사회질서(economic and social order)를 설계하고 집행하는 사회다. 우리가 경제사회의 질서를 모두 인위적 질서(taxis; made order)로 간주한다면 정부가 경제사회를 지배하고 규율하는 질서를 설계하고 집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사회에는 인위적 질서, 즉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고안된 질서(deliberately designed order) 외에 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자라나고 부단히 진화하며 발전하는 자생적 질서(cosmos; grown order; spontaneous order)가 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특히 정부가, 어떤 질서관념을 갖고 있느냐--특히 자생적 질서의 존재를 이해하고 이것의 중요성을 인정하느냐 여부--는 매우 중요하다. 한 사회의 운영방식과 진로를 결정짓고 그 사회의 제도와 정책의 특성을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 질서관념이기 때문이다.

        

      자생적 질서는 “인간이 고안(설계)한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과 조직)의 행동의 산물”이다(Hayek, 1979, I: 37).7) 도대체 각양각색의 생각과 동기를 가진 천차만별의 사람들의 행동이 어떻게 어떤 질서를 생산해낸다는 말인가? 질서는 어떤 권위(authority)에 의해 타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는 일반인들에게 이 말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것이다. 사실 자생적 질서는 오로지 우리가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추상적 관계(abstract relations)를 추적하면서 머릿속에 재구성(mentally reconstruct)할 때 비로소 발견해 낼 수 있는 그런 질서,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매우 추상적인 질서(abstract order)다. 

        

       인간사회의 자생적 질서는 “수많은 사람의 행동의 산물”이라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자연계에는 어떤 질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연질서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숲에는 갖가지 나무와 풀과 다양한 생물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것을 보는 자마다 이런 질서와 조화를 지어내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한 섭리에 찬탄한다. 자연질서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연계의 자생적 질서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인간사회를 본다면 인간사회에도 자연질서와 유사한 특성을 지닌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매일 새벽 우리가 눈을 뜨기도 전에 신문과 우유가 문밖에 배달되어 있고, TV가 방영되고 있다. 밥상에는 철따라 다양한 채소와 과일이 올라온다. 밥을 먹고 집을 나서면 버스와 택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신문과 우유의 배달인,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고 우리 손에까지 이르게 한 수많은 사람들, 버스와 택시기사, 그 어느 누구도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고 사실 알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런 일상적인 일들을 무심히 보아 넘기지만, 도대체 우리가 이런 일상을 영위하도록 만들어 주는 이런 질서의 창조자는 누구인가? 이 역시 하나님인가? 아니면 정부인가?

        

       자연계는 적자생존 법칙의 지배를 받고 그 법칙 하에서 아름다운 자연질서가 피어나듯이, 인간사회에도 모든 사람들이 합의한 개인행동규칙(rules of individual conduct)이 있고 이 기초 위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난 사회질서가 있어 이것이 인간사회의 기본을 유지해 주고 있다. 사회질서의 기초인 개인행동규칙은 누군가의 의도적 설계(고안)의 산물이 아니라, 인류사회의 진화과정에서 인간이 무한히 복잡하고 불확실한 사실들에 적응해 오는 과정에서 “그것에 따르는 것이 좋다”는 반복적 경험을 통해 선택되고 진화해 온 규칙이다. 개인행동규칙과 함께 또 다른 사회질서의 기초를 제공하는 도덕, 관습 등 규범적 규칙이나 문화적 전통도 이런 반복적 학습과 진화적 선택의 산물이다. 이 외에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법의 규칙(rules of law)이 있다. 예를 들면 남의 이익을 침해한 자는 배상해야 한다는 등의 원칙이 이런 법의 규칙에 속한다. 이 법의 규칙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긴 하나, 인간이 앞의 규칙을 개선할 줄 알게 되면서 발전시켜 온 규칙들로서, 특정 결과나 목표의 실현을 위해 정부가 제정하는 법률과는 다르다.

        

       인간은 이런 제반 규칙의 지배를 받으며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사회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도 하고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기도 한다. 놀라운 사실은 자연질서의 지배를 받는 자연이 아름답고 신비스런 조화로 가득 차 있듯이, 이런 규칙의 지배를 받으며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도 매우 신비한 사회적 조화와 경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이끌려 전혀 자신의 의도에 없었던 목적[공익]을 증진한다. 개인은 그가 진정으로 사회적 이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는 때보다 자기의 사익을 추구함으로써 좀더 효과적으로 사회적 이익을 증진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1952[1776]: 194)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사회적 유익(공익)이라고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개인의 이기적 행동이 결과적으로 사회적 유익(공익)을 만들어내는 것은 모든 개인이 사회의 자생적 질서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이 이 자생적 질서에 따라 행동할 때 최대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최대한의 공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공익의 달성을 위해서는 개인의 사익추구적 행동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 각종의 인위적 질서를 고안하고 설계해 인간행동의 자유를 억제하고 제약하려 드는 것은 사회의 자생적 질서가 만들어내는 이런 기묘한 인간사회의 조화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시장질서의 역할과 기능




       시장질서는 이런 의미의 자생적인 사회질서의 전형이다. 시장질서는 사유재산과 개인의 자유영역(individual domain)을 침범하지 않으며 자기 행동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진다는 등의 단순한 규칙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규칙 아래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고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것이 경쟁이다. 우리는 흔히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낙오자를 만들어내는 경쟁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혐오하고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경쟁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경쟁의 사회적 기능은 이보다 심오하다. 경쟁은 분업과 전문화, 그리고(다시 말하면) 새로운 지식의 발견과 활용을 촉진한다. 이를 두고 하이에크는 “경쟁은 발견절차로 기능한다(Competition operates as a discovery procedure.)"고 말한다(Hayek, 1979, Ⅲ: 67-8). 경쟁이야말로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더더구나 이용되지 않았을 수많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경쟁만큼 개인(과 기업)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도록 쉴새없이 채근하는 것은 없다. 또한 경쟁은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지식과 재능을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일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과 재능을 획득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경쟁원리가 작동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소비자가 지불할 용의가 있는 가격에 이윤을 남기고 팔 수 있는 모든 물건이 생산되고, 가장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는 생산자에 의해 생산되며, 가장 싼 가격으로 판매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경쟁이 이런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경쟁이 소비자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자가 기업을 설립하고, 그것도 자신이 보유하고 있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동원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물건의 생산에 특화하고, 이를 위해 가장 이로운 자금을 동원하고 유능한 인력을 채용하며 최적의 생산시설과 기술을 갖추는 등 이용가능한 모든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해 끊임없이 시험하고 개선과 혁신을 거듭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금 주목해야만 할 점은 그 전체로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각 개인이 갖고 있는 (부분적인) 지식, 개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는 (서로 다른 또는 서로 달리 파악하고 있는) 지식의 활용(utilization of widely dispersed knowledge)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경쟁이고, 인간사회는 이러한 지식의 활용을 통해 발전하고 진보해 왔다는 사실이다. 현대사회와 같이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즉, 지식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는 사회)에서 더욱 더 무지해질 수밖에 없는 개인이 더 많은 편익을 얻을 수 있는 것도 한마디로 말해 경쟁의 덕분이다. 경쟁이야말로 시장에서 서로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개인들이 평화롭게 협력하면서 공동이익을 추구하도록 유도한다. 사익적 목적을 위한 개인의 노력이 그 개인이 염려하거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의 욕구(목적)를 실현하는데 기여하도록 만들고, 모든 개인이 각자가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과 전망)을 증진시켜 준다.

        

       이런 시장질서를 잘 이해하지 못할 때 시장질서에 대한 정부개입이 시작된다. 흔히 경쟁이 위와 같이 놀라운 결과를 실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완전경쟁시장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더불어 이런 완전경쟁시장의 조건은 현실적으로 충족되기 어려우므로 시장에 의존해 경제사회의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옳지 않다. 현실적으로 모든 시장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불완전한 시장에서도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경쟁원리는 여전히 작동하며, 이 경쟁원리에 의존할 때 자원배분의 효율성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이런 결과는 정부가 중앙집권적 계획방식을 사용하지 않는 한, 정부가 간섭과 개입으로 경쟁을 제약하지 않는 한, 정부가 개인이나 조직이 경쟁을 제약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한, 거의 언제 어디서나 달성된다면서, 불행히도 이러한 상태는 인류역사상 단 한번도 완전하게 실현되지 못하였다고 개탄한다. 밀튼 프리드만(Friedman, 1979: 17)도 “시장에서 사적인 왜곡(private distortions)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오늘날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최대의 간섭자는 정부“라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시장에서 경쟁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결과, 즉 시장결과(market outcome)는 불공평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 시장가격에 대한 오해의 소산이다. 시장에서 가격은 고도로 축약된 정보전달 수단으로서, 각 개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어디에 사용해야 할 것인지를 지시해 주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가격은 신호(signal)이다. 인간사회에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는 지식의 활용이 가능하게 해 주는,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매개물이 가격이다.

        

         이런 의미를 지니는 가격을 어떤 일의 가치(merit)나 어떤 노력에 대한 보수(remuneration)로 잘못 이해할 때 시장가격에 대한 그릇된 문제의식이 싹트고 정부개입이 시작된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누구도 차별적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시장게임의 결과는 오로지 개개인의 재주와 우연(skill and chance)의 결합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따라서 하이에크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시장을 통해 이루어진 소득 및 부의 분배상태는 그것이 누구의 의지나 의사에 따라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가 보장되어 있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각 개인의 재주와 우연에 좌우된 것인 이상, 그것의 도덕성을 운위하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이다.

        

        물론 재주와 행운(luck)이 연출해 내는 것이 시장게임이므로 예기치 않은 상황변화에 따라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보수(소득)는 감소하게 된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딱한 처지는 동정이 가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시장가격에 간섭하는 방법으로 이들을 도우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의 계획과 노력이 그릇되었음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고, 따라서 그런 그릇된 계획과 행동을 계속하도록 만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이 정부가 시장가격에 간섭하게 되면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전달수단이자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지시하는 가격의 신호기능이 죽게 된다. 예를 들면 중국으로부터 값싼 마늘의 수입이 급증해 가격이 폭락한 경우 정부가 국내생산농가의 마늘가격을 지지해 주게 되면 이들은 정부를 믿고 계속 마늘을 생산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다른 좀더 수익성 있는 작목으로 전환하지 않으려 할 것이며, 이 때 정부는 계속해서 이들을 보호하고 지원해 주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만다.  

        

       정부가 소비자보호를 명분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것 역시 불합리한 점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시장에서 소비자는 왕이다. 소비자가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은 기만적인 공급자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우선적으로 합리적인 소비선택을 하지 못하는 소비자 스스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예를 들면 소비자가 아직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정부가 소비자를 보호해 주어야만 소비자의 권익이 보호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역시 경쟁원리에 대한 오해의 소치다. 흔히 경제사회 문제의 해결을 시장경쟁원리에 맡겨 둘 수 있으려면 경제주체의 행동이 합리적이어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이 합리적이어야 경쟁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경쟁이 사람들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만든다. 복잡한 경제사회 문제의 해결에 경쟁보다 유력한 원리는 없다.

        


   다. 시장질서에 대한 정부개입과 인위적 질서의 한계

 

        이상과 같이 고찰하건대 시장질서에 대한 정치적 간섭(정부개입)은, 그것이 어떤 이유로 이루어지는 것이든,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시장질서에 대한 정부간섭은 특정 결과(particular outcome)의 성취를 목적으로 삼는 바, 정부간섭이 특정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별개의 강제행위(isolated act of coercion)인 이상, 간섭은 항상 전체적 질서(overall order)를 교란시키고, 자생적 질서가 의존하고 있는 모든 부분들(parts)의 상호조정을 가로막는다. 또한 간섭을 통해 얻어지는 특정 결과는 시장질서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행위(unjust act)이다. 왜냐하면 간섭은 차별적으로 강제를 받아야만 할 사람을 만들어 내는 한편, 이들의 희생 위에 다른 사람에게는 특혜를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정부주도 경제사회에서 정부가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과 시장경제의 작동에 간섭하고 개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부가 어떤 특정의 사회목적을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각 개인(과 기업)의 활동은 사익추구에 근본목적이 있으므로 이것을 제어하지 않으면 정부가 바라는 바 그런 특정의 목적 혹은 공익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보아서다. 그러나 시장은 각 개인이 추구하는 목적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것이 서로 다르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각 개인이 다른 사람의 노력으로부터 이득을 얻게 해 준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이에크가 말했듯이 “미리 정해진 공통목적의 부재(absence of prescribed common ends)야말로 자유사회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을 의미있게 만든다(Hayek, 1979, Ⅱ: 111).”

        

        특정의 사회발전 목표, 또는 공익의 실현을 위해 정부는 자생적인 사회질서를 억압하고 이를 인위적 질서로 대체하려 한다.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인위적 질서는 조직의 질서(order of organization)로는 적합하고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인위적 질서로는 무수하고 다양한 인간의 상호작용을 효과적으로 조정해 내고 이를 통해 사회가 발전하도록 만드는 데는 역부족이다. 이것은 인위적 질서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까다로운 성공요건을 필요로 하나, 현실적으로 이런 요건이 충족되기 매우 어려운 까닭이다(Kasper and Streit, 1998: 145).

        

       첫째, 인위적 질서의 고안자(설계자)는 구성원의 상호작용과 행동을 조정하는 데 필요한 충분하고 적절한 정보와 지식을 충분히 갖추어야 한다. 둘째, 그는 이런 정보를 잘 소화하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전달능력이 있어야 한다. 셋째, 그는 구성원들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하고 성과의 측정․감시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회가 단순할 때는 이런 조건의 충족이 그리 어렵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단히 복잡하고 개방된 사회에서 정부가 고안하고 설계하는 인위적 질서가 이런 조건들을 충족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간단한 예로서 무수히 많고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의 수백만에서 수억에 달하는 소비자와 생산자의 행동을 인위적으로 조정해 낼 수 있는 지식과 재간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인위적 질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구성원들이 질서의 핵심인 신호(signals)를 잘 감지하고 따라야 한다. 그러나 복잡한 사회에서는 이 신호가 왜곡되거나 상실되기 쉽다. 각종의 정부의 선전이나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정부가 부과하는 이런 인위적 질서에 순응하려는 동기는 매우 약하다. 따라서 인위적 질서를 집행하기 위해서는 위반자를 강력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위적 질서에 필연적으로 강제력의 사용이 수반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정부의 강제력 사용은 불가피하게 개인행동의 자유를 억압하고 제약하게 된다. 또한 인위적 질서는 급변하는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나 대응능력 면에서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 더 나아가 인위적 질서는 성격상 중앙집권적으로 운용되기 마련이며 매우 경직적이어서 새로운 아이디어의 실험이나 혁신 등 새롭고 다양한 문제해결책의 발견을 고무시키지 못한다.

        

          더 나아가 인위적 질서의 설계와 운영에는 엄청난 지식과 정보가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정부의 능력에 명백한 한계가 있는 이상 인위적 질서 하에서는 의도하지 않은 또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복잡하고 개방된 사회일수록 이 문제의 심각성은 증폭된다. 한편 이런 부작용을 치유하기 위한 개입은 또 다른 의도하지 않고 예기치 않은 부작용을 낳는다. 바로 여기서 앞에서 지적한 정부개입의 악순환이 불가피해지게 된다. 예를 들면 해고제한 입법이 실업의 감소에는 다소 기여할지 모르나, 새로운 일자리의 제공을 지체시키고, 임대료 규제가 결국은 임대주택 공급의 감소를 초래하는 것과 같다. 이런 경우 새롭게 드러난 문제의 해결을 위한 개입이 불가피해지고 그 결과 이 악순환 과정은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시장기능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시장을 불신해 정부개입을 앞세우는 정부와, 시장기능을 이해하고 정부개입을 자제하는 정부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예를 들면 석유위기가 발생하자 우리 정부는 석유가격의 급상승이 초래할 경제사회적 충격과 여파를 우려해 우선적으로 석유가격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가격통제는 가수요를 조장하였다. 석유의 매점매석과 암시장 거래가 성행하자 정부는 단속에 나섰다. 다른 한편으로는 석유가격의 급격한 변동의 충격을 최소화한답시고 석유안정기금을 조성해 석유가격을 시장가격보다 낮은 수준에서 조절하였다. 그에 따라 석유소비가 줄지 않자 에너지절약 캠페인을 벌였다. 석유의 장기․안정적 공급이란 목표 아래 석유개발공사를 설립하고 석유탐사와 시추에 나섰다. 대체에너지의 연구개발에 대한 재정지원도 늘렸다. 이런 많은 의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 나라는 오늘날 에너지 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선진국 정부는 석유위기가 발발하자 즉각적으로 석유가격의 인상을 허용하였고, 이에 따라 에너지 이용패턴에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대형자동차 대신 소형자동차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급증하였다. 정부는 에너지절약 캠페인을 벌이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장에서는 에너지절약형 기술의 연구개발이 여기저기서 착수되었다. 저유가 시대에 채산성이 없어 방치되었던 석유와 가스공의 시추 및 탐사작업이 개시되고 기술이 개량되는가 하면, 폐광이 다시 활기를 띠고, 석탄의 액화작업도 속속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오늘날 선진국들은 석유의존도가 석유위기 이전보다 크게 낮은 상태에 있다.  

        

         무엇이 이런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냈는가? 선진국에서 이런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정부의 용의주도한 계획이나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었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국민적 설득이나 무언의 압력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이들은 단지 자본주의 사회의 두 가지 기본 메커니즘, 즉 사유재산제도의 보장에 따르는 인간의 행동의 유인 메커니즘(incentive mechanism)과, 가격으로 매개되는 시장의 정보의 메커니즘(information mechanism)을 신뢰하고 잘 활용하였을 뿐이다. 석유가격의 상승이란 새로운 신호와 이 신호에 담긴 다양한 정보에 모든 시장행위자가 합리적으로 대응하고 반응하는 과정을 통해 이런 놀라운 결과가 이룩된 것이다.




4.  정부주도 경제사회 운영의 폐해와 행정윤리    

  

    가. 정부주도 사회와 행정윤리 문제의 성격


        이제 우리는 경제사회를 정부주도로 이끌어 가려는 사고의 무지함이나 무모함을 넘어 그것의 비윤리성을 지적해야 할 지점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윤리의 범주나 도덕적 책임의 차원에서 행정의 문제를 논의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부정부패는 행정윤리 문제의 한 극단일 뿐이며, 행정윤리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행정문제가 많다. 우리는 어떤 경우나 상황에서 정부에 도덕이나 윤리의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런 차원에서 책임을 묻는가? 한마디로 말해 정부가 국민의 기대와 신뢰에 맞게 정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다.   

        

       책임(responsibility)은 대응(response)과 어원이 같다. 책임은 누군가의 요구에 대응해 ‘답할 수 있는 것(answerability)’이다(Kaplan, 1982: 211). 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답할만한 위치에 있으며, 그런 기대와 신뢰를 받을만할 때에만 책임이 성립한다. 우리가 어린이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 말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내게 책임이 있다”는 말은 내게 어떤 행동을 취할(취하지 않을) 능력이 있고, 그런 기대를 받을 만한 자격과 가치가 있으며, 나에게 그런 책임을 지우는 것이 옳다는 도덕적 판단을 내포한다. 또한 “내가 책임을 진다”는 말은 내게 책임을 지우는(묻을 수 있는) 어떤 집단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기가 그 집단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내게 책임을 부여한 집단을 의식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 자유가 내게 주어져 있지 않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상태나 위치에 자기자신을 투입(commitment)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책임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원인이나 의도(목적),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의도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비의도적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어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사고는 누가 그렇게 의도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반대로 의도가 책임의 충분조건이 되는 것도 아니다. 법적 책임은 의도가 아니라 행동에 의해 정의된다...어떤 행동을 수행하려는 동기의 도덕성(morality of the motive)이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면제시켜 주지도 않는다. 의적(義賊)도 여전히 도둑임에는 차이가 없고, 정치 테러범도 테러범이요, 포교를 위한 선의의 폭압자(무력에 의존하는 종교적 광신자)도 폭압자 임에 틀림없다.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의 선택에 대한 책임 역시 그렇게 의도된 목적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 수단의 사용으로 인해 빚어졌다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목적과 관련해 제기될 수밖에 없다. 흔히 어떤 결과는 단지 그런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른 부산물 또는 부작용이라는 이유로 은연중 책임을 부인하는 경우를 보게 되나, 이는 온당하지 않다. 이것은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적인가 하는 문제를 불러온다. 범죄행위로 인한 살인만이 아니라 범죄의도의 유무와 무관한 살인도 살인인 것과 같이 말이다. 요컨대 선한 동기(의도, 목적)가 나쁜 결과를 무력화시키지 않는다.”(Kaplan, 1982: 209)

        

        우리 나라에서 정부가 경제사회 운영을 주도하는 것의 정당성은 한마디로 말해 공익의 확보와 실현에 있다. 우리 정부가 경제사회 운영의 주도적 책임을 자임해 온 것은 정부 스스로가 모든 국민의 요구에 답하여 공익을 정의하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국민이 이런 의도에서 정부에 책임을 부여하고 있으며, 국민으로부터 그런 기대와 신뢰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가 공익의 이름으로 우리 경제사회를 주도해 오는 과정에서 생산하거나 파생시켜 온 수없이 많은 과오와 문제를 알고 있다. 이런 과오는 단순한 혹은 불가피한 정책과오요 실수인가? 아니면 윤리적 차원에서 당연히 비난받을만한 그런 일들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 그리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수권(mandate)의 범위와 한계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하면 국민이 정부의 전지전능과 무오성(infallibility), 그리고 권력담당자로서의 정부의 선의(benevolence)를 믿고 정부에 전폭적인 수권을 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그 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대부분의 선진국(적어도 근대 이후의 선진국)은 후자에 속한다. 이들은 공익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되는 권력의 횡포와 월권을 견제하기 위한 민주제도와 절차를 발전시켜 왔다. 우리 나라는 어떤 경우에 속하는가? 우리 국민이라고 이런 문제의식이 없었을 리 없건만 우리에게는 실패한 무수한 민중의 항거의 역사는 있을지언정, 민주제도와 절차를 충실하게 제도화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아니 그럴 기회를 제대로 가져보지도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사회는 분명 정부주도의 사회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경제사회를 정부주도로 운영하는 일에 합의한 일이 없다. 정부 스스로 그런 책임을 자임해 왔고, 국민이 이를 피동적으로 수용해 왔을 뿐이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정부는 무슨 논거 위에서 이런 책임을 자임해 왔는가? 장기적인 저발전 상태로부터의 탈출이나 경제성장의 촉진 등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정부가 정부주도로 경제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논거의 핵심은 역시 국민이 원하는 것과 국민이 진정으로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알았더라면 원했을 것은 다르고, 국민이 진정으로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알았더라면 원했을 바로 그것을 정부가 국민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선험적 가치판단이다.

        

        과연 정부의 이런 선험적 가치판단은 옳은가? 또한 이것은 정부의 경제사회의 주도와 지배를 언제나 정당화해 주는가? 이 문제는 소크라테스 이래로 많은 도덕철학자들이 탐구해 온 주제로서 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만 할 사항은 이 문제가 윤리적 차원의 문제라는 점이다. 정부(지배자)가 국민보다 국민이 진정으로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알았더라면 원했을 것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추정하고 행동할 때--이 추정(presumption)이 정부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인데--정부와 국민간에는 불가피하게 긴장이 야기된다. 이처럼 "지식이 덕(Virtue is knowledge.)"인 한, 이 긴장은 또한 도덕적․윤리적 성질을 띤다(Kaplan, 1982: 216-7).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을 자식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해 지금 자식이 가기를 원하는 길 대신에 다른 길로 가도록 참견하는--실제로는 강요에 가깝지만--경우에 발생하는 부모와 자식간의 긴장과도 같다. 이러한 긴장이 야기되는 상황에서 부모는 결국 자식의 인격을 존중해 물러서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식이 원하는 것이 자기가 고집하는 것보다 나음을 자인해서가 아니라--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에--아무리 어릴지라도 자식도 인간이고 따라서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며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한 궁극적 책임자라는 윤리적 언명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만일 정부가 국민보다 국민이 진정으로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알았더라면 원했을 것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추정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정부주도의 경제사회 운영의 정당화 기초는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주도의 경제사회 운영을 고집한다면 그 정부는 윤리적일 수 없다.



   나. 정부주도(지배) 경제사회 운영의 비윤리성


        우리 국민의 92.5%가 “법보다 권력과 돈의 위력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91.9%가 “똑같이 나쁜 일을 해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더 심한 처벌을 받는다”고 말한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법을 위반해도 처벌받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무려 95.1%에 달한다. 유용한 분쟁해결수단으로 “권력과 돈 그리고 연줄”을 든 국민이 76.3%인 반면, “법, 상식, 윤리와 타협”을 꼽은 국민은 23.7%에 불과하다. 최근 「형사정책연구원」이 우리 국민 1,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준법의식실태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다(조선일보, 2001. 6. 14).

        

        이 충격적인 설문조사 결과가 보여 주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 빠져 있는 극도의 무력감이다. 우리 사회의 윤리의 도착(倒錯) 현상이다. 무엇이 이런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것은 정부주도 사회에서 정부가 '공익의 독점자'로 행세하면서 만들어 내는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법과 제도다. 이 법과 제도--그 대부분이 규제인데--가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일 때, 더구나 그것이 자의적으로 집행되고 불투명하게 운용될 때, ‘합리적인’ 국민은 그것에 저항하기보다는 그것에 타협하거나 그로 인한 피해와 부담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적응하려고 한다. 많은 경험을 통해 법과 제도에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은 사회를 잘 모르는 어리숙한 행동이요, 어떻게든 권력과 연줄을 동원해 문제를 적당히 해결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임을 배우고 터득하게 되는 탓이다.

        

        왜 우리 국민은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법과 제도로 인해, 그것도 자의적이고 불투명하게 집행됨에 따라 자신의 재산권이 제약되고 경제사회적 자유가 억압되는 줄 알면서도 이에 저항하거나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그것에 타협하거나 회피하고 마는가? 우리 국민이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라서 그런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법과 제도를 바로잡고 법제도의 집행을 엄정히 하도록 만드는 것이 공공재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한, 여기에 무임승차(free ride) 현상이 야기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것은 개인의 합리적인 판단의 불가피한 결과다. 이렇게 볼 때 문제는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에 대한 국민의 자발적인 순응(voluntary compliance)을 고려치 않는 정부에 있다.

        

        무릇 모든 법과 제도는 국민의 자발적인 순응을 쉽게 유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법과 제도가 내포하고 있는 유인구조(incentive structure)에 따라 국민이 행동할 때 그것이 사회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개인에게도 이득이 될 수 있도록 법과 제도가 설계되어야 한다. 이런 법과 제도는 정부가 국민의 자율성과 합리적 행동을 신뢰할 때 가능하다. 과연 우리 정부는 우리 국민의 자율성과 합리적 행동을 신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우리 정부가 우리 국민에 대해 이런 신뢰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 이토록 오래 정부주도로 경제사회를 운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 정부는 국민의 자율성과 자율능력에 극도의 불신을 갖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시장경제의 작동에 대해서도 불신하고 있다. 이것은 곧 정부가 시장원리에 따른 국민 개개인의 합리적 행동과 여기서 파생되는 자생적인 사회질서에 의한 문제해결보다는 정부의 명령과 지시가 아니고서는 경제사회의 어떤 문제도 원만하게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사고 위에서 법과 제도를 만들다 보니 그 법과 제도가 국민의 눈에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이어서 국민은 그런 법과 제도에 자발적으로 순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 더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가 국민의 자율성과 자율능력의 억압이며, 국민의 정부의존성의 심화다. 법과 제도에 대한 자발적인 순응이 확보되지 않고, 국민이 정부에 의존하면 할수록 정부의 책임은 따라서 증가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정부권력의 자기정당화(self-justification)의 기초가 있다. 

        

        정부권력의 자기정당화, 이것만큼 정부주도 경제사회 운영의 비윤리성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없다. 우리 국민이 자율의지와 능력이 부족하고, 따라서 그 결과로 정부간섭과 개입을 자초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민간활동과 시장경제의 작동에 대한 정부의 무제한적인 간섭과 개입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국민은 정부의 무제한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의 행사를 정당화하거나 불가피한 일로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부권력의 무제한적이고 자의적인 행사는 정부권력의 자기정당화의 결과일 뿐이다. 비록 어리고 미덥지 않더라도 자식의 인격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부모가 성숙한 부모이듯이, 아직 부족할지라도 국민의 자율성과 자율능력을 믿고 이를 북돋울 줄 아는 정부가 윤리적인 정부일 것이다.

        

        정부권력의 자기정당화, 그것은 도덕과 윤리의 차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권력의 근본적인 도덕적 문제(moral predicament)가 국가권력에 도덕적 책임을 묻는 위치에 있는 자(terminus of moral responsibility)--즉 국민--와 권력의 소재지(locus of power)가 일치하지 않는 것일진대(Kaplan, 1982: 217), 정부권력이 국민의 의사에 반하여 권력의 자기정당화를 계속한다면, 그 정부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정부일 수 없다. 물론 국민은 선거라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 다소간 정부권력을 견제하거나 국민의 뜻에 맞지 않게 국가권력을 행사한 정부를 응징할 수 있고, 때로는 혁명적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권력을 쥐고 행사하는 정부권력 앞에서 국민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면, 이런 현실을 이어가는 정부는 도덕적․윤리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정부는 이제 국민과 시장을 불신하면서 민간활동과 시정경제의 작동에 대한 간섭과 개입을 계속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정부를 불신하는 배경과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 오랫동안 정부주도로 경제사회를 운영해 온 우리 나라에서 정부권력의 도덕성․윤리성에 대한 논란이 많고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이 극한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 대한 도덕적․윤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선진국에서 정부불신은 주로 정부의 경제사회 문제해결 능력에 대한 불신이다(Nye et al., 1997). 이와는 크게 대조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정부불신은 정부의 능력 그 자체에 대한 불신이기보다는 정부가 경제사회의 기본질서를 바르게, 건전하고 튼튼하게 구축하고 유지하지 못하는 데 따른 정부의 도덕성․윤리성에 대한 불신이고, 이것이 먼저인 이유를 깊이 새겨야 한다.  



5.  결  론


        복잡해질대로 복잡해진 오늘날의 경제사회를 정부주도로 이끌어가려는 사고는 이제 합리성의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윤리성의 차원에서도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한 때는 그것이 유효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정부도 이제 겸허하게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다.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경제사회가 어떤 경제사회인지를 성찰하고, 경제사회 발전의 원리를 깊이 이해해 정부역할과 기능을 대폭 수정해야 할 시점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부는 국민의 재산권과 경제사회적 자유를 철저히 보장하고, 「법의 지배」와 자기책임의 원칙을 확립하는 정부다. 이런 정부 본연의 보호적 기능(protective function)을 우선하고 이것에 충실한 정부, ‘강한 정부’의 유혹을 물리치고 정부권력을 절제력 있게 사용할 줄 아는 그런 정부다. 이런 일은 당연히 정부가 책임져야 할 일일 뿐더러 정부만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인 까닭이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히 민간주도 경제사회로의 전환이나 「작은 정부」의 구현 그 자체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거나 추측하는 것과 달리, 오늘날 정부의 일이나 공공부문은 결코 작아지고 있지도 않다. 민주의 시대, 개방의 시대에 「작은 정부」는 어쩌면 처음부터 달성 불가능한 명제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국민주권(popular sovereignty) 사상에 입각한 오늘날의 민주주의--군주와 귀족 또는 군주와 신민 간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계약(social contract)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와는 대비되는--사회에서는 어떤 집단적 의사결정(collective decisions)이든 그것이 국민의 단순 과반수(bare majority)의 지지만 확보하면 적법한 것으로 통용되게끔 되어 있는 바, 이것은 정부의 일을 무제한적으로 팽창시키는 자기모순적인 유인구조를 내장하고 있다(de Jasay, 1997: 58). 민주절차의 합법성을 내세워 자행되는 특수이익집단의 정치적 담합과 ‘서로 밀어주기(log-rolling)’가 단적인 예이다. 여기에 더하여 개개 국민(납세자)의 입장에서 볼 때 특정 공공재의 제공에 드는 비용은 거의 무시할 정도로 작고 그 편익은 크게 보이는 데서 비롯되는 재정적 환상(fiscal illusion)은 재화와 서비스의 공적인 공급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집단적 의사결정을 조장하고 있다. 둘째로 개방의 시대를 맞이하여 국제경쟁력을 상실한 산업부문과 소득계층을 복지 차원에서 지원하고 보호해야 하는 책무가 정부에 지워지면서 이것이 공공부문의 팽창을 주도하고 있다(Cameron, 1978). 세계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이런 측면의 정부역할을 더욱 강조될 전망이다(The Economist, 1997. 9. 20).      

        

        이것은 대세다. 한편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개방의 파고에 대처해야 하는 한 어느 정부도 이 추세를 반전시키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깊이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선진국 정부의 대응이다. 이들은 이런 대중의 여론에 입각한 민주정치의 위험, 그 결과로서의 복지국가(welfare state)라는 사회주의적 모험에서 과감하게 후퇴하고 있다. 복지사회를 지향한 재분배정책 프로그램이 소득의 불공평성을 완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확대시키고, 경제생활을 정치화하고 정서화(emotionalize) 함으로써 계층간 위화감을 증폭시켰으며, 사회에 각종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만연시키고, 재정적자가 급증하게 만들었으며, 경제사회의 비효율을 조장하였다는 반성 때문이다(Kasper and Streit, 1998: 317-23). 따라서 이들은 과도한 정부간섭과 개입으로 위축되어 온 가정 등 사회의 자생적 조직을 강화하고, 민영화와 규제완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것이 이들이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노선을 추구하는 이유다.

        

      우리 정부는 어떠한가? 다른 어떤 선진국 정부와도 비길 수 없는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지니고 경제사회 전반을 지배해 온 우리 정부, 이제 비로소 복지사회의 문턱에 진입하고 있는 우리 정부는 이런 면에서 무지의 소치로만 돌릴 수 없는 도덕적․윤리적 과오와 혼란에 빠져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신음하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경제사회의 불균형성장, 지역의 불균형발전, 경제력집중과 소득격차, 정경유착, 부정부패 등등--가 정부주도의 경제사회 발전과정에서 야기된 문제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문제는 이런 문제를 정부주도 발전과정에서 야기된 불가피한 부산물쯤으로 여기는 데 있다. 이것은 착각이고 오해다. 이런 문제들은 정부주도의 필연적 산물이다. 명분이 무엇이든, 정부간섭과 개입이 만들어내는 것은 특혜와 보호와 차별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러하지 않고서야 끝없이 계속되는 개혁에도 불구하고 어찌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날이 갈수록 꼬여만 가겠는가?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정부주도의 경제사회 운영과 영원히 결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책임있고 윤리적인 정부라면 이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개입하기를 즐기는 자신의 손을 스스로 묶는 결단과 의지와 노력을 보여야 한다. 정부권력의 자기정당화와 그에 따른 정부간섭과 개입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거듭되는 정책실패에도 불구하고 일이 잘못되어 갈 때마다,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또 다른 정부간섭과 개입을 정당화하는 정부, “이 정부는 다르다”는 이유로 과거 정부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무시하고 집권하기가 무섭게 정부수립이라도 하듯 덤비는 정부, 완벽한 문제해결책을 강구할 자신도 없고 그 결과에 책임지려는 생각도 없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정부가 결코 윤리적이고 책임있는 정부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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