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기억상실증, 방랑하는 기억들

팔락 2015. 3. 6. 15:43

기억상실증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뇌수술 전, 또는 뇌손상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고(역행성 기억상실증), 다른 하나는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다(순행성 기억상실증). 순행성 기억상실증에는 해마의 손상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흥미롭게도 역행성 기억장애의 정도는 시간대에 따라 다르다. 수술 직전의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훨씬 이전의 기억보다 더 심각하게 소실된다. 이처럼 옛날 기억보다 최근 기억에서 기억장애가 더 심각하게 나타나는 형상을 '리보 법칙Ribot`s law'이라고 하는데, 프랑스의 심리학자 리보는 "새로운 것이 오랜 것보다 먼저 죽는다"라고 말했다.

 

스콰이어는 리보 법칙에 대해 독창적인 연구를 했는데, 우울증 치료를 위해 전기충격요법ECT, electro convulsive therapy을 받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이런 환자들은 부작용으로 기억장애가 나타나는 경우가 잦다. 1974년에 스콰이어는 ECT 치료를 받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에 대한 기억을 물어보았다. 먼저 ECT 치료를 하기 전에 물어보았을 때는 환자들이 70년대 초나 60년대 후반의 프로그램들에 대해 꽤 좋은 기억을 보였다. 몰론 오래된 프로그램일수록 기억 상태가 다소 떨어졌다. 이것은 정상적이다. 그런데 ECT 후에 다시 물어보았더니 70년대 초반에 방영된 프로그램들에 대한 기억이 오히려 60년대의 프로그램들에 대한 기억보다 훨씬 나빴다. 60년대의 프로그램들에 대한 기억은 ECT 이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오늘날 이러한 결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해마의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해마는 초기에 기억을 저장하는 데 필요하며, 이러한 역할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줄어든다. 뇌는 왜 이와같은 방식으로 작동할까? 기억이 이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일 맥클랜드, 오릴리, 맥노턴이 여기에 대답을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연결주의 모델링connectionist modeling'이라 불리는 콤퓨터시뮬레이션 작업의 결과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 시뮬레이션은 학습을 연구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연결주의에 입각한 모델이 자극들 간의 관계를 학습하고자 할 때, 새로운 정보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것보다 하나씩 차례차례 기억저장소로 입력되는 편이 유리하다고 본다. 이것을 삽입식 학습interleaved learning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학습에서는 새로운 정보가 기존 기억들을 교란시키기 않는다. 가령 새(날 수 있다)와 물고기(헤엄칠 수 있다) 같은 동물들의 특징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이 모델을 훈련시킨 다음에 펭귄은 새인데 '날지 못하고' 헤엄칠 수 있다'는 사실과 맞닥뜨리게 할 때, 급속한 학습방식을 사용했을 때와 삽입식 학습방식을 택했을 때 그 결과가 확연히 달라진다.

 

급속한 학습의 경우 새로운 정보가 지식의 토대를 교한함으로써, 이를테면 어류와 조류를 둘 다 헤엄치는 동물로 처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삽입식 학습에서는 여러 차례의 반복을 거치면서 표상이 서서히 구성되므로 점차적으로 펭귄에 대한 표상을 개선할 수 있고, 마침내 펭귄을 헤엄칠 수 있고 날지 못하는 새의 한 종류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새로운 정보가 기존의 지식의 토대를 교란하지 않으면서 그 위에 더해지는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외현기억이 처음 자극을 처리하는 데 관여했던 피질 시스템에 저장되며, 해마는 이 과정을 주도하는 데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예를 들어, 시각적 장면에 대한 기억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시각피질로부터 부해마피질 영역을 거쳐 해마회로로 지각이 전달되어야 한다. 처리된 신호, 즉 기억은 다시 부해마 영역을 거쳐 시각피질로 되먹임된다.

 

삽입식 학습 가설에 따르면, 기억은 해마에서 일어나는 시냅스 변화를 통해 처음 저장된다. 자극 상황의 몇 가지 측면이 반복되면, 해마는 처음 경험할 때 일어났던 피질 활성화 패턴을 복원시키는 데 참여한다. 복원될 때마다 피질 시냅스가 조금씩 변한다. 이 변화 과정은 해마에 의존한다. 따라서 해마손상은 최근의 기억들에 영향을 주지만 피질에 이미 굳건히 자리 잡은 오래된 기억들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래된 기억은 누차에 걸친 기억의 복원에 따른 피질 시냅스 변화의 누적된 결과다.

 

피질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는 것은 새로운 정보 습득이 피질에 저장된 오래된 기억을 교란하지 않기 위해서다. 최종적으로 피질의 표상은 자립하며, 이때 기억은 해마로부터 독립된다.

 

-- 시냅스와 자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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