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의학과 용요리

팔락 2015. 3. 3. 13:56

한의학과 용요리

중세 유럽의 이야기다. 사악한 용(龍)을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용잡이 학원’이 있었다. 학생들은 비싼 수업료를 내고 기초부터 고급 과정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연마했다.

 

졸업반 학생 하나가 스승에게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용은 어디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용은 없다.” 화들짝 놀란 학생이 “그러면 지금껏 배운 공부가 무용지물이란 말씀입니까?”라고 따지자 스승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도 나처럼 학원을 차려 학생들을 가르치면 될 것 아니냐.”

 

김인규 한림대 교수(경제학)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청춘이여, 인문학 힐링 전도사에게 속지 마라’라는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다.

 

朱泙漫學屠龍於支離益 單千金之家三年技成 而無所用其巧(주평만학도룡어지리익 단천금지가삼년기성 이무소용기교) ;

주평만이 용 잡는 법을 지리익에게서 배우는데, 천금 나가는 집을 팔아 없애고 3년 만에 그 재주를 익혔으나, 그 솜씨를 쓸 곳이 없었다.

<장자莊子 잡편 열어구雜篇 列禦寇>

 

한의학은 음양오행, 기, 경락에 기초를 둔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과학 교과서 그 어디에도 단 한 줄의 설명, 측정법, 조작적 정의가 나오지 않는다. 즉 상상 속의 형이상학에 속하는 허구이다.

 

형이상학에 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학문에 관해 수많은 멋진 것들이 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학문이 손가락 길이만큼이라도 진보했다는 것을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정의를 더 명확하게 하려는 시도나, 절름발이 증명에다가 새로운 목발을 제공하려는 시도는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형이상학의 낡은 이불을 기우려 하거나 색다른 무늬를 입히려는 시도는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주장들에 신물이 난다. 우리는 변증법적 환상을 --중략--진리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명백한 기준을 원한다.

 

형이상학 일반과 그 가치에 대한 나의 견해에 관하여 말하연, 나의 서술이 군데군데에서 제대로 조심스럽게 표현되지 못하였으며 적절하게 제한을 붙여 표현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내가 시인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바와 같은 지혜로 가득찬 이런 책들의 으스대는 허세에 대해 내가 반감과 증오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숨기고 싶지 않다.

 

그것이 그릇된 길을 선택했다는 것과 통용되는 방법이 끊임없이 어리석음과 실수를 증가시킬 뿐이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공상적인 업적들이 완전히 소멸한다 해도 그 빌어먹게 번성한 이 허구적인 학문만큼이나 해로울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 칸트의 형이상학 서설 중에서

 

한의학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념을 기초로 한 형이상학의 하나이며, 실생활에 해만 끼치는 한국의 오래된 ‘지적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행하는 최악의 사기이다. 한의학과 용요리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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