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선하게 보이는 것보다 실제로 선한 것이 더 바람직하며 우리 스스로를 위한 길임을 갖가지 논변을 들어 구구절절 주장한다.
<국가론>의 초반부를 보면, 플라톤의 형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를 이렇게 몰아붙이는 대목이 있다. (단순히 평판만 정의로운 게 아니라) 정말로 정의로운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증명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글라우콘은 기게스의 요술 반지를 갖게 된 사람 이야기를 꺼낸다. 그 금반지만 끼면 마음대로 몸을 감출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이제 그는 무엇이든 시장에서 원하는 걸 집어 와도 벌 받지 않고, 남의 집에 들어가 원하는 사람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감옥에 집어넣거나 풀어줄 수 있고, 또 그 외 온갖 일을 하며 인간들 사이에서 신처럼 살 수 있게 될거요. 이런 상황에서 그 누가 끝까지 정의로운 길을 갈 것이며, 또 그 누가 끝까지 남의 재산에 손대지 않겠소. 그렇게까지 티 하나 안 묻히고 깨끗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오. 그러면 그자의 행동은 올바르지 못한 사람과 무엇이 다르오. 어차피 둘은 똑같은 길을 걷는 것이나 다름없소.
글라우콘의 이 사고실험에 함축된 뜻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선하게 살아가는 것이 다 자신이 잘못한 일이 남들에게 들통 날까 봐( 특히 평판에 손상을 입게 될까 봐) 두려워서이다. 이어서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어떻게 정의롭지만 평판은 나쁜 사람이 정의롭지 못하지만 널리 훌륭하다고 알려진 사람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지 증명해달라고 한다. 그래야만 자기는 직성이 풀릴 것 같다면서 말이다.
꽤나 골치아픈 도전을 맞은 소크라테스는 비유를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한다. 즉, 사람 안에서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도시(폴리스) 안에서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발 나아간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정의로운 도시에서는 조화와 협동이 이루어지고, 모든 계급 사이에 노동 분화가 이루어진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공공의 이익에 이바지하기 때문에, 도시민 어느 하나가 불행을 맞으면 도시민 전체가 그것을 안타까워한다.
반면에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어느 한쪽이 무엇을 얻으면 다른 한쪽은 잃고, 당파끼리 서로 무너뜨릴 책략을 짜며,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고, 도시는 사분오열된 채 서로 싸운다. 이런 무자비한 이기주의의 나락에 폴리스가 빠져들지 않으려면 반드시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듯 조화롭고 정의롭고 행복한 도시의 모습을 그려내어 그에 대한 좌중의 동의를 구한 후, 정의롭고 조화롭고 행복한 사람 안에서도 이와 똑같은 관계가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행복한 도시는 반드시 철학자가 통치해야 하듯이, 행복한 사람도 반드시 이성이 통치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 안에서 통치를 맡게 된 이성은, 단순히 겉으로만 선하게 사는 것보다는 진정 선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쓸 것이다. (이상은 플라톤이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빌려와 자신의 주장을 하는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일관된 믿음 체계가 세워져 있었고, 그러한 믿음에서도 가장 핵심은 이성의 완벽성을 믿은 것이다. 플라톤은 이성이 우리 인간의 본래적 본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성은 종종 열정에 물들어 타락하기도 하지만, 배우기만 하면 열정은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다. 그리하여 열정을 다스리게 되면, 신이 주신 합리성이 환하게 빛을 발하여 인기를 가져다주는 일보다는 올바른 일을 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준다.
심리학적 연구와 과학적 근거는 플라톤의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이성은 진실보다는 정당화의 근거를 찾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며, 글라우콘의 견해처럼 사람이란 실제보다는외관과 평판에 훨씬 신경을 쓰는 법이다. 글라우콘의 탁견이 뛰어난 이유는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윤리적 사회를 건설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칙이 다름 아닌 모든 사람이 항상 자신의 평판을 목숨 걸고 관리하도록 만드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평판에 신경을 쓰게 되면 결국 나쁜 행동은 항상 나쁜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그렇다면 도덕적 추론이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되고 다듬어지고 정교해진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진실을 찾아주려고, 즉 우리에게 올바르게 행동할 길을 알려주고 나아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렇다고 믿는다면 이는 플라톤, 소크라테스, 콜버그 같은 합리주의자인 셈이다. 아니면 도덕적 추론이 발달한 것은 우리가 사회생활의 전략적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보는가? 이를테면 우리의 평판을 관리하거나, 논쟁에서 상대방을 설득하여 그를 내 편 혹은 우리 팀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말이다. 이쪽이 옳다고 믿는다면 글라우콘주의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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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관계를 뛰어넘어 하나로 협력하는 능력에서만큼은 인간이 지구상에서 챔피언인 생물이다. 이러한 협동에 한몫 단단히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낸 갖가지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책임 체계이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그 책임을 남에게 부과하는 데 선수이며, 또 남들이 우리에게 그러한 책임을 부과할 때는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간다.
책임감 연구의 선구적 학자인 필 테틀록(Phil tetlock)에 따르면, 책임감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한 우리의 믿음,느낌,행동을 남들에게 정당화해야 한다는 뜻이며, 그런 정당화를 사람들이 당연히 기대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책임감에는 우리가 스스로를 얼마나 잘 정당화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상과 벌이 달라지리라는 기대도 들어있다.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 때 누구도 그 일을 해명하지 못하고, 또 사람들이 태만하게 일하거나 사기를 쳐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 결국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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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틀록은 유용한 비유를 든다. 우리는 직관적인 정치인처럼 행동하는데, 각양각색의 유권자를 앞에 두고 호소력 있는 도덕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지땀을 흘린다는 것이다. 사회적 세계는 글라우콘식의 세계로 이곳에서는 실제보다는 외관이 훨씬 큰 중요성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들은 정말 올바른 사람이 되기보다는 올바른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더 애쓰는 것이다. 이 같은 모습을 테틀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지금 나의 행동 방식이 남에게 충분히 정당화되고 양해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바로 사고의 주된 기능이다. 내가 한 선택들이 얼마나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따져보는 이 과정은 의사결정을 할 때 너무도 흔하게 일어난다. 사람들은 남에게 자신의 선택을 설명해야 할 때도 뭔가 받아들여질 만한 이유를 찾지만,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햇음을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도 이러저러한 이유를 찾는다.
테틀록의 결론에 따르면, 의식적 추론은 대체로 진리나 사실의 발견보다는 타인을 설득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테틀록은 여기에 덧붙여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경향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이야기를 남에게 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부터 그것을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도덕적 사고가 이루어지는 모습은 진리를 발견하려는 과학자보다는 유권자의 표를 잡으려는 정치인에 훨씬 더 가깝다.
-- 바른 마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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