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에 대한 권복규 교수 글
존경하는 이윤성 선생님께서 한의학은 "과학이 아니라 문화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라는 언급을 남겨 주셨다. 진정 동의한다. 아니, 의학 역시 문화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지난 번 글에서 한의학이 살아남은 것은 의학적 유효성보다는 정치적 고려에서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왜 다시 한의학이 문제인가?
한의학을 논하기 전에 의학의 본질을 한번 생각해보자. 의사들은 의학이 "과학"이고 한의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환자들의 입장에서는 과학이건 아니건 별 상관이 없다. 굿을 하든, 기도를 하든, 주술을 걸든 내 불편함이 해결되면 되는 것이다...
. 오늘날 수많은 교회와 사찰이 "신병 치료"와 "입시기도"를 걸고 성황리에 영업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의학이 다루는, 또는 다루기를 기대하는 영역은 거의 무한이다. 예컨대 동의보감에는 이런 처방도 나와 있다. "아프지 않게 매 맞는 법", "파리를 쫒는 법", "여아인 태아를 남아로 바꾸는 법"....이런 글을 읽으면 무한히 즐겁다. 대체 어떤 서양의 의사가 아프지 않게 곤장 맞는 법을 연구했겠는가? 1952년 한방이 의료의 영역으로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실제 갈등은 크지 않았던 것이 환자들이 알아서 이 두 영역을 구분했기 때문이다. 소위 "보약", "정력제"는 의사보다는 한방의 몫이었고, 이들도 그렇게 시술을 했다. 응급 상황에서 한의사에게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최근 한의사협회에서 단식투쟁을 했던 한의사마저도 탈진해 쓰러지니 우리 목동병원으로 왔다. 향약구급방의 처방을 따르지 않고.
오늘날 의학과 한방의 갈등이 심해진 것은 양측의 경제적 어려움과 무관하지 않다. 보험 수가로는 원가를 맞출 수 없으니 자꾸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의사들과, 더 이상 보약과 정력제의 수요가 없는(비아그라가 한방 시장의 30%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의사들이 기본 의료도 아닌 의료 상품의 모호한 영역에서 계속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부 의사들은 침과 아로마테라피 등에 관심을 가지고, 한의사들은 CT나 MRI등의 진단기계에 관심을 가진다.
실제 일차의료에서 팬시한 근대 과학적 수단이 필요한 환자는 그리 많지 않다. 잘 훈련된 일차의료전문가의 필요성은 치료가 아니라 오히려 감별진단에 있다. 예컨대 일차 진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단순감기나 배탈이면, 다른 중한 질환과 잘 감별할 수 있다면 아스피린을 먹든, 치킨수프를 마시든, 쌍화탕을 마시든 환자가 좋다면 그만이다. 어차피 self limited로 잘 쉬면 나을 병이니까. 그 때문에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일차 진료의의 대부분이 필요하면 동종요법이나 아로마 테라피와 같은 "보완대체요법"을 사용한다. 감별진단 후엔 "증상의 완화", 환자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모습을 두고 선진국에서도 동양의 전통의학을 신뢰하느니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선진국에서도 중증 질환에 대해 그런 짓을 하지는 않는다. 물론, 암 수술 후나 투병 과정에서 자잘한 complain-변비 등등-에 대해 그런 처방을 쓸 수 있다. 마그네슘염을 쓰느니 차전자를 쓰는 게 좀 더 온건한 처방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방은 다양한 경험요법의 집적물로 그 중에서는 유용하고 쓸모 있는 것도, 전혀 터무니없는 것도 있다. 항생제가 없었던 시절에는 상처에 "쥐를 산채로 썰어 기름을 넣고 검게 태워 닭의 깃에 묻혀 바를"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동의보감 처방이다). 그러나 과음과식을 피하라는 둥 현명한 지시도 많이 있다. 또한 한방에서 언급한 약재 중에는 오늘날에도 잘 살펴보면 유용할 만한 것이 많이 있다. 그 약리효과를 규명하고 성분을 잘 판별한다면 신약 개발에 유용하게 쓰인다. 한의사들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한방의 과학화"를 주장한다. 과학화란 근대 과학의 시각에서 한방의 치료법을 바라보고 유용한 약재를 탐구하며, 예컨대 침술의 생리활성 기전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내 생각도 기본적으로는 이렇다. 그런데 이 관점에서는 이 일을 "왜 꼭 한의사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일은 근대 의학을 배운 의사나 약사들이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 미국의 보완대체의학 연구는 대체로 이런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제대로 훈련받은 의사, 생리학자, 약리학자들이 연구를 한다.
한의사의 두 번째 그룹은 한의학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며, 그래서 고대의 문헌을 깊이 연구하다보면, 혹은 철학적 사유를 하다보면 뭔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예컨대 황제내경의 오리지널 판본이 무엇인지, 그 진의가 무엇인지 궁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다. 그러다보면 의사라기보다는 문헌학자나 역사학자에 가까워진다. 물론 그러한 학문적 노력도 인문학적으로는 필요하다. 하지만 의사학자인 내가 히포크라테스를 깊이 연구한다 해서, 그로부터 일종의 교훈은 얻을 수 있겠지만 2천5백 년 전의 처방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의학은 어떤 면에서는 "철학"이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환자들은 의학이 과학인지 아닌지에 별 관심이 없다. 이들은 온갖 다양한 증상을 가지고 와서 의사를 괴롭힌다. 그래서 동의보감에는 복을 부르고 귀신을 쫒는 법도 나와 있다. 상사병에 대한 치료는 물론이다. 정상-비정상을 따지는 현대의학은 이런 환자 대부분을 "정신과"로 의뢰한다. 어떤 것은 근본적으로 과학으로 따질 수 없다. 정력을 증진하는 법? 주관적 느낌 말고 뭐가 있을까? 오래 사는 법? 그 사람이 과연 그 요법으로 오래 살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공부 잘하는 법은 또 어떨까?
드물지만 한의사의 세 번째 그룹은 계룡산 도사를 추구한다. 이들은 산 속에서 수련하면 뭔가 비법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호흡, 단식, 양생, 기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민족의 비방(무슨무슨 침법이나 뜸법)이 이들의 수단이다. 이는 종교, 혹은 초월에 가깝다. 물론 산이나 사막에서 어떤 수련을 하면 인간의 삶에 대해 모종의 진실을 깨닫고 일종의 초능력 비슷한 최면술(?)도 깨달을 수 있을 가능성은 있다. 지금 오락가락하는 문선명씨 같은 경우도 산에서 40일 금식기도 하고 자신이 재림 예수라는 확신을 얻었다니까.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치료사, 시술가, 도사들이 넘쳐나고 목사나 승려 중에서도 치유를 한다는 이들이 여럿 있다. 사실 많은 증상들이 마음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이 마음을 잡아주면 증상이 좋아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절대 표준화나 교육이 불가능하고, 또 참된 치유사와 돌팔이 사기꾼을 구별하기 매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불행히도 대부분은 후자다.
그러므로 답은 전통의학을 재평가하여 유용한 일부는 훈련받은 의사들이 일차 진료 등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관심이 많은 일부 의사는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현대화하는 데 헌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수준과 능력이 떨어지는 한의계에만 맡겨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들도 내심으로는 의사가 되기를 원한다. 사실 지금도 이들의 교육과정을 보면 대체 한의사라고는 볼 수 없는 일종의 hybrid medicine practitioner의 양성과정이다. 현 시점에서 일정한 교육 후에 의사면허로 바꿔준다면(의료일원화) 이들 대부분은(일부 민족주의자, 파시스트, 신비주의자들 말고) 쌍수 들고 환영할 것이다. 한때 이들이 잘 나갈 때는 의사들이 제안한 의료일원화를 거부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길밖에 살 길이 없음을 이들도 잘 알고 있다. 아니면 이들은 계속 수준이 떨어지면서 의료의 주변부에서 이류 시술가로 살아가게 될 운명이다. 미국의 동종요법사, 수치료사, 족치료사들이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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