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판단하는 정치관
기본적인 사회적인 정치 구조는 그 출발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출발점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두 가집니다.
우리말에서 개인주의는 사전적으로 egoism과 individualism을 모두 포함하는 데, 요즘은 전자는 이기주의로 후자를 개인주의로 나누기도 하며, 개인주의 대신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쓰기도 합니다. 정치 용어의 개인주의는 당연히 individualism입니다. 다만 이기주의가 연상되기 쉬워 일반적으로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합니다. 저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혼용하는 편입니다.
개인주의 정치사상은, 사회의 기본 구성 요건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을 정치의 목적으로 보며 국가나 사회보다 개인의 인격을 우선하는 사상입니다.
개인주의 사상은 개개인을 독립된 인격체로 간주하기 때문에 평등 개념을 포함합니다. 또한 개인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민주주의를 도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도 그 자체로 독재로 갈 소지(다수에 의한 독재)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법치주의 또는 헌법주의를 주장합니다.
개인주의 사상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 데모크리토스, 소크라테스 등이 있습니다. 페리클레스와 데모크리토스 등은 민주주의의 정치적 시스템에 주목했다면 소크라테스는 개인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에서 개인이 취할 윤리에 그 초점을 맞추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 사상에서는 노자의 사상이 개인주의에 근접한데, 노자는 권력에 의한 개인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개인들이 모여 큰 사회를 이루어 보다 큰 자유를 누리는 사회 시스템의 개발은 상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상적 발전이 이뤄지지 않았고 정치 공학적으로 참고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근대에 들어 자유주의 사상은 하이에크와 노직에 의해 멀리 나아갔으나, 인간은 진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한 번도 사회적인 공동체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경험적 사실을 무시하고 공동체적 사상을 접목하는 데 인색함으로 인해 현대 정치사상의 전형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주의는 공동체 선(善)의 고양에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공동체의 선과 개인의 권리가 충돌할 때 공동체 선을 우선시 하는 특징을 가지며 전체주의(전체주의의 주체가 민족 또는 국가이냐 계급이냐에 따라 극우 파시스트와 극좌 공산주의로 나뉨)로 흐를 위험을 내포합니다. 그 뿌리가 되는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체 선 또는 덕(德)의 개념입니다.
동양 사상에는 묵자의 사상이 가장 완벽한 공동체주의 정치사상의 전형입니다. 공산주의 보다 더 심합니다. 다만 그 사상적 기초가 계급이 아닌 그리스도 사상과 비슷한 박애주의입니다. 공동 생산, 공동 소비, 공동 육아 심지어는 주거 환경까지도 평등하기를 주장합니다. 또한 가족이나 어버이를 타인과 같이 평등하게 사랑하라는 주장을 하여 맹자는 묵자가 인간의 도를 버리고 금수(禽獸)의 도를 따른다고 맹비난 했습니다.
공동체주의 정신은 그 뜻은 좋지만 정치공학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합니다. 먼저 공동체의 선이 무엇인지를 정할 수가 없고 설사 선을 정한다고 해도 그 선의 함양에 누가 공이 많은 덕이 있는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있는 사람과 덕이 없는 사람이 똑같이 나누어 가지는 것은 불평등'이라고 했으며, 플라톤은 철인 정치를 주장 했는데 이 또한 덕의 유무나 철인이 누구인지 판단할 주체가 있어야 하므로 불가능 합니다. 즉, 평등사상이 붕괴된다는 것입니다.
보수주의라는 정치 개념은 프랑스 혁명의 반작용으로 생겨난 개념입니다.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세력을 급진주의라 불렀고 이 급진주의를 위험하다고 본 반대파가 보수파입니다. 실제로 보수주의가 그 관점을 영향력 있게 발언하기 시작한 것은 영국의 의회주의자이며 정치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논설문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이후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버크 자신은 보수주의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고 오히려 자유주의 사상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보수주의의 반대말은 진보주의가 아니라 급진주의입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의 보수주의는 급진주의의 반대로서 보수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경제적 체제로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공통집합으로 생각됩니다.
사회주의란 말은 마르크스에 사상에 기원합니다.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자유를 신장시키려는 목적에서 출발했으나 계급 개념이라는 당시에는 맞았지만 지금은 퇴색되어 버린 도그마에서 벗어나질 못해 지금은 맞지가 않은 사상으로, 현재 공동체주의 사상과 융합되어 공동체주의의 대표적 사상으로 변한 느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사회주의자는 공동체주의 사회주의,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반자본주의 세력, 종북 세력이 짬뽕되어 있는 집단으로 보입니다.
진보주의는 루소(J.J. Rousseau)의 자연주의 교육사상의 영향을 입은 19세기 유럽의 신교육운동(The New Education Movement)과 19세기 말에 발달한 심리학과 아동에 관한 연구가 고조된 것에 관련하여 20세기의 초기에서부터 미국사회에서 전개된 교육사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에서 진보주의라는 말은 마르크스의의 저서 중 역사는 진보한다는 구절(hystory is progrressive ~)에서 차용된 개념으로 보입니다.
정치적으로 오용된 진보주의란 개념은 광복 직후부터 좌익 세력이 애용했습니다. 이때 ‘진보’는 사회주의화를,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치체제를 뜻했습니다.
6·25전쟁으로 사라졌던 ‘진보’는 진보당의 출현으로 한국정치 담론장에 다시 등장했고 이때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의미했습니다.
1980년대 말 혁명운동권 세력이 스스로를 ‘진보 세력’ ‘진보 진영’이라 부르고 친 운동권 매체가 이 같은 호칭을 사용하면서 확산됐는데, 이를 바로잡지 못하고 묵인한 학계와 보수 언론에도 언어 오용의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어의 ‘liberals’를 ‘진보 세력’으로 번역하는 일도 흔히 일어나는데 이런 관행도 사상적 혼란을 일으킵니다.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번역해야 타당한 것을 ‘진보 세력’이라고 번역함으로써 미국의 ‘liberals’를 사회주의 세력인 한국의 좌익과 같은 계열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시공동체에서 출발한 인간 사회가 부락 공동체와 고대 국가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많은 굴곡은 있었지만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꾸준히 신장되는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되어 왔다고 판단하며 따라서 자유주의를 진보로 공동체주의를 보수로 규정해야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한국 상황에서는 적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언어의 오용을 정화한 장래의 일로 미룰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익이란 말은 사회주의에 맞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함께 힘을 모아 합쳐진 결과 탄생한 개념으로 판단하고 있고, 좌익이란 말은 마르크스 사회주의와 급진주의 그리고 공동체주의가 섞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비좌익 지식인들이 ‘보수 대 진보’라는 용어를 피하기 위해 ‘우파와 좌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이는 한자문화권에서 사상적 경향이 동일한 세력을 ‘익(翼·wing)’, 동일한 사상진영에서도 정책 차이로 별도의 정치조직을 만들 경우 ‘당(黨·party)’, 당 내부에서 친분과 당면 문제로 뭉쳐진 집합을 ‘파(派·faction)’로 좁혀 부르는 합리적 정치 세력 호칭법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정치적 사상이 아니라 경제적 시스템으로 그 속성상 자유주의와 궁합이 잘 맞으므로 자유주의 국가에서 함께 발전한 경제체제입니다. 하지만 그 효율성으로 인해 현재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사용하는(중국도 경제적으로는 한국보다 자유로운 자본주의체제임) 기본적인 경제 시스템입니다.
저는 자유주의자이지만, 자유주의 정신을 기본으로 공동체주의 정신의 상당 부분을 도입한 우익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급진주의에는 반대하는 점진주의자이며 정치적으로 오용된 개념이 아닌 인류의 지식과 사회가 발전한다는 의미에서 진보를 믿는 진보주의자입니다.
저는 종북 세력(역사적으로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빨갱이, 그리고 근대적인 국가라기보다는 왕정에 가까운 김일성 왕국의 앞잡이)이 아닌, 공동체주의 정신의 사회주의자와는 얼마든지 토론과 타협을 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격진료에 대한 생각 (0) | 2013.11.01 |
---|---|
환자는 물론 처방한 의사도 약을 제대로 조제했는지 알아야 한다. (0) | 2013.05.10 |
문제는 도덕성이 아니다 (0) | 2012.09.11 |
< 도덕성과 정의(正義) > (0) | 2012.04.05 |
대의원 총회에서의 폭력, 도덕성 (0) | 2012.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