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 도덕성과 정의(正義) >

팔락 2012. 4. 5. 12:40

< 도덕성과 정의(正義) >

 

도덕성은 도덕의 기준틀에 따라 상대적이다. 도덕성이 인간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인간이 구성한 것임을 이해하기만 하면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믿음 체계에 대해서, 나아가 타인에 대해서도 더욱 관용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타인의 행동에 대한 최종적인 도덕적 조정자로 자처하고 나서는 개인이나 집단이 있다면, 특히 그 집단의 구성원이 자기들이 옳고 그름의 절대적인 기준을 발견했다고 믿는다면, 그때부터 관용은 물론 이성과 합리성의 몰락이 시작된다.

--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 중

 

정의는 지상에 있는 인간 최대의 관심사라 할 만하다. 하지만 정의의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의 행위와 사회조직 속에는 지극히 복합적이고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고 있으며 이 복합체를 분석, 처리할 수 있는 이론적 능력 내지 실천적 의지가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 定義내리기 힘든 正義 /황경식

 

인간은 어떤 추상적 도덕규범은 가지고 태어나고, 다른 도덕규범은 배울 수 있는 준비가 된 상태로 태어난다. 마치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상태로 태어나는 것처럼. 이렇게 환경, 가족, 문화는 언어도 그러하듯이 우리를 특정 도덕 체계로 제한하고 안내한다.

 

즉, 도덕성은 생물학적 인간의 본성(유전자의 영향) 속에 일정 범주를 갖고 태어나며 이 범주의 범위 안에서 환경적인 영향으로 개개인이 어느 정도 다양한 편차를 보이며, 도덕성을 세분하여 연구하면 여러 항목(예를 들어 정직성, 타인을 도우려는 행동, 동정심 등)에서도 편차를 보인다.

 

또한 <트롤리 문제>에서 보듯이 많은 부분에서 대다수의 사람의 도덕성이 일치하는 일반적 경향의 부분도 있으며 일반적으로 인간의 추상적 직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정의감은 도덕성의 토대위에 문화의 진보에 따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유, 교환, 분배 등의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달시킨 감정과 이성의 복합체로 추상적 직관 보다는 이성의 역할이 크다.

 

그리고 정의(正義)는 위의 글(定義내리기 힘든 正義 /황경식)에서 보듯이 정의(定義)하기 힘들다. 개개의 사건을 그 사건의 상황과 연관 지어 판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에 관해서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수많은 저서나 주장을 통해 나름대로 정의를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칸트의 정언 명령적 정의론, 롤스의 정의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덕을 기준으로 한 매킨타이어나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론, 하이에크의 정의론, 아르노 기그의 정의론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많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을 두고 지혜는 신에게나 어울리고 그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한 말은 옳다. 인간이 모두 지혜롭다면 정의의 문제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인간이 모두 정의롭다면 지혜가 필요 없을 것이다.

 

인간의 도덕화에는 조심해야 할 점이 많다. 도덕성을 신분이나 순수함과 혼동하는 것, 지나치게 도덕적인 차원에서 판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반대자들에 대한 공격을 허락하는 것, 불가피한 흥정안을 생각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것, 어디에나 존재하는 자기기만의 악덕(자기 자신을 항상 천사의 편이라고 생각한다.).

히틀러 역시 온갖 이유로 자신의 대의가 청렴하다고 확신했던 도덕주의자(실은 도덕적 채식주의자)였다.

 

역사학자 이안 부루마는 이렇게 썼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진실한 신자가 냉소적인 운영자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본다. 냉소적인 운영자는 패를 버릴 줄 안다. 반면에 진실한 신자는 끝까지 가서 기어코 세상을 무너뜨린다."

 

< 도덕관념을 구성하는 감정들의 계보 >

하이트는 인간의 도덕관념을 구성하는 감정들을 하나의 계보로 짰다. 그가 분류한 네 가지 주요 집합은 트리버스의 호혜적 이타주의 이론과 그것을 기초로 해 협동의 진화를 실험한 컴퓨터 모델들의 실험 결과(엑셀로드의 협력의 진화)와 정확히 일치한다.

1. 타인 비난 (other-condemnimg) 감정 ; 경멸, 분노, 혐오

사기꾼을 처벌하게 하는 작용

2. 타인 칭찬 (other-praising) 감정 ; 감사, 고양시키는 감정, 도덕적 경외, 감동

이타주의자에게 보상하는 기능

3. 타인 고통 (other-suffering) 감정 ; 동정, 공감, 연민

어려운 수혜자를 도와주는 기능

4. 자의식적 (self-conscious) 감정 ; 죄 의식, 수치, 당혹

남을 속이지 않거나 속인 결과를 바로잡는 기능

-- 중략

 

< 트롤리 문제 >

마크 하우저 하버드대 진화심리학 교수는 ‘트롤리 문제’란 흥미로운 통계심리실험(사고思考 실험)을 실시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간단한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질문. 트롤리 전차(노면 전차)가 철길 위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 5명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폭주하는 전차를 막지 못하면 그 다섯 명은 틀림없이 목숨을 잃는다. 다행히 당신은 이 트롤리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꿀 수 있는 스위치 옆에 서 있다. 당신이 트롤리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꾸면 오른쪽 철로에서 보수 공사를 하는 1명의 인부는 깔려죽게 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두 번째 질문. 트롤리가 철길 위에 일하고 있는 노동자 5명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당신이 이 트롤리를 세우기 위해서는 뭔가 큰 물건을 열차 앞에 던져야 한다. 선로 변경 스위치는 없고 마침 당신 옆에 몸집이 큰 인부 한 명이 있다. 당신이 트롤리를 세우려면 그 사람을 떠밀어버리는 거다. 그러면 그 사람 몸이 바퀴에 끼어 트롤리가 멈추고, 비록 인부는 죽지만 철길에서 일하던 노동자 5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당신이 몸을 던질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전차를 정지시킬 만큼 몸집이 크지 않다. 어떻게 할 것인가?

 

놀랍게도 대답은 대부분 같았다. 인종, 나이, 학력, 종교, 문화적 차이를 불문하고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스위치를 오른쪽으로 돌리겠다고 답변했다. 5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1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결정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다수가 몸집 큰 사람의 등을 떠밀지 않겠다고 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은, 도덕이란 결과만의 문제가 아니며 결과에 이르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에 제시된 두 가지 상황에서 인부 한 명만 죽으면 다른 다섯 명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최종결과는 같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위를 용납하지 못한다. 결과에 무관하게 존중해야 할 원칙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학습되지 않은 도덕가치가 존재하고 있음이 통계로 입증된 것이라고 하우저 교수는 해석한다. 수 만년의 진화를 통해 인류의 깊은 의식 속에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를 불합리하다고 여긴다. 스위치로 선로를 바꾸어 전차를 인부한테로 폭주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왜 인부를 전차 앞으로 못 미냐는 것이다. 두 행위의 결과가 같으므로 도덕적 관점에서 두 행위를 다르게 취급해야 될 이유가 없으며, 트롤리 문제가 정말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면, 통상적인 도덕적(그리고 법적) 논리에 비합리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행위가 엄격히 결과를 기준으로만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는 결과주의자라고 불리며 , 공리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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