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복규 (이화의대 교수 / 의학사·의료윤리학)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의사가 가져야 할 책무, 즉 탁월한 지식과 기술, 자기계발능력, 의사소통능력, 이타주의, 책임감, 봉사와 도덕적 통합능력 등을 의미하며,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의사 집단이 사회와 맺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한다. 즉 의사는 이와 같은 책무를 자기 집단에 부여함으로써 사회로부터 자율성과 존엄을 획득하고 직업적 특전을 부여받는다.
이와 같은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인식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의과대학 교육 현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한국의과대학학장협의회에서 2004년에 발간한 ‘의과대학 학습목표’를 보면 A항 <환자, 의사, 사회>의 3장에 ‘의사의 전문주의’가 언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의료인의 권리와 의무에 대하여 설명한다.
- 사회정의를 위하여 의료자원의 분배를 거시적 분배의 문제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 사회정의를 위하여 의료자원의 분배를 미시적 정의의 문제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 의사-간호사 관계에서 불평등한 관계의 문제점을 나열하고 설명한다.
- 의사-간호사 관계에서 바람직한 태도를 설명한다.
- 임상실습학생과 환자, 교수, 다른 의료인의 관계에서 주의해야 할 점들을 설명한다.
- 임상실습학생으로서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나열하고 설명한다.
- 자문과 의뢰를 정의하고 차이점을 설명한다.
이는 프로페셔널리즘이 갖는 포괄적인 의미를 생각해볼 때 매우 불충분한 것이며, 프로페셔널리즘의 내용 중 ‘professional ethics’의 일부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이를 교육하는 수준도 만족스럽다고는 볼 수 없다. 현재 프로페셔널리즘 교육은 환자-의사-사회(PDS), 의사와 사회, 의학개론, 의료윤리 등의 교과목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있는 41개 의과대학은 모두 의료윤리 교과목을 개설하고 있다. 대개 11~40시간을 할애하고 있으면서 0.5~3학점을 부여하는 의료윤리 교과목의 주된 내용은 의사/환자관계, 의료윤리원칙, 생식관련 윤리, 죽음 관련 윤리 등 소위 medical ethics의 내용을 가르치고 있고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서는 별개의 언급을 찾기 힘들다.
프로페셔널리즘을 별도로 다루는 교과서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가 2003년 발간한 <의과대학 학습목표에 기초한 의료윤리학(2판)>에는 ‘의사에 대한 사회의 시각’이라는 장이 있을 뿐이며, 의학교육연수원이 2005년 발간한 <임상윤리학>에는 1절 ‘의사의 직업윤리’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서울대학교 김태길 명예교수가 쓴 ‘직업적 소명’을 강조하는 에세이에 머물고 있다.
이런 현실은 우리나라 의학교육에서 프로페셔널리즘이 처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즉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프로페셔널리즘의 기본 개념이 매우 희박하며 인식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의사의 직업관, 혹은 직업윤리는 매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김태길 교수의 에세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의사가 가는 길이 ‘인술’이라고 한다면 의사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의 근본은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임이 명백하다. 의사는 우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생명을 존중히 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하지 않으면 의사로서 일가를 이루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돈에 대한 사랑이 환자에 대한 사랑보다 강해서는 곤란하다는 뜻도 된다.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속으로만 환자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료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의사는 환자와 가까운 친구가 되어야 하며, 의사는 환자에게 따뜻한 말로 설명하고 건강에 대한 희망을 갖도록 친절한 말로 위로함이 바람직하다.”
이는 매우 좋은 말씀이기는 하나,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프로페셔널리즘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 의사의 전문직업성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개인적, 도덕적 차원에 머물러 있고 사회적으로 승화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러 의과대학에서 의학개론을 가르칠 때 나오는 소위 ‘의학, 의술, 의도’라고 하는 고전적인 세 구분도 이런 맥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의사의 프로페셔널리즘이 개인적 차원에서 머물 때 의사들이 겪게 되는 가장 큰 난제는 의사, 혹은 의료에 불만을 느끼는 환자들의 비난이 직접적으로 개별 의사의 도덕성을 향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의료계가 안고 있는 많은 어려움이 의사의 비도덕성 때문인가? 오히려 의사 집단과 일반 사회와의 관계에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이며, 그래서 합리적인 논의와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사실 사회적으로 승화된 차원의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논의가 미약한 현실에서 이를 교육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프로페셔널리즘 교육이 그 일부인 의료윤리교육에 머물고 있는 모습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많은 경우에 프로페셔널리즘 교육과 의료윤리교육 및 인성교육이 혼동되고 있으며 그래서 교육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교육의 효과에 대해서도 회의가 많이 일고 있다.
이 세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즉 프로페셔널리즘 교육은 의사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 책임감,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그 내용으로 하며, 의료윤리 교육은 의료환경에서 겪게 되는 윤리적 갈등 상황에서 의사로서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기본 지식과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고, 인성교육은 그야말로 훌륭한 도덕성과 인격을 갖춘 의사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성교육은 의과대학의 공식적인 교육과정을 통해서 달성하기는 매우 어렵고 결국 개인의 가치관과 선택의 문제인데 “의료윤리교육을 아무리 해도 의대생의 성향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비판은 윤리와 인성을 혼동하는 전통적 사고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프로페셔널리즘 교육을 위한 역할모델(role-model)이 매우 부족하다. 사실 일반적인 의사를 위한 역할모델은 성산 장기려 선생님처럼 모두가 다 인정하는 뛰어난 인격자이자 의사일 필요는 없다. 매일 매일 자기 일을 충실히 해 나가는 대다수의 선배 의사들이 모두 역할모델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부분에 대한 인식과 표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암환자에게 진단명을 통보할 때 과연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한국의 문화에서 건전하고 안전하며 ‘의사다운’ 것일까? 이에 대한 실증적인 작업과 자료가 별로 없기 때문에 교육이 어려운 것이다.
아울러 사회적으로 승화된 프로페셔널리즘 교육을 위해서는 전문직의 자율성 확보를 위한 노력, 즉 의사협회와 같은 기구들의 역할과 기능이 매우 중요하다. 모두가 다 아는 바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의사들의 직업적 자율성은 정부에 의해 매우 심하게 훼손되어 있고 각급 의사회의 기능과 역할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의과대학에서의 프로페셔널리즘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올바른 교육과 실천을 위해 의료계의 중지를 모을 필요가 있으며, 보다 많은 분들이 이 분야에 관심을 보여주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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