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회학

위기의 의료 프로페셔널리즘 /임기영 교수(아주대학 의과대학)

팔락 2011. 1. 8. 10:12
위기의 의료 프로페셔널리즘
 
전문직업성, 전문가 정신, 전문가주의, 전문직업주의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있는 프로페셔널리즘은 현재 세계 의학교육계의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고 있다. 그것은 전세계적으로 의료 프로페셔널리즘이 위기에 직면해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위기의 원인으로는 1) 환자를 포함하는 일반 시민들의 자율성(autonomy)에 대한 요구 증가, 2) 의료비용의 상승과 한정된 의료자원의 분배문제에서 비롯된 제3자 집단에 의한 의료통제 강화, 3) 의료환경의 다원화, 거대화, 세계화에 따른 시장경제화, 4) 전통적 의사 역할로부터 의사들을 한 눈 팔게 하는 다양한 유혹의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프로페셔널리즘의 위기는 의사들의 사회경제적 지위하락과 의사들에 대한 대중의 신뢰와 존경심의 감소로 나타나고 있으며 Elliott Krause는 이를 ‘거인의 추락’으로 표현한 바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사회 전반에 걸친 왜곡된 평등주의, 정치인들의 대중영합주의 및 계층대립 조장, 권위에 대한 적개심, 흑백논리적, 혹은 감정적 사고 등의 사회문화적 특성과 맞물려 프로페셔널리즘이 단순 붕괴를 넘어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는 의료계 내부에서도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고 그 결과 의사들 스스로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 의료 프로페셔널리즘을 와해시키는 일종의 자해 행동을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의료계에서의 프로페셔널리즘 파괴
 
한국 의료계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프로페셔널리즘 파괴는 여러 가지 영역에서,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고 있다.

첫째, 의료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개입과 통제, 어설픈 사회주의 의료의 추구, 그리고 국민들의 반 의사 정서 등에 부딪히며 만성적인 좌절감을 겪은 의사집단, 특히 개원의를 중심으로 의료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냉소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데”, “사회가 의사를 도둑이나 파렴치범 취급을 하고 있는데”, 윤리강령이니 선언이니 프로페셔널리즘이니 하는 것이 무슨 배부르고 한가한 소리냐는 반응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둘째, 의료계 내부의 경쟁이 심해지고, 전문과목 별 수입의 격차가 커지며, 의료계 내에 거대자본이 유입되는 등의 상황변화에 따라 의료의 상업화, 기업화가 가속되면서 의사나 병원이 윤리적 실체가 아닌 상업적 실체로 변질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의료계 스스로가 환자를 고객이나 의료소비자로 지칭하고 경영마인드 도입, 고객만족경영 등을 내세우며 스스로 상업화의 길로 달려가도 있는 현상이 목격된다.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의사들 스스로가 의료광고의 허용을 요구하는 것도 의료계 내부에서 자진하여 상업화를 추구하는 예가 될 수 있다.

셋째, 의학적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고 수많은 임상연구가 진행되면서 이들이 분석되고 정제되어 의료의 규격화, 공업화로 연결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의사들의 전문가적 재량권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다. 표준진료지침, 가이드라인 및 스탠더드, 혹은 치료알고리즘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러한 움직임은 일견 의료의 과학화로 평가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공학적 의학, 의학의 공정화라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가 흔히 의권이라고 표현하는 의사의 전문가적 자율권, 진료자율권이 약화, 축소되면서 궁극적으로 의료 프로페셔널리즘의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다.

넷째, 의학교육의 책무성 혼란도 의료 프로페셔널리즘의 붕괴에 일조하고 있다. 최근 들어 생명공학이 21세기 국가경쟁력으로 각광을 받고 모든 대학이 연구역량 강화를 화두로 삼으면서 의학교육에서도 교육이 연구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유능한 일차진료의사를 양성한다는 의과대학의 본연의 교육목표는 세계적 의과학자 양성이라는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비현실적이고 의학교육의 기본책무성과 거리가 먼 교육목표로 대치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교육의 중요성은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립서비스에 그치고 있고 진료와 연구에 매몰되어 정신을 차리기 힘든 의과대학교수들은 전공의나 학생들에게 의료 프로페셔널리즘을 실천하는 좋은 의사로서 역할모델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 의료계의 현실은 우리나라의 의료 프로페셔널리즘이 그 어느 나라보다도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역설적으로 한국의 의학교육에서 프로페셔널리즘 교육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매우 시급한 현안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의료 프로페셔널리즘 교육
 
의료 프로페셔널리즘 교육의 필요성과 방법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대두되는 의문은 과연 프로페셔널리즘이 교육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인성이나 도덕이 교육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플라톤, 소크라테스 이래 계속 이어져 온 해묵은 논쟁 중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교육이 한 사람의 성격을 근본부터 바꿀 수는 없을 지 몰라도 최소한 과학을 하는 이들에게 가치에 관련한 교육, 즉 인문사회학 교육은 행동의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과학에는 눈이 없고 철학은 과학의 눈이라는 말은 이를 의미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덕은 실천을 통해 학습되는 것이며 최선의 실천은 덕망 있는 사람을 모델로 삼는 것”이다. 만일 의학교육에서 의료윤리, 의사학, 의철학, 의료인문학 등을 공식 교육과정에서 배우고 그 내용이 교수들의 실제 행동을 통해 실천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미래의 의사인 의과대학생들의 프로페셔널리즘 교육은 아무 문제없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과연 임상교수, 임상의사들이 프로페셔널리즘을 실천하는 좋은 역할모델이 되고 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Ken Ludmerer는 “의대생들의 태도나 가치관, 신념,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결정함에 있어 의료원 전체의 조직 환경이 중요하다. 공식적인 강의나 교수의 개별적 지도는 태도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요소 중 단 두 가지에 불과할 뿐이다. 비우호적인 조직문화는 교육과정을 통해 프로페셔널리즘을 전수하고자 하는 공든 노력을 쉽사리 와해시켜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의대생들은 의과대학의 공식교육과정을 통해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교육을 받지만 실제로 그들이 의사라는 프로페셔널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실제로 기능할 때에는 프로페셔널리즘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조직 문화(병원, 의국, 학회 등)가 강요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선배의사들이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빠른 속도로 이에 동화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페셔널리즘 교육은 공식 교육과정에서의 교육과 함께 의료계 전반의 조직문화를 개혁해 나가는 노력이 병행되어야만 한다.

 

의료계 각 조직에서 윤리강령을 만들어 선언하고 준수하는 노력을 보여야 하며 의사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합의도출, 의료의 상업화 내지 공업화를 방지할 수 있는 구체적 제어장치의 마련, 의학교육의 책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위한 노력에 힘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의학교육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의학교육자의 역할
 
우리나라도 이미 의학교육자들이 프로페셔널리즘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을 함께하고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각 의과대학에서 프로페셔널리즘 관련 교과목의 수가 1990 년대 말 이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고 이러한 교육이 교육과정의 필수요소라는 점에 대부분의 의과대학이 공감하고 있다. 특히 2004년 제 14차 의학교육합동학술대회에서는 “의학전문직업성 교육”이라는 주제로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한 바 있으며 올해 열린 제22차 학술대회도 “의사사회의 프로페셔널리즘 교육과 실천”을 주제로 다루었다.

 

이제 의학교육자의 역할은 졸업 전 교육, 즉 의과대학에서의 교육을 넘어서 졸업 후 교육, 즉 전공의 교육과 기성의사들에 대한 보수교육까지 확장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다행히 최근에 의료윤리교육학회 및 의학회를 중심으로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윤리 교육 강화 움직임이 일고 있는 데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윤리영역뿐 아니라 프로페셔널리즘 전반에 대한 교육으로 확대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특히 개원의 들을 중심으로 어려운 의료상황에 대한 좌절감이 의료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냉소주의로 변환되지 않도록 특별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의료 프로페셔널리즘의 확립과 수호는 전문직으로서의 의사가 ‘의사답게 기능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의대생, 전공의, 교수, 봉직의, 개원의 등 의사사회 전 직역의 강한 연대가 필요하고 의학교육자들은 그 연대의 고리를 이어가야 할 책무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