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바르도는 한 드라마틱한 연구에서, 스탠포드대학 심리학과의 지하실을 감옥 비슷하게 꾸몄다. 이 "감옥"에 그는 정상적이고, 성격적으로 성숙된, 그리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지능이 우수한 한 집단의 청년을 들여보내 생활하도록 하였다. 동전던지기로 그들의 절반은 죄수가 되었고, 나머지는 교도관이 되었다. 그렇게 하여 며칠이 지났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짐바르도의 보고를 보자.
우리는 단 6일만에 그 가짜 감옥을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서운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피험자들이 맡은 역할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에 대한 한계가 우리 연구진에게나 피험자들에게 불분명해지게 되었다.
맡은 역할과 실제의 자기를 더 이상 분명히 구별할 수 없게 되었으며, 피험자들은 대부분 정말로 전형적인 "죄수", 전형적인 "교도관"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행동, 생각, 감정, 그 모든 측면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일주일도 채 안 되는 그 감옥 생활은 그들이 일생동안 받은 교육을 (잠정적이지만) 해체해버렸다. 인간적 가치는 유보되었으며, 자아-개념은 무시되었고, 인간 본성의 가장 흉하고 가장 비열한, 병적 측면이 표면에 드러났다.
"죄수"인 학생들은 "교도관"에 대한 고조되는 증오심, 자기 자신의 생존, 그리고 도망가는 것만을 생각하는 비굴하고 비인간화된 로봇이 된 반면, 학생 "교도관"들은 잔인성 속의 쾌감을 즐기며 "죄수" 학생들을 마치 비루한 동물처럼 다루는 것을 보고 우리는 공포에 질렸던 것이다.
# 우리 모두는 사후해석 편향(hindsight bias)에 취약하다. 사후해석 편향이란 일단 어떤 사건의 결과를 알게 되면, 사건이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기는, 즉 우리의 예견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말한다.
# Ellen Berscheid는 사람들에게는 언짢은 행동을 한 사람에게 '미친' '가학적인' 등등의 명칭을 붙임으로써, 그런 사람들을 "우리 선량한 보통 사람" 집단과 구별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행동은 우리 선량한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그런 행동에 대해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갖는 위험성은 그런 언짢은 행동을 일으키는 상황적인 압력에 우리 자신도 취약하다는 사실에 관하여 자만하게 만들고, 또한 사회문제 해결에 단순 논리로 대처하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적인 변인들이 많은 우리 "정상인"까지도 언짢은 행동을 하도록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언짢은 행동을 유발하는 이러한 변인들과 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감옥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교도관은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거칠고 인정없고 냉담한 사람이라고 흔히 상상할 것이다. 혹자는 교도관을 잔인하고, 폭군적이며, 가학적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세상을 이런 식의 성향적(dispositional)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교도관이 되는 이유는 자신의 잔인성을 처벌의 위험 없이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 머리 속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죄수나 교도관은 픔성이나 성격에 있어 우리와 아주 다르다고 우리 대부분이 믿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