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누가 통치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통치자를 어떻게 길들일 수 있을까>이다. 즉 중요한 것은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느냐>이다. 이것은 정치적 문제에 중요한 것은 사람의 문제라기보다는 제도의 문제임을 뜻한다.
의협도 의사회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정치조직이다. 따라서 정치철학의 이론을 적용하여 의협회장의 권력을 어떻게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통제할 수 있느냐를 숙고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결과만이 아니라 절차적 정당성도 중요하다. 절차가 민주주의 제도 그 자체를 지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의협회장의 선거는 직선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다수 회원들의 정서와 맞지 않고 현재에도 의협에 대한 회원들의 적은 관심을 더욱 멀리 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조직이란 어떤 사람이 그 조직의 수장으로 오더라고 조직의 능력이 쇠퇴하지 않는 조직이다. 즉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시스템의 문제다. 그러므로 어떤 조직이던 그 조직의 수장의 주 임무는 그 조직의 시스템을 점진적으로 개선시켜 조직의 임원들이 전문성을 가지고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훌륭히 완수하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시스템은 도구일 뿐 결국 정치를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사람의 능력을 확실히 파악할 방법은 없다. 어느 정도라도 그 능력을 예측하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임무를 부여하여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을 판단하거나 그 사람의 과거 행적을 통해 추론할 수 밖에 없고 추론은 항상 빗나갈 위험을 내재한다.
따라서 조직에 최악의 사람이 수장으로 오더라도 그 조직이 기본적인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틀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투명성 확보를 위한 감사의 기능을 강화하거나, 각 직역별로 어느 정도 독립성이 보장되는 의협 산하의 조직을 구성하여 미국 연방공화국의 주 제도와 같은 형태를 구성하거나, 대의원회를 분야별로 전문화시켜 활용하거나, 의료에 관련된 여러 문제를 지역의사회에 주제별로 할당하여 연구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예를 들어 한의학의 문제는 전라도 의사회에, 의료통계 문제는 경기도 의사회에 생동성 시험에 관한 문제는 서울시 의사회에 등).
국회의원들에 대한 로비는 필요하지만 로비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생각은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원들은 받아도 좋은 돈인지 받아서는 안될 돈인지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 의협 회장이 돈으로 로비를 한다면 그 돈의 출처는 회원들이 낸 회비로 형성된 공금이고 출처가 밝혀졌을 때 큰 문제가 되는 돈이다. 당연히 어느 국회의원도 의협 회장의 돈은 받지 않을 것이다. 국회에 대한 로비는 안면을 익히고 친분을 쌓아 대화의 통로를 열어두는 정도로 만족하고,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 로비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로비스트 제도가 양성화되기를 노력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로비스트를 양성화한 것은 그만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카리스마는 닫힌 사회에서나 통하는, 한 인간의 권위에 대한 지나친 미화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인간 이성 자체가 실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인식하지 못할 때 기대하는 신화다. 그리고 카리스마는 자신이 카리스마가 있다고 착각하는 지도자가 자신의 신념에 오류가 없다는 무오류의 환상을 심어주어 옳은 길로 가는 것을 차단한다. 따라서 카리스마는 열린 사회로 가는 길에서 백해무익한 개념이다.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권위는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는 자각위에 토대하는 것이지 다른 권위는 전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원하기보다는 합리성을 갖춘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낫다. 이 조차도 어려운 일이지만. 궂이 카리스마를 원하면 회원들이 단결하여 좋은 지도자라고 확인된 지도자에게 카리스마를 부여하면 된다.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원하는 것보다 우리가 뛰어난 지도자에게 카리스마를 부여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지 않은가. 역사가 우리를 심판하도록 놔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를 심판해야 하듯이.
나의 이 모든 생각은 소수의 사람들이 조직의 향방을 좌우하는 닫힌 의협에서 모든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의협으로 이행하는 와중에 나타나는 통과의례(通過儀禮)이기를 바라나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실행되기에 요원하다. 이 모든 일은 장시간을 요하는 데다 많은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회원이 어느 정도나 필요할까? 파레토의 효율을 응용한 약 20%쯤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길은 멀고 험한 길이라 실천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길 이외의 다른 길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여정에서 많은 정신적 고초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후배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
# '조직은 몇몇 사람의 힘으로 끄려가서는 안 되며 누가 그 자리에 오더라도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의 힘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상적으로 보이나 실제 상황은 다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특히 특정한 오너가 없는 대부분의 공조직이나 학교와 같은 조직에서 업무를 추진하거나 정책 방향을 밀어붙일 때는 그러하다.
그 추진력은 해당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열정'에서 나온다. 모든 정책 추진에 있어 완성도는 담당자 개개인의 업무 능력에 좌우되고, 이에 대한 최종 책임은 정책 결정권자가 인사권을 행사하면서 완성된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래야만 책임 소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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