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악마의 사도

팔락 2011. 4. 22. 12:48

다윈은 1856년 친구인 후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악마의 사도`라는 말을 썼는데 그때는 거의 농담처럼 한 말이었다.

 

자연의 굼뜨고 헤프고 서툴고 미개하고 무시무시하게 잔혹한 활동들을 책으로 쓴다면 `악마의 사도`라는 제목이 딱 맞지 않을까.

 

자연선택이라는 전혀 무계획적이고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시행착오 과정은 굼뜨고 헤프고 서툰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헤프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쫒고 쫒기는 치타와 가젤영양의 우아한 모습은 그들의 수많은 조상들이 피와 고통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산 것이다. 그러나 과정은 굼뜨고 서툰 것이 분명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이다. 제비에게서 굼뜬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상어에게서 서툰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이 설계 제도를 할 때 쓰는 기준들을 적용했을 때, 굼뜨고 서툰 것은 그 생물들의 진화를 이끄는 다윈 알고리듬이다. 잔혹함이라는 말은 다윈이 1860년 에이서 그레이에게 보낸 편지에 다시 나온다.

 

나는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신이 살아 있는 유충들의 몸속에서 파먹겠다는 의지를 뚜렷이 드러내는 맵시벌과를 의도적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다윈과 같은 시대의 인물인 프랑스의 장 앙리 파브르는 나나니벌도 비슷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대개 유충의 몸에는 몸마디마다 신경이 집중된 곳이 있다. 나나니벌의 산 제물인 갈색낚시지렁이는 유독 더 그렇다. 나나니벌은 해부 구조상의 비밀을 잘 알고 있다. 나나니벌은 지렁이의 몸을 끝에서 끝까지 훑으면서, 각 몸마디에 있는 신경마디를 찔러댄다.

 

파브르의 나나니벌과 마찬가지로 다윈의 맵시벌도 자기 애벌레들이 신선한(살아 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먹이를 죽이지 않고 찔러서 마비만 시켜놓는다. 다윈은 고통을 못본 척하는 것이 자연선택의 필연적인 결과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지면에서는 물어 죽이는 것이 빨리 자비로운 죽음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연의 잔혹함을 낮춰 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악마의 사도는 자연에 자비라는 것이 있다면 우연히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금방 지적했을 것이다. 자연은 호의적이지도 잔혹하지도 않으며 단지 무심할 뿐이다. 그런 호의도 잔혹함과 똑같은 명령에서 나온다. 다윈의 계승자 중 가장 생각이 깊은 편에 속하는 조지 윌리엄스의 말을 들어보자.

 

도덕관념을 가진 사람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미래 세대에게 유전자를 물려주는 일을 이웃보다 더 잘하는 것이고, 그 성공한 유전자들이 다음 세대의 발달을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내용이 늘 `자기 유전자의 성공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친구와 친척까지 포함해서 자신의 환경을 활용하라`는 것이며, 성경의 황금률과 아주 흡사한 `손익을 따져 이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으면 속이지 말라`는 행동 규범을 지닌 체계를 접했을 때, 보일 수 있는 반응이 비난 말고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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