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팔락 2010. 10. 7. 16:19

 

<도덕 감정론>

 

 사회가 존재하는 데 있어서 자애는 정의만큼 중요하지 않다. 자애가 없어도 사회는, 비록 최선의 상태는 아니겠지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불의가 만연하면 사회는 끝내 무너지고 만다. 자애는 건물의 기초가 아니라 장식이며, 권하는 것으로 족할 뿐 강제할 필요까지는 없다.

 

 반면에 정의는 건물전체를 지탱하는 주 기둥이다. 이것이 사라지면 인간사회라는 거대한 구조물은 한 순간에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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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잘잘못을 판단할 때 기준이 되는 원칙은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의 원칙과 동일하다.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판단할 때는 그 사람의 상황을 나 자신에게 적용해보고(즉 내가 그 사람의 상황에 처했다고 상상해보고) 그런 행위를 하게 된 감정과 동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살핀다.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잘잘못을 판단할 때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의 상황에 놓고 그 사람의 처지에서 그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 내가 한 행동에 영향을 미친 감정과 동기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살핀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려 노력하지 않으면 자신의 감정과 동기를 관찰할 수 없고 그에 관한 어떠한 판단도 할 수 없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또는 다른 사람들이 바라볼 것 같은 관점으로 보려고 애쓰는 방법밖에 없다. ---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利己的: selfish)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天性)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憐憫)과 동정심(同情心)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또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종류의 감정이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흔히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예를 들 필요조차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제 1부, 제1편, 제1장에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로부터 부자로 생각되는 것을 영예로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평판이 그에게 부과하는 모든 의무를 실행하다가는 그는 곧 거지 신세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것과, 그 결과 그의 상태는 그가 경탄하고 모방하려는 사람들의 상태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는다.> (본문 제 1부 제3편 제2장 7절에서)

<우리 자신의 행복에 방해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해치는 행위나, 어떤 것이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유용(有用)하거나 또는 그 이상으로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로 유용한 것을 빼앗는 행위나, 또는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타인을 희생시켜 가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는 천성적인 선호(選好)에 몰두하는 행위는 공정한 방관자로서는 결코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제 2부 제2편 제2장에서)

<모든 인간은 천성적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주로, 자기 자신을 돌보게 마련이다. 사람은 자기 이외의 어떤 사람보다도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 더욱 적합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적합하며 또한 정당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직접 관계된 사항들에,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 관계된 사항들에 대해서보다, 더욱 깊은 관심을 갖는다.> (제 2부 제2편 제2장에서)

<부(富)와 영예(榮譽)와 높은 지위를 향한 경주에서 사람들은 다른 경쟁자들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온힘을 다해 달리고,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노력을 다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자기 경쟁자들 중 어느 누구를 밀어제치거나 넘어뜨린다면, 방관자들의 관용은 거기서 완전히 끝난다. 그것은 공정한 경쟁을 위반하는 것으로, 방관자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방관자들에게는 그의 방해를 받은 사람도 모든 면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제 2부 제2편 제2장에서)

 

< 국부론 >

 

 인간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동업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타인의 박애심에만 의존해서 이를 기대하는 것은 헛되다. 잘될 가능성이 훨씬 큰 방법은 따로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익 때문에 그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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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 제조업자들의 박애심 덕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돈벌이에 대한 관심(자기 이익 관심)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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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부론(민부론)

애덤 스미스가 1776년에 발표한 경제학 서적이다. 국부론의 원래 제목은 《모든 국민의 부의 성질 및 원인에 관한 연구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국민의 ‘부의 원천’을 밝혀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

  • 경제분야의 배역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계몽주의의 관점에서 ‘경제분야의 배역들(economic actor)’을 지배하고 이끄는 법칙을 설명하고, 이들의 행동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여기서 스미스가 말하는 '경제분야의 배역'들이란 특정한 경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경제를 하는 모든 일반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 공통적 욕구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밝힌 경제분야의 배역들의 ‘공통적 욕구’, 혹은 ‘성향(Propensity)’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인간은 보다 잘 살고 싶어한다’라는 명제이다. 이는 인간이 어느 한 순간도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현실을 개선하려는 욕구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의미한다.
  2. ‘인간의 교역 본능’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가진것을 남의 것과 바꾸고 싶어하는 욕구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 욕구라는 점이다.
  • 인간의 자기애

스미스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사회가 적절히 이용하여 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자기 이익 관심은 그 자체로 강력한 경제의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무작정 이러한 자기 이익 관심을 억압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스미스는, 모든 인간은 타인의 도움을 원하지만, 그 도움을 단순히 타인의 자비심에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스미스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은 한 구절로 명확히 보여줬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 제조업자들의 박애심 덕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돈벌이에 대한 관심(자기 이익 관심) 덕분이다.” 즉, 경제적 보상이 없다면,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제빵업자, 그 누구도 음식을 만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스미스는 관용, 양보, 자비심등이 가치 없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의 자기애가 다른 어떠한 동기보다 더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인간에게 동기부여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보이지 않는 손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렇게 자기 이익에 의해 움직인다면, 그 사회는 과연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스미스는 국부론에 이에 대한 답변을 아래와 같이 썼다.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기여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공익도 얻게 된다.” 이 구절에서 처음 등장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란 표현은 스미스의 경제이론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의 가격기구를 의미하는데, 이는 시장의 가격을 통해 각 개인의 자기 이익 관심에 의해 생산된 부(재화)가 가장 최적의 상태로 분배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박애심과 우애는 사회가 기능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간은 "수많은 사람의 협력과 지원을 상시적으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인생은 "몇 안되는 사람들의 우정을 얻기에도 부족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우정의 범위를 넘어서, 모르는 사람들과 공동 이익을 성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