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도덕발달이론 및 의사의 도덕성

팔락 2010. 10. 7. 16:34

 1950년 대 미국의 도덕 발달이론은 소위 사회화 이론socialization view 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에 따르면 도덕이란 그 사람이 속한 사회의 문화를 학습하고 받아들여 그 문화에 일치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적응을 잘 한 사람이 가장 도덕적인 사람) 이다.

 

 이 이론은 후에 Kohlberg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는 옳고 그름은 사회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 규범에 따르는 것이 부도덕한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도 사회화 이론이 도덕성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 듯하다. 법과 제도보다 소위 국민 감정, 국민 정서가 더 중시되고 있는 현실에서 의사의 의사로서의 행동 역시 사회가 정해 준 규범을 따르도록 강요 당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한 것은 우리 사회, 우리 문화가 정해준 의사의 전범은 허준이거나 슈바이쳐라는 점이다. 환자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물질에 초연하여 오직 환자만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국민정서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의사상이다.

 

  하지만 의사들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사회 전체가 추구하고 숭상하는 자본주의적, 물질 만능적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벤쳐 열풍 , 신지식인 열풍 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메시지는 돈을 버는 것이 곧 성공이고, 사회적 존경과 권위를 인정 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메시지가 동시에 전달되는 것을 우리는 이중 구속(double- bind)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어떤 행동도 성공할 수 없는( lose- lose situation) 정신적 분열상태를 초래하는 올가미다.

 

  도덕의 수준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의 적응도로 결정되는 문화에서 의사들은 이중 구속 외에 이중 난관(double jeopardy)도 겪게 된다. 즉 의사들은 자신들에 대한 전체 사회의 요구에도 적응해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속한 동료 집단인 의사 사회의 요구에도 적응해야 하는 데 이 때 두 집단의 요구가 매우 상이한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일반인들은 의사들에게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세계 기준을 보아도) 윤리의식, 희생 및 봉사정신을 요구하는 데 반해, 의사 집단이 갖고 있는 윤리의식은 그렇지 못하다. 물론 의사들의 윤리 의식이 우리나라의 다른 전문 직종에 비해서는 더 높을 지 몰라도, 국민 전체의 윤리의식이 낮은 데, 유독 의사들만 선진국 수준의 윤리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집단화 경향, 전체주의적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의사들 역시 일탈된 행동에 대한 역치가 상당히 낮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의사 사회의 누군가가 혼자만 윤리적 행동을 고집하고 동료들의 비윤리적 행동을 지적하며 고발한다면 그는 오히려 동료들로부터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 , 인격적 결함이 있는 자 , 배신자 로 매도될 가능성이 크고, 사회주의적 도덕발달론에 따른다면 오히려 비도덕적인 자 가 되고 마는 것이다.

 

  아직 사회에 나가기 전인 의과대학 시절에 강도 높은 윤리교육, 인성교육을 받는다 해서, 그것이 실제 의사가 되고 난 후 그 사람의 행동에 얼마나 지속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오히려 실제 의사가 되고 난 후 수 년간의 사회 생활(그것도 거의 24시간을 함께 지내는 의국 생활)을 통해 선배나 동료들에 대한 동일화 과정을 거쳐 의사로서의 행동 양식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윤리의식의 수준도 결정된다는 주장이 있다.

 

윤리 의식의 부재가 아닌 윤리적 제도의 부재가 문제
현재 의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의학윤리는 대부분 어려운 의학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 갈등 상황에서의 전문 직업윤리에 관한 내용 들이다. 안락사, 인공유산, 진실 고지 의무, 사전 동의 의무, 비밀 보장 의무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의사들의 윤리교육,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고 주장할 때 염두에 두고있는 내용들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환자에게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할 것, 자세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줄 것, 환자의 무지를 악용하여 돈벌이를 하지 말 것, 제약회사 등으로부터 대가성 있는 돈을 받지 말 것, 허위, 과장 광고를 하지 말 것 등등이 그것이다.

 

 초등학교 바른 생활 수준의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기 때문에 굳이 의학윤리 시간에 다룰 필요가 없는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당연한 것들이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고, 지키기가 너무나 힘든 데 문제가 있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의과대학생, 의사 개개인의 윤리와 인성의 제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여건, 지키도록 강제하는 규율 제정과 그 엄정한 집행이 요구된다. 법과 제도의 정비 없이 윤리만을 강조한다면 의사들의 무력감, 가치관 혼란, 냉소주의는 더욱 심화될 뿐이다.

 

 또한 이런 문제에 대한 비판과 대안 모색을 위한 윤리 및 인성교육을 의사의 사회화, 전문직업인화가 이루어지는 critical period인 수련, 전공의 시절에 반드시 실시하여야 한다.

 

우선 윤리적 의료시스템을 만들자

의사들에게 윤리나 인성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과 기술에 근거한 의사의 임상능력(comopetence), 의학적 결정 능력(medical decision making)이다. 이러한 전문적 능력 없는 희생, 봉사정신이나 친절함은 환자들이 원하지 않는다.

 

 의사들의 윤리를 말하기에 앞서 의사들이 그들의 전문 지식, 전문 능력을 키워주어야 하고, 이를 소신껏, 정의롭게 사용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 마련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한다.

 

 현재 의료계의 가장 크고 시급한 문제점은 의사들의 윤리 부재가 아니라, 정의로운 의료시스템의 부재이다. 의료시스템이 의사들에게 불의를 강요하는 현실에 대한 교정 없이 의사들에게만 인성과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결코 정의가 아니며 자칫 의료계라는 건물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

 

 윤리를 가르치는 이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바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의료 개혁의 문제, 의사의 전문가적 자율권의 문제, 윤리강령과 윤리위원회 구성 및 엄정한 집행의 문제에 역량을 집중하여 선도적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  의사들이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특별히 윤리교육,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의사들만이 유난히 비윤리적 집단이라고 매도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형사정책연구원이 1999년 9월에 실시한 직업별 부정부패 정도 조사(한겨레, 1999.9.27, 14면)에 의하면 의사들은 우리나라 사회의 다른 직업인에 비해 청렴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전국 9개 도시에 사는 30살 이상의 성인남녀 1,354명을 대상으로 한 이 설문조사에서는 매우 청렴 을 1점, 매우 부패 를 4점으로 하여 여러 직업의 부패정도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정치인은 부정부패지수가 3.81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다음으로 재벌총수 3.60, 세무공
무원 3.54, 경찰공무원 3.43의 순으로 나타났다. 또 대기업 사장 3.39, 변호사 3.21, 검사 3.08, 판사
2.84, 교사 2.79, 민원공무원 2.77, 교수 2.69, 의사 2.66, 중소기업 사장 2.64, 은행원 2.63, 목사 2.33
의 순서로 부정부패지수가 산출되었다.

 

변호사의 부정부패지수는 의사의 부정부패지수보다 월등히 높으며 검사, 판사 등 법조삼륜이 모두 의사보다 높은 부정부패지수를 기록했다. 특히 의사는 교사나 교수보다도 청렴한 것으로 평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