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진료의 불편한 진실
발전하는 정보통신 기술은 의학 및 의술에도 그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최근 논란이 되는 원격진료는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하는 진료행위다. 편리함과 뛰어난 접근성으로 그 필요성이 대두 되고 있다. 그러나 대면진료와 달리 촉진, 청진, 타진은 아직 불가능하다. 원격진료의 태생적 한계다.
전통적인 환자진료는 환자가 병의원을 직접 방문해야 가능했다. 진료실에서의 대면진료가 원칙이었다. 대면진료는 진료실로 들어오는 환자의 거동, 표정, 작은 움직임만이 아니라 환자의 눈동자와 피부 등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더불어 대면진료가 이루어지는 진료실은 은밀한 공간이다. 사적인 개인건강정보에 대한 비밀이 철저히 유지되고, 누구도 간섭할 수도 없고, 녹화할 수도 없는 공간이다. 그런 결과로 진료실은 다른 어떤 공간보다 의사가 환자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된 공간이며 환자의 정신·신체 비밀을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반면 원격진료는 정보통신을 이용, 화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환자를 찾아가는 진료행위이며 제한적인 건강정보만 얻어낼 수 있다. 대면진료와 달리 환자가 일부 의료행위에 직접 개입해야 한다. 환자는 의료인이 아니지만 원격의료기기를 통해 자신의 활력징후, 혈당, 심전도와 같은 신체정보를 얻어내어 이를 의사에게 전송해야 한다. 따라서 원격진료에서는 대면진료와 달리 환자, 의사, 원격의료 기기 및 장비, 원격진료 시스템 기술자, 보호자 등이 개입되면서 위험부담이 커지고 법적 책임의 소재를 따져야 하는 경우의 수가 많아졌다. 이를 위해 전 진료과정을 녹화하고 저장해야 한다. 의사나 환자 모두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기존 대면진료보다 소극적인 진료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개인건강정보가 오랫동안 한곳에 집적, 저장되면서 정보누출 위험도 그만큼 커진다. 원격진료가 미래지향적인 보편적 진료수단이 될 수 없는 이유들이다. 원격진료가 보편화 되면 의사-환자 관계에도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상호 신뢰관계에서 상호 불신관계로, 인간적인 관계에서 기계적인 관계로, 구심적인 관계에서 원심적인 관계로 변화될 것이다.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원격진료의 문제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최선의 진료가 아니기 때문에 의사는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하여 원격진료에서 수반되는 책임분배와 위험성 등을 충분히 설명하고 사전 동의까지 얻어야 한다. 전통적인 대면진료에서는 두터운 상호신뢰 관계로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를 기대할 수 있었으나 원격진료에서는 진료에 앞서 다양한 주의사항, 책임문제, 위험성부터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플라시보 효과는 고사하고 오히려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만 늘어난다.
같은 약물을 처방해도 약물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증상 호전이 없거나 사소한 약물의 부작용만 나타나더라도 모든 원인을 원격진료에 투사하거나 과민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에 따라 발생하지 않을 의료분쟁이 발생할 수 있고, 진료량도 늘어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사회적 자본을 잃게 된다. 기대되는 경제적 효과 못지않게 사회적 갈등 비용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의료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런 원격진료의 문제점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원격진료를 지나치게 과대포장하거나 막연한 환상에 빠지기 쉽다. 현재 정부안대로 위험성이 낮다고 판단되는 모든 만성질환의 재진환자, 모든 정신질환의 재진환자, 일부 초진환자까지 원격진료 대상으로 포함시킨 것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광범위하다. 모두 진료현장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경제논리와 편리성만으로 의료접근성과 무관하게 규제를 대폭 완화한다면 잘못된 의료소비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 갈수록 귀찮은 대면진료는 줄어들게 되고, 위험하고 불완전한 반쪽짜리 원격진료가 편리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대리처방이 가면 갈수록 늘어나는 이치와 같다. 결국 국민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고 사회적 손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의료도 산업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의료의 본질은 국민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산업화도 의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빠르고 편리함만이 능사는 아니다. 정확함과 안전함은 환자진료에서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가치다. 다소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이를 감수해야 한다.
원격의료관련 의료법 개정안은 무엇에 쫒기 듯 매우 거칠게, 급하게 추진되었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직결되는 문제임에도 면밀한 검토가 없었다. 앞서 설명대로 허용범위를 대폭 완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반면 풀지 말아야 할 규제는 과감히 풀었다. 타국과 달리 환자를 장기간 진료했던 의사가 반드시 원격진료에 임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얼마든지 원격진료 전문 병·의원이 탄생할 수 있다. “명의” 중심의 대규모 환자유치가 가능해져 골목의원들이 사라질 수 있다.
온라인 의료접근성은 향상될지 모르지만 역설적으로 오프라인 의료접근성은 심각하게 떨어질 수 있다. 안정적인 의료 생태계 파괴는 시간문제다. 또한 정부는 의료전달체계 붕괴 위험으로 동네의원에게만 원격진료를 제한적으로 허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네의원은 대면진료와 원격진료를 번갈아 가면서 수행하기가 어렵다. 실효성이 떨어진다.
정부주장대로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장애인은 대표적인 의료취약계층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원격의료기기 조작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원격진료는 해법이 될 수 없다. 왕진이 해법이다. 게다가 원격의료관련 기기는 비싸다. 현재 100~150여만 원 정도를 추정하고 있다. 값싼 진료비를 감안하면 배보다 배꼽이 큰 것이다.
만약 공적재원인 건강보험재정에서 이를 부담한다면 원격의료관련업체의 불확실한 수익 모델을 위해 공적자금을 낭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원격진료 허용의 중요한 명분이었던 편리성마저 반감된다. 원격조제를 불허했기 때문이다. 원격으로 처방전을 받더라도 정작 약을 조제받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직접 약국을 방문해야 한다. 주무부서가 조제행위를 진료행위보다 더 위험하고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매김한 결과다. 의사들의 반감을 더욱 키운 원인이다.
원격진료는 의료접근성이 심각히 떨어지는 지역이나 국가에서는 효율적이겠지만 우리처럼 의료접근성이 뛰어난 국가에서는 의학적 필요성조차 없다. 사치스러운 제도다. 원격의료가 질병관리를 더 잘하고, 질병치료를 더 잘한다는 객관적인 증거도 아직 부족하다. 산업적 가치도 아직 불투명하다. 기대만큼 실익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원격진료를 도입한 국가들조차 대부분 공공의료기관에 한해 제한적으로, 보완적으로 허용한다. 세계의사회에서 권고한대로 우리나라도 실보다 득이 많은 경우, 즉 의료접근성이 심각히 떨어지는 의료취약지역, 피치 못할 경우에 한해 매우 제한적으로, 보완적으로 허용해야 한다.
원격진료를 무분별하게 허용하면 충분히 대면진료가 가능함에도 귀찮다는 이유로 이를 쉽게 포기하게 되어 양질의 대면진료는 가면 갈수록 줄어들게 되고 위험하고 불완전한 반쪽짜리 원격진료만 만연하게 된다. 환자, 의사 모두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원격진료의 불편한 진실 앞에 우리 모두 한걸음씩 물러나 냉철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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