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해야 하는 것'을 정한 법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정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의 법 안에서도 두 가지가 별도로 존재하거나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근대 성문법의 원조가 된 로마법에서 이런 개념을 찾을 수 있는데, 강행규범(Jus Cogens)이 바로 그것입니다. 강행규범이란 공공의 질서에 관한 규정이며 쉽게 표현하면 당사자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미풍양속이나 사회상규와 어긋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에 반에 임의규범(Jus dispositivum)은 구속력은 있으나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해 배제, 수정될 수 있는 규범입니다.
우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법 - 대표적으로 형법 - 은 강행규범에 의한 법입니다. 요즘은 워낙 사회가 급변하고 다양해져서 형법만으로는 모든 범죄를 처벌하기 어려워 그에 맞는 각종 특별법들을 제정하여 적용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면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서 트랜스젠더를 강간한 경우 형법상 강간죄로 처벌 받을까요?
우리 형법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형법 제297조 (강간) -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문제는 트랜스젠더가 '부녀(婦女)'에 속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외견상으로는 여성과 흡사하지만 유전적으로나 호적상에는 분명히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09년 대법원 판례가 나오기 전까지는 트랜스젠더를 강간해도 형법상 강간죄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2009년 대법원은 '성 개념에 개인의 성별 귀속감과 심리적 요소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구분해야 한다.'며 트랜스젠더도 강간죄의 객체로 인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여자가 남자를 강간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으므로(이미 있었겠지만) 강간죄의 객체를 '부녀'로 한정한 형법이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형법에 규정되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는 형법에 의해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며, 특별한 예외 역시 오랜 기간 동안 논란을 거치고 새로운 판례에 의해 뒤집어지지 전까지는 자구(字句)대로 매우 엄격하게 적용되는 것이 법의 원칙입니다. 그것이 '해서 안 되는 것을 정한 법', 즉 강행규범의 특징이도 합니다.
그러면 '해야 되는 것을 정한 법'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대표적으로 정부조직법을 들 수 있는데, 목적에 명시한 것처럼 국가행정기관의 설치·조직과 직무범위 등을 정한 것입니다. 행정부는 이 법에 근거하여 정부를 조직하고 운영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에 근거하지 않은 기관을 설치 운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날 남성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왜 여성부는 있는데 남성부가 없느냐, 남성부도 만들어라'라고 거세게 요구했다고 가정합시다. 남성부를 신설하려면 정부조직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마침 국회가 여야 정쟁으로 개점휴업 상태여서 행정부가 에라 모르겠다하고 남성부를 만들었다면 그 부처의 합법성, 정당성은 어떻게 평가를 받을까요.
아시다시피 정부조직법에는 '남성부를 만들면 안 된다'는 규정이 없습니다. 법 개정도 없이 남성부를 만들었을 경우 처벌 규정도 없습니다. 그러면 '정부조직법 개정 없이 남성부를 만들어도 불법이 아니다.' 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해야 하는 것을 정한 법'의 특징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것을 안 한다고 해서 불법이 되거나 처벌 받지는 않지만, 그 사회의 구성원이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을 저버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또 법에 근거 하지 않은 행위이므로 원천 '무효'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해야 하는 것을 정한 법'은 준수규범(Code of conduct ; 행동강령)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선인의 책임 동반자들 (0) | 2012.12.26 |
---|---|
주최, 주관, 후원, 협찬 (0) | 2012.09.24 |
전체주의 파시스트들의 과거청산 논리/펌 (0) | 2012.09.04 |
인간적인 것을 거스르는 인간들 (0) | 2012.04.20 |
‘正義의 사람들’ (0) | 2012.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