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결코 예견할 수 없다. 예견의 스캔들
오늘날 세계에 가장 큰 충격을 준 기술을 세 가지만 꼽아 보라고 하면 대부분 컴퓨터와 인터넷, 레이저 광선을 든다. 이 세 가지 기술은 모두 어떤 계획하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미리 예견된 것도 아니며, 발명 당시는 물론 꽤 한참 후까지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특징이 있다. 말하자면 이들에 대한 평가는 결과론적이다. 이것들이 바로 검은 백조다. 이 세 기술이 원대한 계획의 일부로 추구되었다는 평가는 나중에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하다. 이와 비슷한 일은 정치, 전쟁, 지적 유행 등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미래를 들여다 볼 때 ‘땅굴 파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미래에 통상적인 것은 없음에도 미래를 통상적인 것, 검은 백조와는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미래는 플라톤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 일을 이야기로 꾸미는데 능숙하다. 과거의 일이 쉽게 이해되도록 새로운 이야기까지 만들어 낸다.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이란 판단의 척도가 아니라 확신을 만들어 내는 능력의 원천이다. 여기서도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상자 속의 것’을 열어 보지 않고도 예견하는 플라톤적 사고, 즉 (사리에 맞지 않는) 법칙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이미 경험으로 입증된 증거가 있는데도, 마치 우리가 미래를 훤히 알고 있다는 듯, 희귀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배제하는 도구나 방법을 동원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계속해 왔다는 것은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3월 어느 날 저녁 남녀 몇 사람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바깥쪽의 항구를 굽어 보는 산책길에 서 있었다. 시드니에서는 늦은 여름이라 따뜻한 편이었는데도 남자들은 웃옷을 걸치고 있었다. 여자들은 춥지는 않은 듯했으나 하이힐 굽 때문에 힘들어하는 기색이었다.
이들은 멋을 부린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면 이들은 몇 시간 동안 거구의 남녀가 잔뜩 모여 끝도 없이 러시아어로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 오페라 애호가들은 J. P. 모건 같은 금융회사의 지사에 다니는 외양이다. 이런 회사의 직원들은 다른 주민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부를 누려서 그런지(와인과 오페라처럼) 고상한 것을 즐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이 신교양인들을 흘긋거릴 여유가 없었다. 호주의 관광안내 책자마다 찬탄을 머금고 소개하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야 예전에 가본 터였다. 이 건물은 빌딩 건축가가 다른 건축가들에게 뽐내기 위해 지은 것 같지만, 인상적인 건축물이기는 했다.
그날 저녁 내가 시드니 록스를 찾은 것은 산책이 아니라 일종의 순례였다. 호주인들은 오페라 하우스가 시드니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기념물이라고 착각하지만, 내게 있어서 이 건물은 예측과 계획의 실패, 미래에 대한 무지, 즉 미래가 예비하고 있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함을 기념하는 건축물일 뿐이다.
호주인들은 참으로 인류의 인식론적 오만을 상징하는 건물을 지었다. 사정은 이렇다. 이 오페라 하우스는 본래 700만 호주달러를 투입하여 1963년 초에 문을 열 예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문을 연 것은 이보다 10년이나 뒤였다. 첫 설계 때의 야심 찬 목표를 건축 과정에서 축소했는데도 최종 건설비는 무려 1억 400만 호주달러나 들어갔다. 계획의 실패라는 면에서 이보다 더 지독한 사례도 있고(소비에트연방의 실패가 대표적이다), 예측의 실패라는 면에서도 역시 많은 사례가 있지만(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마다 발견된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계획과 예측 모두가 미학적으로 (원안과 비교할 때) 좌초된 경우를 잘 보여준다. 이 건물은 (막대한 돈을 날렸으되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리는 일은 없었으니) 그나마 참을 만한 실패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상징물인 것은 사실이다.
이 장의 화제는 두 가지다. 첫째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과시하며 오만해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분명히 적지 않은 것을 안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착각을 뿌리 깊이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자주 일어난다. 인간의 오만은 어느 집에서든 거실 한 곳에서 드러난다. First, we are demonstrably arrogant about what we think we know. We certainly know a lot, but we have a built-in tendency to think that we know a little bit more than we actually do, enough of that little bit to occasionally get into serious trouble. We shall see how you can verify, even measure, such arrogance in your own living room.
둘째, 이러한 오만은 미래를 예측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도대체 우리는 왜 그토록 자주 미래를 예측하려는 것일까? 더 지독하고 흥미로운 질문도 나온다. 왜 우리는 지난 시기 동안의 예측 결과 기록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예측이 (거의) 대부분 틀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할까? 나는 이것을 예견의 스캔들이라 부른다. Second, we will look at the implications of this arrogance for all the activities involving prediction. Why on earth do we predict so much? Worse, even, and more interesting: Why don’t we talk about our record in predicting? Why don’t we see how we (almost) always miss the big events? I call this the scandal of prediction.
예카테리나 여제의 연인 숫자 맞추기
인식론적 오만(epsitemic arrogance)이란 말 그대로 우리 지식의 한계에 대해 교만한 것을 말한다. ‘Episteme’란 지식을 가리키는 그리스어다. Let us examine what I call epistemic arrogance, literally, our hubris concerning the limits of our knowledge.
그리스어를 어근으로 쓰고 있다는 것만 봐도 중요한 말임을 알 수 있다. 분명 우리 지식은 증가한다. 그러나 그보다 지식에 대한 확신이 더 증가함으로써 문제가 심각해진다. 지식이 늘어남과 동시에 혼동과 무지, 자만이 늘어나는 것이다. True, our knowledge does grow, but it is threatened by greater increases in confidence, which make our increase in knowledge at the same time an increase in confusion, ignorance, and conceit.
방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고 하고, 여기서 아무 숫자나 선택한다. 숫자는 어떤 것도 좋다. 서부 우크라이나의 주식중개인 중 정신병자의 비율, ‘r’자가 들어가는 달에 이 책이 팔린 숫자, 경제경영서 편집자(또는 집필자)들의 평균 아이큐,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연인 숫자 등등. 방안에 있는 사람에게 저마다 98퍼센트 이상의 정답률, 2퍼센트 이하의 오답률을 갖는다고 확신하는 숫자를 대도록 하는 것이다. 즉 각자 자신이 틀릴 확률이 2퍼센트 이하라고 생각하는 답을 말하게 한다.
“내가 98퍼센트 확신하건대 라자스탄의 인구는 1500만에서 2300만 사이다.”
“내가 98퍼센트 확신하건대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의 연인 수는 34명에서 63명 사이다.”
이제 이 사람들 가운데 틀린 답을 댄 비율이 얼마나 될지 추론해 보라. 그 비율은 100명 중 2명꼴이 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되리라. 답의 범위는 피실험자(당신의 희생자)가 스스로 정하도록 했음을 염두에 두자. 이 실험은 피실험자의 지식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실험자들이 자신의 지식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측정하는 것이다.
결과는 이렇다. 삶의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우리가 발견한 것은 계획되지 않았고, 우연적이고, 놀랍고, 선뜻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연구자 앨버트와 라이파는 이 점을 잘 간파하면서 생각지 않은 점, 그러나 그만큼 더 따분한 사실을 발견해 냈다. 그것은 바로 불확실성이 개입되어 있는 문제에서 의사 결정을 할 때 어떻게 확률을 계산하는가 하는 것이다. 뚜껑을 열어 본 두 연구자는 아연실색했다. 오차율은 예상했던 2퍼센트가 아니라 45퍼센트나 되었다! 흥미롭게도 피실험자 중에는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학생이라면 겸손이나 겸양과는 거리가 멀지 않던가. 이들은 이런 점에서 약삭빠르게 행동함으로써 경제경영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다른 직업군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자신의 지식을 겸손하게, 즉 덜 오만하게 평가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왔다. 건물 관리인이나 택시 기사들은 겸손한 쪽이었다.
자, 이제 우리는 오차율이 늘어난 만큼 22배 즐거워졌는가? 아마도 그럴 것 같다.
이와 같은 실험이 그 후 직업별 문화별로 표본을 바꾸어 열 번 이상 더 행해졌다. 그뿐 아니라 심리학자나 의사 결정 이론가들마다 자기 학생들을 상대로 인간의 근본적 문제점, 즉 인간의 지식은 그리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같은 실험을 시도했다. 표본과 질문 주제에 따라서는 기대 오차율이 2퍼센트가 아니라 15~30퍼센트까지 올라갔다.
나는 나 자신을 대상으로 이 실험을 해보았다. 답이 있을 범위를 폭넓게 잡는 용의주도함과 겸양을 발휘해 보았지만, 결과는 당연하게도 실패였다. 물론 겸손한 태도도 내 직업의식에서 나온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경향은 모든 문화, 심지어 겸양을 추구하는 문화에도 존재한다. 말레이지아 콸라룸푸르 도심지 거주자와 고대 도시 아미온, 즉 오늘날의 레바논 거주자 사이에도 이런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어제 오후 나는 런던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참석했다. 택시 운전사가 ‘빙빙 돌아가기’에는 선수였으므로 나는 그사이에 마음속으로 원고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교육에서 한 가지 즉흥 실험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참가자들에게 제1부에서 언급한 움베르코 에코의 서재 이야기를 해주며, 그 서재의 책 이 몇권이나 되는지 어림잡아 보라고 했다(총 3만 권이었음을 독자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참가자 60명 중 실제 권수를 포함한 범위를 답으로 제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이 실험에서는 오차율이 2퍼센트에서 100퍼센트로 높아진 것이다). 이번 실험 결과가 특별히 예외일 수도 있겠지만, 대상이 되는 숫자가 상식을 넘어설 때에는 오차가 극심해진다. 흥미로운 사실 은, 참가자들이 제시한 답의 범위가 아주 낮거나 아주 높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2000권에서 4000권 사이를 답으로 댔지만, 30만 권에서 60만 권 사이를 제시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답을 0에서 무한대까지 제시하면 언제나 정답이 되지 않는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면 ‘오차 조정’이라 할 수 없다. 즉 그런 답을 내놓은 사람은 아무런 정보도 전달할 수 없으며, 이런 식으로는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차라리 “나는 게임을 하기 싫습니다. 전혀 모르겠네요”라고 고백하는 편이 낫겠다.
이런 실험 결과와 정반대로, 반대 방향으로 지나쳐 가 자신의 오차율을 과대평가하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자기가 하는 말에 특히 조심스러운 사촌이 있을 수도 있고, 병적 겸손을 보여 주는 생물학 교수를 떠올릴 수도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경향은 개개인에게보다는 모집단의 평균값에 더 잘 적용된다. 부차적인 반증 사례들을 정당화하는 평균값 주위에 충분한 편차들이 존재한다. 어쨌든 이런 사람들은 소수자에 속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사람들은 집단 속에서는 두드러져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서 그다지 큰 역할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인식론적 오만은 두 가지 효과를 발휘한다. 첫째, 이것은 알고 있는 것을 과대평가하게 한다. 둘째, 실현될 수 있는 불확실한 상황이 분포할 범위를 줄임으로써(즉 알지 못하는 것의 범위를 축소시킴으로써)불확실성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Epistemic arrogance bears a double effect: we overestimate what we know, and underestimate uncertainty, by compressing the range of possible uncertain states (i.e., by reducing the space of the unknown).
이러한 오류는 단순히 지식을 추구하는 영역 밖에서도 적용된다. 당장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자. 미래에 관한 그들의 의사 결정도 말 그대로 이런 오류에 감염되어 있다. 우리 인류는 미래가 예측 밖의 길로 빠질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는 습성에 고질적으로 감염되어 있다(여기에 다른 편향들까지 가세하면 합병증이 된다). 명백한 증거가 있다. 예컨대 숱하게 일어나는 이혼을 생각해보라. 결혼 실패율이 3분의 1 혹은 2분의 1 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런 일이 자신에게 닥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니겠지” 혹은 “우리는 잘될 거야” 하는 수준이다(결혼 실패는 다른 부부들에게나 일어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The applications of this distortion extend beyond the mere pursuit of knowledge: just look into the lives of the people around you. Literally any decision pertaining to the future is likely to be infected by it. Our human race is affected by a chronic underestimation of the possibility of the future straying from the course initially envisioned (in addition to other biases that sometimes exert a compounding effect). To take an obvious example, think about how many people divorce. Almost all of them are acquainted with the statistic that between one-third and one-half of all marriages fail, something the parties involved did not forecast while tying the knot. Of course, “not us,” because “we get along so well” (as if others tying the knot got along poorly).
강조할 점은, 내가 우리가 알고 있는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아는 바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를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I remind the reader that I am not testing how much people know, but assessing the difference between what people actually know and how much they think they know. 내가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어머니께서 해주신 충고가 생각난다. “너의 능력을 믿되, 네가 확신하고 있는 것 혹은 확신한다고 느끼는 것을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어머니의 이 말씀은 성공의 지름길이 되어 주었다. 말하자면 누군가가 내 진짜 가치대로 나를 사고,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대로 나를 팔아 넘긴다면 그는 엄청난 차액을 챙기는 셈이라는 말씀이다. 내가 아무리 외적 자신감 속에 감춰 둔 내적 겸손과 불안감을 납득시키려 해도, 즉 내가 내적 성찰자라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어머니는 미심쩍은 눈치다. “제 분수는 아는 사람이라고?” 어머니는 이 원고를 쓰고 있는 내 옆에서 이렇게 농담을 날리셔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주셨다.
돌아온 검은 백조 맹목 현상
앞에서 살펴본 간단한 실험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극단점, 즉 검은 백조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뿌리 깊이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판단 기제의 작용으로 우리는 십여 년에 한 번 발생하는 사건을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사건으로 판단하게 된다. 한술 더 떠서 이런 사건을 아주 잘 꿰고 있다고 오판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오판에는 좀 더 미묘한 문제가 숨어 있다. 사실 극단점에 대한 정보가 감지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정말로 어렵지는 않다. 문제는 이 극단점을 우리가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기 쉽다는 데 있다. There are conditions under which people overestimate the unusual or some specific unusual event (say when sensational images come to their minds)-which, we have seen, is how insurance companies thrive. So my general point is that these events are very fragile to miscalculation, with a general severe underestimation mixed with an occasional severe overestimation.
어떤 경우 사람들은 예상 밖의 특별한 사건을 (예컨대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 감정이 자극되면)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The errors get worse with the degree of remoteness to the event.
보험회사가 번창하는 것도 이런 경향 덕택이다. 따라서 이런 특이한 사건들은 판단 착오에 취약하다는 것이 나의 요점이다. 판단착오는 대체로 과소평가로 나타나지만 이따금은 과대평가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사건의 희귀한 정도가 심해지면 오류도 커진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오류율은 2퍼센 트였지만, 100분의 1이나 1000분의 1, 심지어 100만 분의 1까지 가면 오류는 괴물 같은 결과를 몰고 온다. 확률이 낮아지면 인식론적 오만도 커지는 것이다.
인간의 직관적 판단에 한 가지 특질이 있다는 점을 유의하자. 즉, 충격적 사건이 거의 일어 나지 않는 평범의 왕국에서도 우리는 극단적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여전히 과소평가하며 실제보다 더 희귀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가우스적 변수에 의해서도 오류율을 과소평가한다. 우리의 직관은 평범의 왕국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평범의 왕국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수치들은 대체로 극단의 왕국에 속한다. 즉 그들의 영향이 집중되어 검은 백조 효과에 지배된다. Note here one particularity of our intuitive judgment: even if we lived in Mediocristan, in which large events are rare, we would still underestimate extremes-we would think that they are even rarer. We underestimate our error rate even with Gaussian variables. Our intuitions are sub-Mediocristani. But we do not live in Mediocristan. The numbers we are likely to estimate on a daily basis belong largely in Extremistan, i.e., they are run by concentration and subjected to Black Swans.
추측과 예견
무작위적이지 않은 변수를 추측하는 것과 무작위적인 변수를 예견하는 것 사이에 실제적인 차이는 없다.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의 침대를 거쳐 간 남자들의 숫자는 무작위적이지 않은 변수에 속한다. 여기에는 판단하는 사람의 편견이나 정보 부족이 작용할 수도 있다. 무작위적 변수란 내일의 실업률이나 내년의 주식시장과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모르지만 남은 알 수도 있는 것을)추측하는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예측하는 것은 결국 같은 것이 다.
추측과 예측 사이의 관계를 더 짚어 보기 위해 예카테리나 여제 이야기보다 따분하지만 더 중요한 사례를 찾아볼 수도 있다. 다음 세기의 인구 증가율, 20년 후의 주식시장 수익률, 사회보험 적자, 유가, 사촌 할아버지의 부동산 판매 수익, 브라질 환경문제의 상황 등이 그것이 다. 예브게니아 크라스노바의 책을 출판한 출판사 사장이라면 미래의 판매 수익을 계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위험한 물살에 뛰어들려고 한다. 미래 예견을 직업으로 한다 는 전문가들 대부분도 앞에서 살펴본 정신적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게다 가 전문적인 미래 예측가들은 일반인들보다 이런 장애에 더 영향을 받기도 한다.
정보는 지식의 장애물이다 INFORMATION IS BAD FOR KNOWLEDGE
배움과 훈련, 경험 따위가 어떻게 오히려 인식론적 오만에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앞에서 보여준 실험에서는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택시 기사 미하일을 벤치마킹한) 일반인들 보다 형편없는 점수를 기록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놀랍게도 실험 결과는 직업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이른바 예측을 전문으로 하는 사업에서 ‘정보량이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어떤 유리함을 갖는지 먼저 살펴보자.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거니와, 나는 뉴욕 투자은행에서 일하는 친구를 찾은 적이 있다. 친구 는 마이크가 장착된 무선헤드폰을 양쪽 귀에 걸쳐 쓰고는 마치 ‘우주의 지배자’라도 된 듯 들 뜬 모습으로 사무실 안을 연신 걸어 다니고 있었다. 단 22초 동안의 대화 중에도 나는 친구의 입술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집중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런 희한한 장치를 뭐 하러 쓰고 있냐고 묻자, 그는 “런던과 항상 접촉하고 있어야 하거든”이라고 대답했다. 무작위 적 결과가 지배하는 분야에 몸을 담고 있으려면, 더구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지 해야 한다면, 바쁜 티를 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바쁜 티를 내면 인과관계, 즉 자신의 노력과 그 결 과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인정받기 쉽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나 ‘리더십’이 기업 활동의 결 과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떠벌려야 하는 대기업 CEO들에게는 이런 식의 ‘부산떨기’야말로 확 실한 이득을 줄 것이다. CEO들이 수다를 떨거나 자잘한 정보를 뒤적거리는 데 소비한 시간이 어떤 유용한 결과를 기업에 가져다줬는지 입증한 연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듣지 못했다. 물론 도대체 CEO들이 기업의 성공에 얼마나 대단한 공헌을 했느냐며 담대하게 문제를 제기한 글도 손에 꼽기 힘들다.
이제 ‘정보’의 한 가지 중요한 효과에 대해 살펴보자. 바로 ‘지식의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최초의 인수 합병 거물이라 할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는 거부로 유명했을 뿐 아니라 과시욕도 대단했다. 터키 남부에서 태어나 그리스로 피난했던 그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뒤 터키 담배 수입으로 돈을 만지면서 선박 거물이 되었다. 그는 존 F. 케네디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하면서 악명을 떨쳤는데, 그 충격으로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가 파리의 아파트에 은거하여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나는 청년기에 한동안 오나시스의 생애를 연구한 적이 있는데, 그의 삶에는 흥미로운 규칙성이 있었다. 즉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일’이란 그의 삶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사무실 은 물론 집무 책상 따위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사무실이 필요 없는 거래업자였으며, 선박 제국을 운영하며 매일매일 사업을 점검해 나갔다. 그는 오로지 공책 한 권을 유일한 도구로 삼고, 여기에 온갖 정보를 다 기록해 놓았다. 그는 갑부나 유명 인사와 친교를 맺고 여성을 좇 아다니는데(그것도 여럿을 거느리며) 일생을 보냈다. 그의 기상 시간은 한낮이었다. 법률적 조언이 필요하면 새벽 두 시에 파리의 나이트클럽으로 변호사를 호출하기 일쑤였다. 워낙 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누구든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제 그의 일화의 이면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어쩌면 여기에도 ‘무작위의 장난에 현혹 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즉 오나시스의 성공과 그의 일 처리 방식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착각 말이다. 물론 타고난 매력이 힘을 발휘했을 수도 있지만, 오나시스가 실제로 능수능란한 인물 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행운아였는지 나는 알 까닭이 없다. 그러나 오나시스식 수법이란 것도 정보와 이해의 연관성에 대한 경험적인 연구라는 관점에서 철저히 검증해 볼 수는 있다. 더불어 인간의 일상사에 대한 시시콜콜한 지식을 쌓는 것은 쓸모없을 뿐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하다는 진술도 간접적으로, 하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소화전 사진을 보여 주되, 사진을 희미하게 처리해서 무엇인지 쉽게 알아볼 수 없도록 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해상도를 10단계로 나누어 조금씩 높이면서 연속적으로 보여 주었고,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해상도 단계를 5단계로 하여 연속적으로 제시했다. 이때 제시된 사진이 동일한 해상도가 될 때마다 사진을 정지시키고 참여 자들에게 이 사진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실험 결과 해상도 구분을 5단계로 처리한 사진을 본 참여자들이 소화전을 더 빨리 인식했다. 이 실험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정보를 더 많이 접한 사람들은 더 많은 가설을 생성하기 때문에 그 효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만큼 느려진다. 불필요한 요소를 더 많이 볼 뿐 아니라, 그것도 정보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의 사고방식이 매우 경직된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한번 이론을 만들어 내면 좀처럼 마음을 바꿔 생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오히려 자기 이론을 만드는 일에 늦는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우리가 불충분한 증거에 입각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자. 이때 새로운 정보가 더 정확한 것이라고 해도, 기존의 견해와 모순되는 새로운 정보가 출현하면 쉽게 수용하기 힘들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 첫째는 앞서 확인 편향의 오류, 둘째는 믿음 고수, 즉 한번 형성된 견해를 뒤집지 않으려는 경향이다.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도 일종의 소유물처럼 여기기 때문에 한번 형성된 생각과 이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The problem is that our ideas are sticky: once we produce a theory, we are not likely to change our minds-so those who delay developing their theories are better off. When you develop your opinions on the basis of weak evidence, you will have difficulty interpreting subsequent information that contradicts these opinions, even if this new information is obviously more accurate. Tow mechanisms are at play here: the confirm!ation bias that we saw in Chapter 5, and belief perseverance, the tendency not to reverse opinions you already have. Remember that we treat ideas like possessions, and it will be hard for us to part with them.
소화전 사진 실험은 1960년대에 처음 시작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되풀이 되었다. 나 역시 정보 수학 기법을 이용하여 같은 효과를 실험한 바 있다. 즉 경험적 현실에 대한 지식이 상세하게 주어질수록 피실험자들은 정보 잡음(다시 말해 이야기)을 더 많이 눈여겨보게 되며 이것을 실제 정보라고 착각한다. 우리 인간이 직감적인 것에 흔들린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따라서 주간지를 읽는 것보다 라디오 뉴스를 매시간 듣는 것이 더 나쁘다. 외부 정보가 주어지는 간격이 짧을수록 이를 걸러 내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1965년 스튜어트 오스캄프는 임상심리사들에게 환자의 상태에 대한 정보를 여러 개의 문서로 계속 제공하는 실험을 시도했다. 이때 뒤쪽 문서로 갈수록 정보의 양을 늘렸다. 그런데 정 보가 더 많이 주어진다고 해서 임상심리사들의 진단 능력이 개선되지는 않았다. 임상심리사들은 오히려 최초의 진단에 더욱 확신을 갖는 경향을 보였다. 1965년 당시 임상심리 전문가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 실험 결과는 다른 분야에도 의미가 있다.
마지막으로 심리학자 폴 슬로빅이 한 유명한 실험이 있다. 슬로빅은 마권업자들에게 지난 경마 자료 88건을 주고 그 중에서 승률 계산에 유용한 자료를 골라내게 했다. 여기에는 과거의 경마 성적에 대한 온갖 종류의 통계 분석이 들어있었다. 실험에 참여한 마권업자들에게 가장 유용한 10개의 자료를 주고 경마의 결과를 예측하게 했다. 답이 제시되면, 다시 10개의 자료를 더 준 후 다시 답을 맞추게 했다. 그런데 이처럼 정보를 점점 늘려 준다고 해서 참여자들 의 예측이 그만큼 더 정확해지지는 않았다. 정보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참여자들은 처음 내린 결정을 더 확신해 갔다. 정보가 오히려 해가 된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나는 “더 많을 수록 더 좋다”는 속설과 싸워왔다. ‘가끔은’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지식의 해악성은 이른바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잘 나타난다.
빈껍데기 전문가의 비극
이제까지 우리는 자기 지식의 한계를 파악하는 능력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지만, 그들의 권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인식론적 오만이 기술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배관공은 거의 언제나 꼬장꼬장한 에세이스트나 수학적 기법을 응용하는 증권거래사들보다 배관에 대해 더 잘 알 것이다. 탈장 전문 의사가 벨리 댄서보다 탈장에 대해 정통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확률에 대해서는 이런 전문가들도 잘못 인식하고 있을 수 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확률에 관한 한, 일반인들이 전문가들보다 좋은 점수를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뭐라 하든, 전문가들의 작업 과정에 작용하는 오류율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야 할 일이다. 이들의 작업 절차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확신을 문제 삼자는 것이다.(나는 의료계의 유명세를 믿다가 실망을 금치 못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혹시 어떤 증세 때문에 의사를 방문할 일이 있거들랑, 그것이 암이 아닐 가능성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의사의 확률 분석을 믿지 말아야 한다.)
문제를 그 심각성에 따라 다음과 같이 둘로 나눠 살피기로 하자. 첫째, 좀 가벼운 경우, 즉 (어떤) 능력이 존재한다는 오만이 그것이다. 둘째는 매우 심각한 경우로, 무능함을 포장한 (빈 껍데기 전문가의) 오만이 그것이다. 어떤 분야에서는 전문가들이 일반인들보다 아는 것이 더 적은 경우도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사람들의 견해를 듣기 위해 우리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진짜 비용을 지불해야 할 사람이 정작 누군데!
변화하는 분야와 변화하지 않는 분야 What Moves and What Does Not Move
이른바 전문가의 문제를 다룬 연구는 차고 넘친다.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점수를 매겨 본 경험적 실험도 매우 많다. 이런 연구에는 다소 당황스러운 점이 있다. 먼저 폴 밀고 로빈 도스의 연구로 대표되는 입장에서는, ‘전문가’란 거의 사기꾼 수준에 육박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순한 수식 하나로 움직이는 컴퓨터보다 나을 바가 없는데, 여기에 직관이 개입되어 그들의 눈을 가려 버린다(단순 수식 하나로 구동되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계산한 부채 대비 유동자산 비율이 신용분석가 대부분이 계산한 것보다 나았다고 한다). 다른 한편, 직관력을 발휘해서 컴퓨터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연구 결과 역시 많다. 어느 쪽이 더 정확한 것인가?
분명히 어떤 분야에는 진짜 전문가가 존재한다. 예컨대 당신이 뇌수술을 앞두고 있다면, 수술 담당자로 의학 담당 신문 기자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격 있는 뇌신경외과 의사를 선택할 것인가? 또 와튼스쿨처럼 ‘이름난’ 기관 출신의 박사가 내리는 경기 전망을 귀담아들을 것인가, 아니면 경제 담당 신문 기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경험적으로 분명하지만, 두 번째 문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방법을 아는 것(know-how)’과 ‘어떤 것을 아는 것(know what)’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There must be some disciplines with true experts. Let us ask the following questions: Would you rather have your upcoming brain surgery performed by a newspaper’s science reporter or by a certified brain surgeon? On the other hand, would you prefer to listen to an economic forecast by someone with a PhD in finance from some “prominent” institution such as the Wharton School, or by a newspaper’s business writer? While the answer to the first question is empirically obvious, the answer to the second one isn’t at all. We can already see the difference between “knowhow” and “know-what.”
그리스인들은 이런 차이를 ‘테크네(techne)’와 ‘에피스테메(episteme)’로 구별한 바 있다. 경험주의 의학파인 니코메디아의 메노도투스와 타렌툼의 헤라클레이토스도 에피스테메[지식(knowledge), 과 학(science)등으로 옮길 수 있다]를 멀리하고 테크네[기능(craft)에 가까운 개념임]를 가까이하라고 제자들에게 일갈한 바 있다.
심리학자 제임스 샨토는 전문가가 실제로 존재하는 분야와 그렇지 않은 분야를 확인해 보는 연구를 시도한 바 있다. 확인 편향의 문제를 기억하면 간단할 것이다. 즉 ‘전문가는 없다’는 명제를 입증하려면 전문가가 쓸모없는 분야 하나만 찾으면 된다. 그 반대의 경우도 같은 방식으로 입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규칙성이 있다. 전문가가 제 역할을 하는 분야가 있는 반면에, ‘기능’을 입증할 어떤 증거도 없는 분야도 있다.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전문가로 입증되는 전문가들이 있다. 가축감별사, 천문학자, 시험조종사, 토양감정사, 체스 선수, 물리학자, 수학자(경험 세계의 일이 아니라 수학적 문제를 푸는 수학자를 의미한다), 회계사, 곡물검사자, 사진판독사, (정규분포곡선 통계를 다루는) 보험분석가 등등이 그들이다. Experts who tend to be experts: livestock judges, astronomers, test pilots, soil judges, chess masters, physicists, mathematicians (when they deal with mathematical problems, not empirical ones), accountants, grain inspectors, photo interpreters, insurance analysts (dealing with bell curve-style statistics).
반대로 ‘전문가로 입증되지 않는 전문가들’도 있다. 주식중개인, 임상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대학입학처의 직원, 판사, 카운슬러, 인력 선발 담당자, 정보분석가(미 중앙정보국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높은 비용을 소모하지만 그 분석 결과는 가련할 지경이다)등이 그들이다. 내가 직접 자료를 읽으면서 판단한 사람들도 추가한다. 경제학자, 금융 예측 전문가, 금융학 교수, 정치학자, 위험 전문가, 국제결제은행의 임원들, 국제금융공학협회의 하계 임원, 개인 금융 상담사 등등. Experts who tend to be……not experts: stockbrokers, clinical psychologists, psychiatrists, collage admissions officers, court judges, councilors, personnel selectors, intelligence analyst (the CIA’s record, in spite of its costs, is pitiful), unless one takes into account some great dose of invisible prevention. I would add these results from my own examination of the literature: economists, financial forecasters, finance professors, political scientists, “risk experts,”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staff, august members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Financial Engineers, and personal financial advisers.
간단히 말해, 변화하는 분야, 그래서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는 대체로 전문가란 나올 수 없다. 반대로 변화하지 않는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전문가가 나올 수 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미래를 다루는 분야, 그리하여 결코 되풀이될 수 없는 과거를 연구하고 있는 분야는 전문가 문제를 가질 수밖에 없다(사회경제적 분야가 아니라 단기간의 물리적 과정을 포함 하는 기상이나 산업 분야에서는 예외이지만). Simply, things that move, and therefore require knowledge, do not usually have experts, while things that don’t move seem to have some experts. In other words, professions that deal with the future and base their studies on the nonrepeatable past have an expert problem (with the exception of the weather and businesses involving short-term physical processes, not socioeconomic ones).
여기서 나는 미래의 일을 다루는 사람들이 모두 쓸모 없는 정보만 내놓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신문이 예견하는 극장 개관 시간은 잘 들어맞는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대체로 미래를 다루는 사람들은 뚜렷하게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표현하자면, 변화하는 것은 곧 검은 백조 성향을 갖고 있다. ‘땅굴파기’를 할 필요가 있는 전문가들은 좁은 곳에 시야를 한정시키기 마련이다. 땅굴 파기가 쓸모 있는 분야에서는 검은 백조가 나타나기 어렵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역량이 잘 발휘된다. Another way to see it is that things that move are often Black Swan-prone. Experts are narrowly focused persons who need to “tunnel.” In situations where tunneling is safe, because Black Swans are not consequential, the expert will do well.
빼어난 통찰력을 지닌 진화심리학자 로버트 트라이버스는 또 다른 풀이를 내놓은 바 있다 (그는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면서 떠올린 아이디어 덕분에 찰스 다윈 이래 가장 영향력 있는 진화사상가가 되었다). 트라이버스는 전문가 문제를 자기기만의 문제로 보았다. 조상 전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분야, 예컨대 약탈과 같은 일에서는 힘의 균형을 파악하면 결과 예측이 쉽다. 인간과 침팬지는 상대와 자신 중 어느 편이 유리한 위치에 있는지 즉각 알아차릴 줄 알며, 공격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래서 물건과 짝짓기 상대자를 손에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적은 비용으로도 분석해 낸다. 이렇게 해서 일단 습격이 시작되면 새로운 정보는 무시 하게 만드는 착각 상태가 작동한다. 이것이 전투 중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다. 한편 소규모 습격이 아닌 대규모 전쟁이란 인간의 천성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지속될지를 잘못 판단하고, 그에 대응하는 우리의 힘은 과대평가한다. 레바논 전쟁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지를 그곳 사람들이 과소평가했던 것을 상기 하자.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사람들도 전쟁이 끝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그 밖의 모든 현대전에서 비슷한 양상이 되풀이되어왔다.
이와 같은 자기기만을 무시해선 안 된다. 전문가의 문제란, 자신들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의 지식 수준이 높다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올바른 지식을 방해하는 과정이 똑같이 작용해서 자신의 지식 수준에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You cannot ignore self-delusion. The problem with experts is that they do not know what they do not know. Lack of knowledge and delusion about the quality of your knowledge come together-the same process that makes you know less also makes you satisfied with your knowledge.
이제까지 예견의 한계를 살펴보았다. 이제 그다음으로 예견의 정확성, 즉 수치 자체를 예측 하는 능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최후에 웃는 자는 누구인가
금융거래 기록을 통해서도 예견의 오류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나와 같은 금융시장 분석가는 경기와 금융 전망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갖고 있는데, 여기에는 거시경제지표에 관한 일반 자료에서부터 텔레비전 ‘스타 전문가’와 ‘기관’ 전문가들의 예측치나 시장 주문 자료까지 망라되어 있다.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컴퓨터로 처리할 수도 있으니 경험론자에게는 더할 바 없이 귀중한 보고다. 만약 내가 기자라면, 혹은 오 하느님 말려 주소서, 역사학자라면, 나는 이 구두 논의의 예측 효율성을 검증하기 위해 꽤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물론 구두로 이루 어진 논평을 컴퓨터로 작업할 수는 없다. 적어도 쉽지는 않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순진하게도 온갖 변수들에 대한 예측치를 쏟아 내고 경제학자들과 경제 변수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한 덕분에 우리는 어떤 경제학자가 다른 경제학자보다 나은지 어떤지(결과론적인 차이는 없다), 그들이 좀 더 유능하게 다룰 수 있는 어떤 변수들이 있는지(아쉽게도 의미 있는 것은 없다)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증권업계 사람들의 예견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내가 전업 거래자로 일주일에 이삼 일 정도씩 오전 8시 30분부터 전일 근무하던 시절에 내 책상의 스크린에는 미국 상무부, 재무부, 무역부등 권위를 자랑하는 당국에서 발표한 경제 수치가 쉴 새 없이 뜨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숫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알아내려고 노력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나는 다만 사람들이 흥분에 빠져 이 숫자들을 화 제로 삼아 미래에 대한 온갖 억측으로 이야기를 벌일 때를 제외하고는 이 숫자들에 신경을 쓰 지 않았다. 이들은 소비자물가지수, 비농업부문고용률(피고용자 숫자의 변동), 경기선행지수, 내구재판매동향[Sales of Durable Goods, 금융거래자들은 발음을 비틀어서 ‘쉬운 여자 (doable girls)’라 부르기도 한다], 국내총생산(그나마 가장 중요한 수치다)등을 열을 올려 가며 입에 올리기 일쑤였다.
통계 장사꾼들은 J. P. 모건, 모건 스탠리 등 휘황찬란한 조직을 위해 일한다는 ‘선도적인 경 제학자’들의 경기 예측을 들려주기도 한다. 이런 경제학자들은 큰 소리로 설득력 있게 이론을 세우며 떠들어댄다. 이들 중 대부분이 1000만 달러대의 연봉에 유명세를 자랑하며, 숫자와 예측 놀음으로 여념이 없는 연구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런 유명 인사들은 숫자를 내놓는 것이 일이지만, 얄궂게도 이 숫자들이 곧 이들의 능력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증거로 작용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금융기관마다 매년 ‘200X년 대예측’ 이라 불리는 책자를 발행한다는 데에 있다. 물론 이 책자의 작성자들은 자신들이 공표한 뒤에 그 지난 예측치가 어떻게 빗나갔는지는 거론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간단한 테스트도 하지 않고 이들의 주장을 돈을 주고 사는 사람들이 더 어리석을지도 모른다. 아주 손쉬운 테스트이지만 그것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본적인 한 가지 경험적 실험은 이 유명 경제학자들과 가상의 택시 기사를 비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견해는 특별히 없이 새로 발표된 수치를 내년 예측치로 믿는 증권거래사를 상정해 보는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유 명 경제학자와 우리가 상상해 낸 거래인의 오류율을 비교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소문에 휘둘릴 때에는 이런 테스트를 할 필요를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사건이란 알고 보면 거의 언제나 기이하다 Events Are Outlandish
예견이라는 문제에는 좀 더 미묘한 면이 있다. 그것은 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평범의 왕국이 아니라 극단의 왕국이라는 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평범한 일은 쉽게 예측해 내지만 불규칙적인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예측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The problem with prediction is a little more subtle. It comes mainly from the fact that we are living in Extremistan, not Mediocristan. Our predictors may be good at predicting the ordinary, but not the irregular, and this is where they ultimately fail.
예컨대 이자율 변동을 단 한 번만 잘못 예측하면 그 뒤의 예측치는 모조리 쓸모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회복할 수 없는 낙인이 찍히고 만다. 실제로 2000~2001년 사이에 이자율이 6퍼센트 에서 1퍼센트로 떨어지는 일이 생겨났다. 옳은 예측치를 얼마나 자주 내느냐가 아니라 누적된 오류율이 얼마나 크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누적 오류율은 주로 커다란 사건, 혹은 커다란 이변과 기회에 따라 결정된다. 경제, 금융, 정치 분야의 예측 전문가들은 그것을 놓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고객들에게 뭔가 기이한 것을 입에 올리는 것을 수치스러워한다. 하지만 사건이란 알고 보면 거의 언제나 기이하다. 게 다가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경제 분야의 예측가들은 실제 수치와는 엉뚱하게 다른 값으로, 비슷비슷한 전망을 내놓는 경향이 있다. 아무도 저 홀로 다른 수치를 내놓기를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실험 자료는 상업적 · 오락적 용도를 위한 것이며 책으로 내기 위한 공식 적인 자료가 아니었으므로, 이제 논문 발표라는 고역을 힘겹게 이겨 낸 좀 더 품격 있는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를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이들 전문가의 유용성을 조사해 보려는 자기반성이 지금껏 거의 없었다는 데 놀랐다. 다음과 같은 세 분야에 대한 정식 연구는 어느 정도는-많지 는 않지만-이루어졌다. 증권분석, 정치학, 경제학 등이 그것이다. 앞으로 몇 년 안에 더 많은 연구 결과가 나오겠지만, 혹시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좋은 연구를 발표해도 동료들에게 낙인찍힐 수 있으니 말이다. 정치학, 금융학, 경제학 등의 분야에서 이제까지 발표된 논문은 수 백만 편이지만, 그 중에서 인간의 예견력을 다룬 것은 손으로 꼽기도 힘들 지경이다.
끼리끼리 모이기
일단의 연구자들이 애널리스트들의 실적과 태도를 조사했는데, 특히 이 애널리스트들의 인식론적 오만함을 고려했을 때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다. 애널리스트들과 기상예보관들을 비교 한 타데우즈 티츠카와 피요트르 질론카는 연구에서 애널리스트들은 실력에 대한 자부심은 기 상예보관들보다 훨씬 높았지만 실제 예측 능력은 오히려 뒤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예측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애널리스트들의 자기 평가는 오차를 떨어뜨리지 못했다.
지난 6월 나는 파리의 장 필립 부쇼를 만난 적이 있는데, 부쇼의 연구를 다룬 글이 제대로 나온 적이 없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웠다. 부쇼는 내 나이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소년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는 물리학의 아름다움이 준 선물이라고 농담 섞어 말해 주기도 했다. 그는 물리학자는 아니었지만 계량과학자였다. 그의 연구는 통계물리학의 방법을 경제 변수 분석에 응용하는 것으로, 1950년 베누아 만델브로에 의해 시작된 분야였다. 이 분야는 평범의 왕국식의 수학적 계산을 채택하지 않기 때문에 좀 더 진실에 관심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분야의 연구자들은 경제학자나 경영대학원의 금융 전문가들과 철저히 담을 쌓는 대신 물리학과 수학에서 자리를 잡거나, 극히 드문 경우이 긴 하지만 무역상사에서 일하기도 한다.(무역상사가 정말 필요해서 경제학자를 고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어리숙한’ 고객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들러리로 뽑을 뿐이다.) 이들 중 일부는 ‘소박한’ 것들에 적대감을 갖는 사회학 분야에 자리를 잡기도 한다. 명품 양복에 현기증 나는 이론으로 무장한 경제학자들과 달리 이 분야의 연구자들은 정규분포곡선에 의존하는 대신 자료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경험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부쇼는 여름 학기 인턴 연구원이 자신의 지도로 완성하여 학술지 게재가 확정된 연구논문을 내게 보여 주었는데, 나는 이 논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논문은 애널리스트 2000명이 수행한 경기 예측을 파고들었다. 연구에 따르면 거래중개기관의 분석가들은 아무것도 예측해 낸 것이 없었다. 경험 없는 누군가가 한 기간의 수치를 기준 삼아 다음 기간을 예측해 본다 하더라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애널리스트들은 기업의 주문 현황, 체결이 유력한 계약들, 예정된 지출 계획을 사전 정보로 입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유리한 정보를 갖고 있는 전문가들이라면 단순히 이전 수치에만 의존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문외한 보다는 훨씬 우수한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심각한 사실이 또 있다. 예측자들의 오류는 그들 개개인 사이의 편 차보다 컸는데, 이는 예측자들이 내놓은 예측값이 비슷한 수치를 중심으로 몰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예측자들 사이의 편차가 실제 오류치보다도 더 커야 하는 것 이다. 오류가 이토록 심각하다면 (체중 감소, 엉뚱한 행동, 심각한 알코올 중독 등 신체적 스트레스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할 텐데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 여기에는 또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심리학자 필립 테틀록의 연구를 살펴보기로 하자.
내가 ‘거의’ 옳았다니까 I was “almost” right.
테틀록은 정치학과 경제학 분야 ‘전문가’들의 업무를 연구했다. 그는 다양한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5년 정도의) 일정한 기간 동안 일어날 다수의 정치, 경제, 군사 사건의 가능성을 판단 하도록 하는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해서 300명의 전문가들에게서 2만 7000개의 예측치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 중 4분의 1이 경제학자들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분석 결과 오류율은 예상보다 몇 배를 뛰어넘었다. 테틀록의 연구는 ‘전문가 문제’를 잘 보여 준다. 박사학위 소지자 든 학부 졸업자든 결과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빼어난 저서를 내놓은 교수들도 신문기자보 다 나을 것이 없었다. 테틀록이 분석을 통해 얻은 규칙성은 하나였다. 명성이 오히려 예측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명성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예측력이 떨어졌다.
테틀록의 연구는 전문가들의 무능함을 입증하려 하기보다는(분명 그러한 내용이 드러나 있긴 하지만), 어째서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무능함을 깨닫지 못하는지, 즉 어떻게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려는 데 더 초점을 두고 진행된 것이다. 이들의 무능함에는 일정한 논리가 내재해 있었는데, 대부분 신념이라는 형식을 취하거나 자부심이라는 방어기제로 나타났다. 테틀록의 연구는 이들이 어떻게 사후 합리화를 해내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분석하고 있 다. But Tetlock’s focus was not so much to show the real competence of experts (although the study was quite convincing with respect to that) as to investigate why the experts did not realize that they were not so good at their own business, in other words, how they spun their stories. There seemed to be a logic to such incompetence, mostly in the form of belief defense, or the protection of self-esteem. He therefore dug further into the mechanisms by which his subjects generated ex post explanations
신념이라는 것이 어떻게 현실 인식을 방해하는지, 그리고 전문가들의 예측에 포함된 맹점을 어떻게 일반화하여 설명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들이 어떤 변명을 늘어놓는지 들 어 보자. I will leave aside how one’s ideological commitments influence one’s perception and address the more general aspects of this blind spot toward one’s own predictions
“그건 전혀 다른 게임이었다니까요.” 어떤 전문가가 소비에트연방의 급속한 쇠락을 예견하지 못했다고 하자(실제로 어떤 사회과학자도 이를 예견하지 못했다). 가장 간단한 변명은 이것이다. “나는 소련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정통한 상태이지만 러시아 사람 들이 으레 그렇듯이 가장 중요한 정보를 숨겨 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경제 정보를 충분히 입수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면 소련 체제의 몰락을 분명히 내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전문가인 나의 능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다.” You tell yourself that you were playing a different game. Let’s say you failed to predict the weakening and precipitous fall of the Soviet Union (which no social scientist saw coming). It is easy to claim they you were excellent at understanding the political workings of the Soviet Union, but that these Russians, being exceedingly Russian, were skilled at hiding from you crucial economic elements. Had you been in possession of such economic intelligence, you would certainly have been able to predict the demise of the Soviet regime. It is not your skills that are to blame.
이런 식이라면, 미국의 지난 대통령 선거 에서 앨 고어가 조지 W. 부시에게 압승을 거둘 것이라고 예견했던 사람도 똑같은 식으로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경제가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몰랐다는 식으로 말이다.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이보시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닌데 선거가 경제판이 되었으니, 난들 어쩌겠소?”
“극단점이 터져 나오는 통에…” 아니면, 극단점이 터져 나왔다고 말하는 방법도 있다. 나같은 과학자가 다루는 영역 밖에서 사건이 발생했다고 말이다. 시스템 밖의 사건은 예견할 수 없으니 전문가의 책임은 아니게 된다. You invoke the outlier. Something happened that was outside the system, outside the scope of your science. Given that it was not predictable, you are not to blame. It was a Black Swan and you are not supposed to predict Black Swans
검은 백조가 출현했지만, 검은 백조는 우리 같은 전문가가 예견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말이다. NNT(나심 니코라스 탈레브)가 말하길 검은 백조는 예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하지만 NNT라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러니까 왜 예견에 의존하는 것이냐고). 이런 ‘외인성(外因性)’ 사건은 우리가 다루는 과학 바깥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이 천 년에 한 번 찾아오는 홍수처럼 극히 낮은 확률에 따른 사건이라고 변명 할 수도 있겠다. 그저 우리가 운이 없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렇게 게임판을 축소시키고 주어진 조건에만 자신의 능력을 한정시키는 변명은 헛똑똑이들이 사회적 현상을 수학적으로 읽지 못했을 때 내놓는 단골메뉴다. 분석틀은 옳았고, 잘 작동하고 있었다. 다만 상황 자체가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 Such events are “exogenous,” coming from outside your science. Or maybe it was an event of very, very low probability, a thousand-year flood, and we were unlucky to be exposed to it. But next time, it will not happen. This focus on the narrow game and linking one’s performance to a given scrip it how the nerds explain the failures of mathematical methods in society. The model was right, it worked well, but the game turned out to be a different one than anticipated.
“거의 옳았었다”는 방어 전략. 이미 사태가 끝난 뒤에는 정보 분석틀이나 평가 수치가 개선 되기 때문에, 자신의 예측이 거의 비슷했었다고 느끼기 십상이다. The “almost right” defense. Retrospectively, with the benefit of a revision of values and an informational framework, it is easy to feel that it was a close.
테틀록에 따르면 “1988년 까지만 해도 구소련 관측통들은 공산당이 1993년이나 1998년까지는 권좌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991년 크렘린의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이 관측통들은 고르바초프 정권이 거의 전복 직전에 처했다고 믿었다. 이들은 쿠데타 모의자들이 좀 더 냉철 히 판단하고 결단력을 발휘했다면, 그래서 계엄령에 도전하는 시민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군장교들이 이행했더라면, 혹은 옐친이 그렇게 과감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쿠데타가 결국 성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좀 더 일반적인 맹점이 숨어 있다. 이 ‘전문가’들이 편벽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예측이 옳게 나타났을 때에는 그것이 자신들의 식견과 전문적 능력 덕택이라고 자부하지만, 예측이 틀렸을 때에는 그것이 워낙 특이한 경우라서 자신들이 비난 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자신들이 틀렸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온갖 요설을 늘어놓는 경우도 있다. 자신들의 식견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습성은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자존감을 보호하기 위한 기제라고 할 수 있다. These “experts” were lopsided: on the occasions when they were right, they attributed it to their own depth of understand and expertise; when wrong, it was either the situation that was to blame, since it was unusual, or, worse, they did not recognize that they were wrong and spun stories around it. They found it difficult to accept that their grasp was a little short. But this attribute is universal to all our activities: there is something in us designed to protect our self-esteem.
우리 인간은 임의적인 사건을 받아들이는 능력의 불균형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성공은 자기 덕분이며 실패는 통제 범위 바깥에 있는 외부적 사건, 즉 무작위성 탓이라는 불균형이 그 것이다. 좋은 일에는 공을 다투지만 나쁜 일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느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든 남보다 자기가 낫다고 착각한다. We humans are the victims of an asymmetry in the perception of random events. We attribute our successes to our skills, and our failures to external events outside our control, namely to randomness. We fell responsible for the good stuff, but not for the bad. This causes us to think that we are better than others at whatever we do for a living.
예컨대 스웨덴 사람들의 94퍼센트는 자신이 스웨덴에서 운전 능력이 뛰어난 상위 50퍼센트에 속한다고 믿는다. 프랑스 사람 중 84퍼센트는 프랑스에서 침실 능력이 뛰어난 상위 50퍼센트에 자신이 속한다고 믿는다.
이런 불균형의 또 다른 효과는 우리가 그러한 불균형을 인지하지 못하는 까닭에 자신이 남과 달리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혼하는 과정에서 미래에 대해 비현실 적인 기대를 하곤 한다고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또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영원히 정착하리 라는 기대를 안고 부동산에 자신들을 가두고 헛된 미래를 꿈꾸는지 생각해 보라. 그들은 한곳에 정주해 사는 삶이 참으로 고역임을 알지 못한다. The other effect of this asymmetry is that we feel a little unique, unlike others, for whom we do not perceive such an asymmetry. I have mentioned the unrealistic expectations about the future on the part of people in the process of tying the knot. Also consider the number of families who tunnel on their future, locking themselves into hard-to-flip real estate thinking they are going to live there permanently, not realizing that the general track record for sedentary living is dire.
부동산 중개업자조차 독일제 고급 스포츠 카를 몰고 돌아다니지 않던가? 우리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목적인 존재다. 별안간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마치 그런 일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여기곤 하지 않는가. 마약 중독자들도 처음에는 그리 오래 머물러 있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그 게 임에 발을 들여놓지 않던가.
테틀록의 실험은 또 하나의 교훈을 준다. 이 실험에 따르면, 내가 앞서 언급한 대로, 대학의 유명 교수나 ‘유명 언론의 기고가’들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뉴욕타임스≫를 구독하는 보통 사람이나 평범한 기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특정 분야만 파고든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에 관한 테스트에서 낙제를 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고슴도치 유형과 여우 유형. 테틀록은 이사야 벌린의 지적에서 영감을 얻어, 예측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고슴도치 유형과 여우 유형의 두 부류로 나누었다. 이솝 우화에서 고슴도치는 딱 한 가지를 알지만 여우는 여러 가지를 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상황에 따라 이 두 유형이 발휘되어야 한다. 예측이 실패하는 경우의 상당수는 발생 가능성이 희박한 대사건 한 가지, 즉 큰 검은 백조 한 마리를 기다리기만 하는 고슴도치 유형에게 일어난다. 고슴도치 유형의 사람은 특이하고 가능성이 낮은 사건에만 집착한다. 이 유형은 사건이 터진 뒤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 내서 우리로 하여금 그 결과만을 맹목적으로 믿게 만든다. The hedgehog and the fox. Tetlock distinguishes between two types of predictors, the hedgehog and the fox, according to a distinction promoted by the essayist Isaiah Berlin. As in Aesop’s fable, the hedgehog knows one thing, the fox knows many things-these are the adaptable types you need in daily life. Many of the prediction failures come from hedgehogs who are mentally married to a single big Black Swan event, a big bet that is not likely to play out. The hedgehog is someone focusing on a single, improbable, and consequential event, falling for the narrative fallacy that makes us so blinded by one single outcome that we cannot imagine others.
이야기 짓기의 오류를 떠올린다면 이런 고슴도치 유형의 문제점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있다. 유명 인물 중에 이런 유형이 많다. 그러므로 유명 인사들의 평균 예측 실력은 다른 예측자들보다 떨어진다.
나는 오랫동안 언론인들을 피해 왔다. 이들은 나의 검은 백조 이론이 거론 될 때마다 앞으로 발생할 충격적 사건의 목록을 제시해 달라고 보채 왔다. 그들은 내가 검은 백조를 예견해 줄 수 있기를 원한다. 나는 앞서 출판한 책≪능력과 운의 절묘한 조화≫에서 내 사무실 빌딩이 비행기 테러를 당할 가능성을 논한 바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책이 출판된지 일주일 후 에 9?11 사건이 터졌다. 이러니 “어떻게 그 사건을 예견했느냐”는 질문을 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나는 9?11을 예견하지 않았다. 그 사건은 확률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나는 신탁의 집행자가 아니다! 최근에 날아온 어떤 이메일에서는 앞으로 발생할 검은 백조 사건 10개를 알려 달라는 문의도 있었다. 이처럼 대부분의 언론인들은 ‘전문성의 오류’, ‘이야기 짓기의 오류,’ ‘예견의 문제점’에 대한 나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세간의 기대와 정반대로 나는 고슴도치 유형이 되라고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마음이 열려 있는 여우 유형을 권한다. 역사란 극히 낮은 확률의 사건이 지배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사건일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다.
현실적인 분석?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나는 경제학 저널에서 테틀록만큼 철저하게 연구한 정식 논문을 본 적이 없다. 경제학자들이 신뢰할 만한 예측 능력을 갖고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하는 논문도 접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경제학을 다룬 기고 논문이나 발표문이라면 모두 섭렵하려 애썼다. 내가 검토한 자료들에 서는 경제학계 사람들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확고한 증거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경제학자들에게 약간 나은 점이 있다면 기껏해야 무작위 추측보다는 근소하게 나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는 정도였으니, 심각한 과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학자들의 방법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가장 흥미롭게 보여 주는 것이라면 스피로스 마크리다키스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는 계량경제학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예측가들 사이의 경쟁을 다루는 데 경력의 일부를 쏟아 부은 연구자다. 여기서 계량경제학 이란 경제 이론에 통계적 분석 방법을 결합한 접근법을 말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마크리다 키스의 연구는 경제 예측가들에게 현실의 일을 예측하게 하고 그 정확도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미셸 히본의 조력을 받아 ‘M-Competition’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이 개념은 1999년에 가장 최근의 것이자 세 번째 버전인 M3로 발전했다. 마크리다키스와 히본은 다음과 같이 애석한 결론을 내렸다. “통계학을 결합시키거나 정교하게 응용한 방법이라 해서 이보다 단순한 방법보다 반드시 더 정확한 예측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증권거래사로 일하던 시기에 위와 똑같은 경험을 한 바 있다. 묵직한 억양의 외국 학자들을 초빙해서 밤새 컴퓨터로 복잡한 수학적 작업을 시킨다 해도, 택시 기사들이 간단한 방법으로 되는 대로 내놓는 예측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자기식의 방법론이 통하는 극히 희귀한 사건에만 시야를 좁게 한정시키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결국 훨씬 많은 경우에서는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부탁하러 올 때면 나는 항상 이렇게 못을 박곤 한다. “아이구, 저는 레바논 아미운 출신의 단순하고 평범한 사내일 뿐입니다. 저는 컴퓨터를 돌려 분석해 봐도 아미운 출신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예측을 내놓지는 못합니다. 딱히 뛰어나지 않은데도 왜 전문가로 귀중한 대접을 받는지 저도 알쏭달쏭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은 자기분야에 관해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는 대신, 아미운의 역사와 지정학적 가치가 어떻고 하는 말을 늘어놓기 일쑤다. 여기에서도 이야기 짓기의 오류가 작동한다. 물로 신문에서는 러시아어 억양의 ‘학자’들을 방정식을 섞어 말하면서도 차창 앞을 보면 어지럽다며 후시경만 들여다보는 참담한 인간들로 묘사하고 있다. 계량경제학자인 로버트 엥겔은 됨됨이가 진솔한 사람이지만 GARCH라는 이름의 복잡한 통계 기법을 고안해 낸 공 로로 노벨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 기법이 실생활에서도 통용되는지 검증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보다 훨씬 단순하고 소박한 방법이 실생활에 더 통용되지만, 그것들이 여러분을 스톡홀름으로 데려다주지는 않는다. 요컨대 노벨상에도 전문가 문제가 있다.
복잡한 기법의 부적절함은 모든 기법에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게임 이론을 현실에 응용 한다는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행해진 연구가 있다. 영화 ≪뷰티플 마인드A Beautiful Mind≫ 에서 정신분열증을 앓는 주인공의 실제 인물로 유명한 존 내시도 게임 이론 분야의 대표적 인물이다. 게임 이론은 지적인 호소력도 있고 언론의 관심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슬프게도 이 이론의 실천가들은 대학 학부생들보다 예측을 잘 해내지 못했다.
더 심각한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마크리다키스와 히본은 이론통계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를 무시하고 있다는 확고한 경험적 증거를 얻게 되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경험적 증명에 대해 이론통계학자들은 충격적일 정도로 적개심을 나타냈다. 마크리다키스와 히본에 따르면 “(통계 학자들은) 현실을 정밀하게 예견할 수 있도록 이론 틀을 개선하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자신들의 기존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 데에만 노력을 기울였다.”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접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내린 예측에 따라 정책을 펼 경우 실제 경제 현실은 그 예측이 들어맞지 않는 방향으로 변동한다(이것은 경제학자 로버트 루카스의 이름을 따서 ‘루카스 비판’이라 불린다). 예컨대 경제학자들이 인플레이션을 예측하자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행동에 나서서 인플레이션을 낮추었다고 하자. 자, 이렇게 되면 경제라는 분야에서는 예측의 정밀도를 측정하기 어려워진다.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만 그것이 경제학자들이 예측에 실패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계는 경제학보다 너무나 복 잡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어떤 극단점을 예견하지 못하면 경제학의 판단 기준을 넘어서는 천재지변이나 혁명적 상황을 들먹인다. 그들은 경제학은 기상학이나 정치학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기상이나 정치 분야의 원리를 경제학에 응용할 엄두를 내지도 못하며, 경제학이 고립된 학문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참으로 경제학이야말로 가장 고립된 학문이 되었다. 다른 분야에서 가장 적게 인용되는 분야가 바로 경제학인 것이다! 오늘날 니체식으로 말해서, 속물 학자가 가장 많이 득시글거리는 분야가 아마도 경제학일 것이다. 폭넓은 지식도 없고 천부의 호기심도 잃어버린 학문이란 마음을 폐쇄적으로 만들어 파편적 분과만 만들어 낼 뿐이다.
피치 못할 사정만 아니었다면 “OTHER THAN THAT,” IT WAS OKAY
예견력 논의의 출발점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이야기였다. 이제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또 다른 불변율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것은 미래의 일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구조적 오류로서, 인간의 본성과 세계의 복잡성 혹은 조직의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사회 조직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또 외부의 제도에게 자신들이 ‘미래의 청사 진’을 갖고 있는 듯 보여야 한다.
그러나 ‘땅굴 파기’, 즉 계획 바깥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무시하는 성향때문에 우리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곤 한다.
전형적인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논픽션 작가 조는 앞으로 2년 후에 원고를 인도한다는 집필 계약을 맺는다. 책의 주제는 비교적 쉬운 것이다. 즉 살만 루시디의 권위 있는 전기를 집필한다는 것이다. 조는 이미 루시디의 전기 집필을 위해서 방대한 자료를 준비해 놓은 상태다. 루시디의 전 애인까지 다 조사해 놓은 조는 앞으로 있을 인터뷰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다. 그런데 2년에서 3개월을 앞둔 날 조는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작업이 약간 늦어진다고 알렸다. 출판사는 원고를 늦게 넘기는 작가에 이력이 난 상태라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고의 주제에 대해 대중의 관심이 예기치 않게 식고 있기 때문에 출판사의 태도가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루시디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높겠지만 주목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출판사의 판단이었다. 아마도 이란인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루시디를 살해하는 일에 흥미를 잃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전기 작가가 원고 완성 시점이 얼마나 주요한지를 과소평가한 원인을 살펴보자. 전기 작가는 자기 스케줄을 스스로 계획했지만, 결국 땅굴파기를 한 셈이다. 어떤 ‘외부’ 사건이 발생해서 자기 원고의 앞길을 막으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외부 사건에는 2001년 9월 11일의 비극도 포함된다. 이 사건으로 그는 몇 개월을 까먹었다. 그리고 투병 중인 어머니를 간호하느라 미네소타에 다녀오는 바람에 (어머니는 회복되었지만) 시간을 더 지체했고, 덧붙여서 파혼당하는 바람에(루시디의 전 애인과의 인터뷰는 약속대로 이루어졌지만) 또 몇 개월을 지체했다. ‘그 밖에는’ 모두 계획대로 밀고 나가긴 했다. 작업 자체야 일정표대로 이루 어지지 않았는가. 그는 책임을 인정할 수 없었다.†
“돌발적 사건은 계획을 한쪽 방향으로 변경시킨다.” 건축업자, 하청업자, 원고를 쓰는 사람들의 실적을 생각해 보자. 돌발적 사건은 언제나 한쪽 방향으로만 사태를 몰고 간다. 즉 비용을 상승시키고 시간을 더 잡아먹는 것이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비용을 줄이고 공기가 단축되는 반대 경우가 일어나는 것은 극히 예외일 뿐이다. 이런 경우는 정말로 예외에 불과하다.
계획을 잡을 때 나타나는 이런 오류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것인지 반복실험을 통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계획된 숙제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어떻게 예측하는지 분석한 실험이 있다. 어떤 연구에서는 표본을 선정하여 긍정적 집단과 부정적 집단으로 나누었다. 긍정적 집단에 속한 학생들은 26일 안에 해내겠다고 약속했고, 부정적 집단의 학생들은 47일을 예상했다. 실제로 숙제를 완성한 평균 일수는 56일이었다.
논픽션 작가 조의 사례는 아주 심각한 경우라고는 할 수 없다. 내가 이 사례를 선택한 이유는 이것이 흔히 되풀이되는 일상적인 과제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제에서 범하는 오류 는 그런대로 참을 만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심각한 과업의 경우, 예컨대 군사적 공격이나 전면전, 혹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과업에서는 오류가 엄청난 위험으로 폭발 한다. 사실, 과업이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일수록 예측 능력을 학습하게 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되풀이되지 않는 일도 많다.
완성일을 빠르게 제시할 경우에 대한 보상을 주는 것은 어떨까? 원고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여기에 응하는 작가가 있을 수 있으며, 계약금으로 우선 과테말라의 안티구아 여행을 다녀 오는 데 골몰하는 건설업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계획의 문제 자체는 존재한다. 주어진 과제에 소요되는 시간을 과소평가해서 얻어진 인센티브가 없는 경우에조차, 계획의 문제는 존재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이라는 종은 시야가 협소하기 때 문에 예기치 못한 돌발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계획 속에 있는 문제에만 골몰하기 때문에 계획 바깥의 불확실성, 즉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것,’ 다시 말해 ‘아직 읽지 않은 책 속의 내용’은 염두에 두지 못한다. But the planning problem exists even where there is no incentive to underestimate the duration (or the costs) of the task. As I said earlier, we are too narrow-minded a species to consider the possibility of events straying from our mental projections, but furthermore, we are too focused on matters internal to the project to take into account external uncertainty, the “unknown unknown,” so to speak, the contents of the unread books.
헛똑똑이 효과도 있다. 이것은 분석틀 바깥의 위험을 머릿속에서 제거해 버리거나 자신이 아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때 일어난다. 자기의 틀 안에서만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일이 지체되거나 비용이 과다 지출되는 것은 대부분 당초 계획에 고려되지 않았던 요인들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There is also the nerd effect, which stems from the mental elimination of off-model risks, of focusing on that you know. You view the world from within a model. Consider that most delays and cost overruns arise from unexpected elements that did not enter into the plan-that is,
예컨대 파업, 전력 부족, 사고, 기상 악화, 혹은 화성인이 침공한다는 소문 따위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일을 망치는 작은 검은 백조들인 셈인데 애초에 고려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처음에는 너무 추상적인 가능성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양상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없고 명료하게 분석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계획을 수입할 수는 없다. 우리가 미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런 한계점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면 된다. 다만 용기만 있으면 된다.
기술의 아름다움, 혹은 엑셀 스프레드시트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에는, 그러니까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예측이란 모호하고 질적 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계획을 항상 염두에 두도록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했기에 이것을 미래까지 밀고 나가는 일에는 대단한 노고가 필요했다. 연필, 지우개, 종이 뭉치, 커다 란 휴지통이 필수품이었다. 지루하고 느리게 진행되는 일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회계사도 고역을 치러야 했다. 요컨대 계획 혹은 기획이란 수고스럽고, 힘들며, 끝없는 의심으로 가득한 일이었다. The activity of projecting, in short, was effortful, undesirable, and marred with self-doubt.
그러나 스프레드시트가 고안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컴퓨터에 능숙한 손으로 엑셀이라는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을 다루면 ‘판매계획서’처럼 무한히 늘어나는 자료도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단 서류 한 장이나 컴퓨터 모니터, 혹은 이보다는 못해도 파워포인 트 슬라이드로 제시되는 순간 그 계획안은 자기 생명을 얻게 된다. 계획안은 종래의 모호함과 추상성을 벗어던지고 철학자들이 말하는 구체성을 얻음으로써 손에 잡힐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계획이란 이제 손에 잡히는 대상물로 새 생명을 얻는다.
내 친구 브라이언 힌치클리프는 동네 체육관에서 함께 운동하다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해 주었다. 수많은 예측 전문가들이 (그들의 가설에 파고드는 것에 불과한) 장기 전망을 의기양양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스프레트시트 프로그램에서 셀을 잘라 내고 붙여 넣는 일이 쉽기 때문에 미래의 일을 계획할 수 있게 된 덕택 아닐까? 지식을 제대로 활용할 줄도 모르면서 강력한 컴퓨터 프로그램 덕택에 우리는 소련의 계획가들보다 훨씬 고약한 계획가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여느 장사꾼이 그렇듯이 브라이언은 번뜩이는 통찰력의 소유자이며 때때로 잔혹 하리만치 냉철한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이곤 한다.
여기에는 ‘닻 내리기(anchoring)’라 불리는 정신적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는 어떤 수치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닻을 내려 버림으로써’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덜려고 한다. 마치 진공상태 한복판에 지지대를 만들어 놓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닻 내리기’ 메커니즘을 발견한 사람은 불확실성 심리학의 아버지들이라 일컬어지는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베르스키다. 두 사람은 휴리스틱스(heuristics, 문제 해결에 유효하게 작용하는 경험 지식)와 편향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초기에 이를 발견해 냈다. A classical mental mechanism, called anchoring, seems to be at work here. You lower your anxiety about uncertainty by producing a number, then you “anchor” on it, like an object to hold on to in the middle of a vacuum. This anchoring mechanism was discovered by Daniel Kahneman and Amos Tver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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