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죄책감을 강요한다
2013/03/28 17:45 | 박성현 뉴데일리 논설위원
어제 조선일보 와이섹션에, 이인호 전 서울대 석좌교수의 전면 인터뷰가 실렸다. 이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일부 국사학자들 (실은 정신병자들)이 떠벌이고 있는 만주 무장투쟁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만주라는 공간은, 20세기 전반부에 소련 공산주의, 중국 공산주의, 일본, 중국 국민당, 중국 군벌, 중국 마적 떼와 같은 무지막지한 힘이 충돌한 [세계사적 공간]이다. 그 공간의 성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국사학자, 역사교사들은 그 공간에서 벌어졌던 무장투쟁을 찬양한다. 미친놈들이다.
이승만은 무장투쟁이 이 같은 비극적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점을 1908년부터 꿰뚫어 보았다.
아직 무장투쟁이 공산주의로 기울기도 10년 전의 일이다. 하버드 대학을 다니고 있던 그는 무장투쟁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1908년 공립신보)
"함부로 무장투쟁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일본이 원하는 행위다. 무장투쟁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일본을 강화시켜 준다. 지금 한반도가 처해있는 국제정세와 열강들의 여론은 결코 무장투쟁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무장투쟁을 벌이면 일본이 속으로 웃는다. 무장투쟁이 가장 심한 지역을 하나씩 골라 군대를 보내고 법령을 정해 무찌른다. 그 결과, 민초의 삶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 민초는 차라리 일본의 보호라도 받아서 편안히 살기를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민초의 애국심, 희생정신, 능력이 점차 고갈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원하는 바다."
이승만은 내다보았던 것처럼 1921년에서 1950년 사이에 연해주와 만주의 무장투쟁 세력과 교포들은 무려 다섯 번에 걸쳐 소련과 중국의 공산당의 손에 학살당하거나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승만은 이에 대해서는 글을 남기지 못 했다. 흉흉한 소문은 있지만 확실한 증거로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1976년 모택동이 죽은 다음에 과거의 비극에 관한 진실이 하나 둘 밝혀져 왔다. 또한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다음에 소련 시절의 문서들이 통째로 공개되어 있다. 그래서 이제는 증거가 있다. 이 증거들은, 스탈린과 모택동이 우리 동포를 총알받이로 사용하다가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1920년경 연해주와 만주에는 우리 동포들이 약 80만 명쯤 살고 있었다. 1930년이 되면서 이 인구는 130만 명쯤으로 늘어났다. 이는, 한반도 인구의 5%쯤 되는 숫자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무려 3백 50만 명에 해당한다.
1910년대의 독립 운동가들은 이 지역이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였던 이휘영, 이시영 형제는 1910년, 식솔 전체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열고 독립군을 기르기 시작했다. 만주와 연해주가 독립군의 기지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악마가 지배하는 죽음과 배신의 땅이었을 뿐이다. 신흥무관학교 역시 1920년에 폐교되었고 이시영도 활동 무대를 상해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1. 첫 번째 피바다: 스보보드니
2013년 1월 30일, 한반도 남쪽 끝에 있는 나로도 우주발사기지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 로켓이 힘차게 솟아올랐다. 로켓의 이름은 나로호. 나로호의 1단 추진로켓은 스보보드니의 우주 기술이 적용된 것이다.
스보보드니(Svobodny)는 아무르 강변에 위치한, 러시아의 우주발사기지가 있는 도시이다. 러시아 말로 자유를 뜻하는 스보보다(Svoboda)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래서 연해주와 만주의 동포들은 이 도시를 ‘자유시’라고 불렀다.
그러나 1918년에서 1922년까지 소련 공산군과 일본이 주도하는 다국적군 사이에 벌어졌던 시베리아 전쟁(Siberian Intervention) 과 관해서 만큼은, 한 없이 아름다운 이 강변 도시에는 사악한 배반과 학살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대한 독립군 전체가 소련군에 의해 학살되고 체포당한 ‘자유시 참변’이라 불리는 사건이 그것이다.
1919년 7월이 되자 1918년 이후 다국적군과 소련 공산군 사이의 전투는 한 고비를 넘겼다. 1920년 6월이 되자 미국, 영국을 포함한 서양 열강의 군대는 완전히 철수하고 일본군만 남아서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반혁명 정부를 계속 지원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끝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련은 일본에게 이런 메시지를 분명히 보낼 필요가 있었다.
"너희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만주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 우리는 오직 연해주를 포함한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만 되찾으면 된다"
이 메시지를 가장 확실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값비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소련 공산군과 함께 죽기 살기로 일본군과 싸워 온 대한독립군만큼 좋은 희생제물이 없었다. 독립군을 계속 살려두면 만주 및 연해주 지역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뇌관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었다.
1921년 6월, 소련은 대한독립군 전체를 자유시로 불러들인다. 약 3천 5백 명의 병력이 따듯한 쉼터와 휴식을 기대하면서,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르 강을 넘어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러나 소련군은 이들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소련군대로 편입될 것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자 현장에서 1천명 안팎이 학살되고 나머지는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독립군의 마지막이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우리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대한독립군이 존재한 적 없다. 독립군은 1921년 자유시에서, 소련군 학살에 의해 끝장났다. 그 이후 만주와 연해주의 조선동포들은 어떨 때에는 중국 공산당원이 되어, 또 다른 때에는 소련의 지휘 아래 싸웠다. 그때마다 자유시 참변과 똑 같은 일이 무려 네 번이나 더 되풀이 되었다.
1. 1930년대의 만주 연해주 정세
만주와 연해주는 1930년대 중반에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은 지역이다. 일본이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 만주 직할통치 체제를 구축 한 이후 세계의 운명은 일본에 달렸었다. 일본의 다음 행보가 소련 침공인가, 아니면 중국 본토 침공인가에 따라 인류의 운명이 갈리는 상황이었다.
소련을 치면, 일본은 미국-영국 편이 되고, 심지어 나치 독일마저 미국-영국 편이 될 수도 있다.
이미 1918년에서 1922년까지 볼셰비키 공산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시베리아 정권을 수립시킬 목적으로 다국적군이 모인 적 있었다.
시베리아 다국적 협조여 다시 한 번!
이것이 1930년대 초중반의 챔벌린 같은 영국 정치인들, 그리고 존 F. 케네디의 아버지이자 이 시기 주영 미국대사를 지낸 조세프 케네디 같은 미국 정치인들의 계산속이었다. 영미 민주주의자들과 일본 군국주의자들, 독일 나치가 손을 잡고 볼세비키 공산주의자를 토벌하는 것이 그들의 로망이었다. 파시즘이나 군국주의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고 몽상했던 이 영미 민주주의자들을 서양사에서는 ‘뮌헨 것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바로 1938년 9월 뮌헨에 모여 중부유럽의 민주주의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를 히틀러에게 넘겨주었던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던 만큼 1930년대 중반 소련의 최대 목표는 [일본과 전쟁하지 않는 것]이었다. 일소 평화체제가 소련 최대의 외교 정책 목표였다. 1937년 7월, 소련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연해주 만주 지역에서 일소 평화체제를 깨뜨릴 가능성이 있는 화약고를 제거해야만 되었다.
1. 두 번째 배신: 연해주 동포 강제 추방-학살
일본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근사한 희생제물을 바쳐야 되었다. 누구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좋을까? 소련은 일소 평화체제를 단단히 다지기 위해 두 개의 제물을 준비했다. 하나는 연해주 동포 30만 명. 다른 하나는 막강한 게릴라 부대였던 동북항일연군.
중일전쟁이 터지고 한 달이 지난 1937년 8월부터 소련의 스탈린은 연해주 동포 30만 명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30만 동포 전체를 짐짝처럼 기차에 실어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패대기 친 것이다.
스탈린은 우리 동포에게 왜 이런 흉측한 짓을 저질렀을까? 연해주 동포들의 맹렬한 항일 정신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련과 일본 사이에 평화체제가 들어서든 말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군을 습격해서 괴롭히고야 말 열혈 전사들이었다. 이들은 일소 평화체제를 깨뜨리기 원하는, 걸어 다니는 화약고, 그 자체였다. 스탈린은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이 화약고를 제거한 것이다.
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중앙아시아 이주’라고 부른다. 이주? 마치 평화스러운 이민처럼 들리는 단어다. 그러나 이는 "이주"가 아니다. 집단 강제 추방에 의한 집단 학살이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독립군 장군 홍범도도 이때 카자흐스탄으로 내동댕이쳐져 극장 수위로 일하다 숨졌다. 그래도 홍범도는 행복한 편이었다.
1917년 공산 혁명시절부터 열렬히 소련 공산당을 믿고 지지해 온 연해주 동포들은, 집도, 이불도, 옷도, 가구도, 식량도 없이 중앙아시아 황무지의 겨울 한 가운데에 버려졌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온 식구가 껴안고 자다가 얼어 죽었다. 한 줌의 식량을 얻기 위해 가녀린 처녀가 현지인에게 몸을 팔고 미쳐 죽었다. 한국인을 뜻하는 단어인 ‘까레이스키’는 더럽고 추접스런 짐승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1. 세 번째 배신: 동북항일연군
일소 평화체제를 위해 스탈린이 바친 또 하나의 희생제물은 동북항일연군이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에 괴뢰 국을 세워 직할통치를 시작하자 중국인들이 주도하는 거센 게릴라 무장투쟁이 불붙었다. 공산당, 국민당, 군벌, 심지어 마적 떼까지 항일투쟁에 나섰다. 따라서 온갖 색체, 온갖 이념의 다양한 게릴라 부대들이 등장했다. 1935년 말, 스탈린은 이 다양한 항일 게릴라 부대들을 일소 평화체제를 단단히 다지기 위한 희생 제물로 준비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동북항일연군의 결성을 지시한 것이다.
동북항일연군은 표면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무력 부대였다. 그러나 내막은 스탈린이 직할 통치하는 부대였다. 스탈린은 동북항일연군을 이용해 일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니들이 우리를 침공하면 만주 전체가 게릴라 전쟁터가 되는 거야!" 일본은 스탈린의 메시지를 해독했다. 일본은 1937년 7월, 소련을 침공하는 대신에 중국 본토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중일전쟁이다. 이제 동북항일연군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 일소 평화체제를 단단히 다지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스탈린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지원을 줄여 말려죽이기 시작했다. 1940년 2월, 백두산 밑 길림성 정우현에서 중국인 게릴라 영웅 양정우가 일본군 기관총에 벌집이 되어 죽는 것을 끝으로 동북항일연군의 투쟁은 끝났다. 동북항일연군은 4년에 걸쳐 말라죽는 과정에서 수많은 만주동포들을 죽음으로 끌고 들어갔다. 우리 동포들은 스탈린이 동북항일 연군을 말려 죽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 하고 목숨을 바쳐 동북항일연군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이 완전히 말라죽은 다음에 스탈린은 그 잔존부대를 소련 안으로 불러들여 '소련군 제88 국제여단'으로 소속시켰다. 그래서 끝까지 살아남아 소련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88여단 구두닦이'라고 부른다. 자기 구두를 닦은 것이 아니라, 소련군 장교의 구두를 닦았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자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소련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까? 소련에 절대 복종하여, 동료를 죽을 자리로 밀어 넣었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동북항일연군을 말려 죽이는 작업을 실행한 배신자들이다. 이들의 후손이 지금 북한 전체주의 지배집단을 구성하고 있다. 88여단 구두닦이들은 1956년 말까지 국내파 공산주의자, 소련 교포 출신 공산주의자, 모택동을 따라다녔던 공산주의자로 이루어진 3대 패밀리를 씨도 안 남기고 숙청하는 데에 성공했다. 함경북도 국경지역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은 1960년대 말에 싸그리 청소해냈다. 88여단 구두닦이들이, 모든 경쟁 파벌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식했던 것이다. 이 구두닦이들의 두목이 김일성이다.
1. 네 번째 배신: 민생단 사건
스탈린만 동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도 한 몫 단단히 했다. 만주는 1905년 러일전쟁 이래 줄곧 일본의 안마당이었다. 일본은 만주군벌 장주오린( 張作霖 Zhang zuolin)을 내세워 간접 통치를 해 왔었다. 그러나 1920년대 말이 되자 국민당 혁명세력이 곳곳에 등장해서 도저히 군벌을 통한 간접 통치로는 사태를 감당할 수 없었다. 마침내 일본은 1928년에 만주 군벌을 암살해 버리고 1931년에는 괴뢰 국을 세워서 직접 통치 체제로 들어섰다. 이를 만주사변이라 부른다.
만주사변은 중국인들의 민족의식을 크게 자극했다. 이 같은 대중 의식 변화가 만들어 낸 최대의 수혜자는 중국 공산당이었다. 불과 1,0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중국 공산당 만주 지구당에는 중국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만주 공산당의 몸집이 거대하게 부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만주 공산당원의 80%는 조선 동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불과 5개월 전인 1931년 4월까지만 해도 만주 공산당의 당원 수는 1,190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 중 8백여 명이 조선동포였던 것이다. 만주 공산당은 조선동포들에 의해 만들어져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만주 공산당에 중국인 신입 공산당원들이 밀려들자 사정이 180도 바뀌었다. 중국인들에 눈에는 조선동포들이 아니꼽기 짝이 없는 존재로 비춰졌을 뿐이다. 중국인 특유의 사나운 중화 패권주의가 발동했다. 마침내 1932년 겨울부터 조선동포에 대한 무자비한 사냥이 시작되었다. 무수히 많은 조선동포가 막무가내로 끌려가서 린치당하고 잔혹하게 죽어 나갔다. 이것이 바로 민생단 사건이다. 현재 중국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희생자 숫자만도 오백 명이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처형 기록이 남아 있던 사람들의 숫자일 뿐이다. 일반 민초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수 천 명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
민생단 사건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출신 중국 공산당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동료 조선인들을 밀고한 사람들이 확률이 높다. 김일성이 그때 살아남은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에 대해 김일성 본인은 "중국말을 잘 해서 살아남았다"라고 설명한다. 우스운 소리이다.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깐! 무엇인가 이상하다? 중국공산당원이 되려면 도대체 어느 나라 국적이었을까? 중국 국적이 되어야 한다. 김일성도 10대 때인 1920년대에 이미 중국으로 귀화한 중국인이었다. 이는 김일성의 허물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당시 국외에서 활동한 모든 사람들이 외국 국적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김구도 중국인이었다. 안창호는 미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일본인, 3중 국적자였다. 이동휘는 중국인과 소련인, 2중 국적자였다고 추정된다.
유독 한 사람만 평생 국적 없는 사람으로 남았다. 그 사람이 이승만이다. 그는 엄청난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나이 일흔 넷 되던 해에 대한민국이 만들어질 때까지 무국적자로 살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으로서 다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 다섯 번째 배신: 조선의용군
만주 지역 동포들의 피바다는 1950년 6·25 때에 완성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1948년까지 3년 넘게 만주에서 진행된 중국 공산군과 국민군 사이의 국공내전에 수많은 조선동포 청년들이 공산군 측에 참여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노련한 군인으로 성장했다.
공산군과 국민당 군 사이의 만주 싸움이 끝난 1949년부터 이들 중 5만 명이 북한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조선의용군이다. 이들이 바로 북한 인민군의 주력 부대가 되어 6·25 남침의 선봉을 맡았다. 이들은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몰살당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에서 시작된 조선동포의 비극은, 스탈린의 첨병이 되어 동포에게 총을 겨누다 몰살당하는 운명으로 마감되었다.
6·25 군사작전은 그 세밀한 부분까지 소련의 군사고문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왜 최정예부대인 조선의용군을 낙동강 전선에서 버리는 카드로 사용했던 것일까? 중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서였다. 조선의용군은 모택동 지지 세력이고 그 지도자는 모택동 부대의 간부를 지낸 무정이었다.
무정은 당시 북한의 2인자였다. 조선의용군이 고스란히 보존되면 북한에서 중국의 입김이 세어지고 소련의 입지가 약화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5만 명의 최정예 부대를 낙동강 전선에서 쓰레기처럼 태워버렸다. 그리고 2개월이 지난 1950년 12월에 무정을 숙청해 버렸다. "퇴각할 때 살인을 저질렀다"라는 황당한 죄목이었다.
1. 무장투쟁 vs. 친일파
이처럼, 만주와 연해주의 무장투쟁 세력과 동포들은 소련과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하고 배신당했다. 한마디로 만주와 연해주는 무장투쟁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국사학자들은 무장투쟁이냐 친일파냐라는 엉터리 흑백논리를 사납게 휘두른다. 이 흑백논리를 가장 잘 대변하는 사람은 성공회대 교수 한홍구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남쪽의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깎아내리는 일만큼은 용인돼서는 안 된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단 하룻밤이라도 한데서 새워본 적이 없는 자들이, 영하 40도가 되는 추위 속의 밀림 속에서 밤을 지새운 투사들을 모욕하게 할 수는 없다. 김일성은 분명히 혁명의 창건자로서 위치를 누릴 자격이 있다. 혁명의 창건자, 이는 스탈린이나 덩샤오핑도 넘볼 수 없는, 한 나라에서 오직 한 명의 혁명가만이 누릴 수 있는 자리였다. 김일성은 누구보다 부국강병에 기초한 근대화를 추구한 20세기형 민족주의자였다."
무장투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김일성에게 민족의 정통성이 있다는 식의 주장이다. 그 무장투쟁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섬기는 피바다였을 뿐이라는 진실은 철저히 감추어져 있다. 김일성을 떠받들었으니까 이제 대한민국을 비방할 차례이다. 한홍구는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은 일제시대의 군국소년들이 어려서 입은 마음속의 일본 군복을 벗지 못한 채, 군인이 되어 전쟁을 치르고 반공청년이 되어 병영국가를 만들고, 이제는 군국노인이 되어 북한에 대해 전쟁불사를 외치는 그런 나라다."
1. 돈 타령하지 말고 노선을 이야기해 봐!
국사 교과서와 청소년 역사물은 온통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만든 수치스런 나라이며 만주,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해 온 세력에게 정통성이 있다라는 해괴망측한 사고방식으로 떡칠되어 있다. 스탈린과 모택동의 손에 놀아나다 배신당한 무장투쟁을 신격화하고 대한민국을 경멸하도록 가르치는 이 비틀린 세계관이 너무나 선정적이고 재미있는 동영상물로 만들어졌다. 백년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유튜브에서 무려 4백만 조회를 일으켰다.
"이승만이 돈을 가로채기 위해 무장투쟁에 반대했다"는 백년전쟁의 주장은 자던 개가 웃을 소리다. 이승만은 돈에 관해서는 순결할 정도로 깨끗한 사람이다. 4·19가 터지고 나서 하야하자 "스위스 은행에 어마어마한 돈을 감추어 놓았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다. 그러나 하와이 요양원에서 숨질 때 이승만은 아내가 바느질해서 수선한 낡은 담요 두 장을 덮고 있었을 뿐이다.
그를 비판하려면 그의 노선에 대해서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무장투쟁에 관해 어떤 노선을 취했던 것일까? 과연 무장투쟁 자체를 반대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는 국제정세가 무르익을 때까지는 무장투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뿐 무장투쟁 자체를 반대한 적이 없다. 그는 조건부 무장투쟁 노선을 취했던 것이다. 그 증거가 곳곳에 남아 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 같은 발언을 한다.
"지금은 무장투쟁을 할 때가 아니다. 우리 조선 사람 각자가 생업에 열중하면서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길러야 한다.
이승만의 말을 들었더라면 대한독립군은 자유시에서 소련군에 의해 학살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20년이 지난 1941년이 되면 이승만은 무장투쟁을 할 조건이 되었다고 판단한다. 그 해 여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기 6개월 전에 미국에서 출판되어 미국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그의 책 저팬-인사이드-아웃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체주의 국가들의 도발과 침략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미국은 일본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한편 한국인들에게 무기를 지원해야 한다. 한국인들이야말로 일본과 가장 맹렬하게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민족이다."
무장투쟁은 국제정세가 뒷받침될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는 이승만의 생각은 백퍼센트 맞다. 1945년에서 1948년 사이 만주에서 중국 공산군이 국민군을 이겼던 까닭은 소련과 북한이 든든한 지원 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월남의 베트콩이 미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까닭은 월맹, 중국, 소련으로부터 무제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을 비판하려면 "무장투쟁에 반대했다"라고 엉터리 소리를 할 게 아니라 그의 국제정세에 관한 판단을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떠한 국사학자도 감히 그러한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이승만의 국제정세 판단이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이다.
백년전쟁 역시 이승만의 국제정세 판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할 소리도 마땅치 않고 할 실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기껏 한다는 짓이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했던 꼴라보-레지스땅 구분법을 썼을 뿐이다. 무장투쟁이란 우리말이 아니라 레지스땅이라는 프랑스 말을 사용하면 뭔가 세련되고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까?
1. 암살 작전과 빨치산 무장투쟁도 구분 못 한다
백년전쟁은 무장투쟁이란 단어 대신에 레지스땅이란 말을 씀으로써 김구와 공산주의자를 하나로 묶었다. 김구 노선은 열사들의 암살 작전이다. 1921년 이후 무장투쟁은 공산 빨치산 투쟁이다. 열사들의 암살 작전과 공산 빨치산의 무장투쟁은 전혀 다른 방식의 운동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둘을 엄격히 구분한다. 실제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빨치산 공산주의자들과 암살 작전 열사들은 원수 사이였다. 소련 공산 혁명의 아버지이며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정신적 스승인 레닌은 암살 작전에 이렇듯 지독하게 비판한다.
"우리는 테러리즘을 결연히 거부한다. 테러리즘은 개인에 의한, 개인을 대상으로 삼은 정치적 암살일 뿐이다. 현재 상황에서 이는 가장 멍청한 투쟁 방식이다. 암살에 투신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조직과 선동에 투신했더라면 엄청난 일을 해냈을 열정적인 사람들이다. 암살 처단은 혁명가와 대중 사이를 분리시킨다. 암살 처단은 투쟁의 목표와 방법에 관해, 혁명가와 대중에게 완전히 그릇된 관념을 갖도록 만든다."
공산주의든 아니든, 대중운동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열사들의 암살 작전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인 관점을 취한다. 암살로는 대중의 에너지를 모아 낼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년전쟁은 암살 작전과 빨치산 무장투쟁을 마치 같은 것인 듯 말한다. 이런 엉터리 이야기를 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백년전쟁은 나치 선전상 괴벨스의 구분법을 떠받들어 ‘레지스땅’이라 불렀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종북 지하조직 중에 빨치산 투쟁과 강도질 같은 테러리즘 행동을 혼동했던 조직이 있었다. 1979년에 검거되었던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줄여서 남민전이 바로 그 조직이다. ‘백년전쟁’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은 바로 남민전 외곽조직인 한국민주화투쟁위원회, 줄여서 민투의 조직원이었다. ‘백년전쟁’이 빨치산 무장투쟁과 열사의 암살작전을 구분하지 못 하고 혼동하는 것은 30 여년 전 남민전의 오류를 고스란히 빼닮은 붕어빵이다. 실제로는 테러리즘을 준비했던 남민전이 입으로는 빨치산 무장투쟁을 얼마나 찬양했는지, 그들의 충성 맹세를 한 번 들어 보자.
"경애하는 주석 김일성동지!…남조선은 미제국주의자와 그들의 앞잡이에게는 지상천국으로 되었으나 모든 남조선인민들에게는…착취와 억압에 신음하는 창살 없는 감옥으로 되어 있습니다...항일 빨치산 투쟁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 위원회 전사들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원수님께옵서 인도하는 조선민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품 안으로 안기는 영광스러운 조국통일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수령님의 무한한 사랑과 교시 그리고 적극적인 지원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 만세! 조선노동당 만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승리 만세! 조국통일 만세!"
1. 악마는 죄책감을 강요 한다
만주의 공산 무장투쟁을 찬양하고 이승만과 대한민국을 헐뜯는 국사학자들…그들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정신을 병들게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 자체를 위선, 거짓말, 부패 덩어리로 보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야말로 우리 삶의 소중한 터전이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은 곧 삶의 기반을 부정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대한민국 자체에 관해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곧 삶 자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생명의 길을 가지 못 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면 숭고한 일을 위해 분발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과 모택동이 만들어낸 피바다에 뛰어들지 않았던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면 오직 파멸할 뿐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가져서는 안 될, 또한, 가질 필요가 전혀 없는 죄책감과 컴플렉스로 포장되어 있다. 악마는 병든 죄책감을 강요하고 생명은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르친다. 영국을 살려내었던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는 악마가 강요하는 죄책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회 전체에 몇 세대에 걸쳐 죄책감이 누적되면 그 사회는 금이 갈 수 밖에 없다"
수많은 국사학자들, 역사교사들이 한홍구처럼 연해주, 만주 동포들의 피와 고통과 죽음을 찬양한다. 그러나 이는 연민의 대상일 뿐이다. 피, 고통, 죽음 그 자체는 결코 진실성, 진정성을 보증하지 못 한다. 현대 철학의 거장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은 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희생자가 많았다는 것과 진실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피는 진실을 옹호하는 증인이 될 자격이 없다. 피야 말로 최악의 증인이다."
출처: 2013년 3월24일 〈뱅모 박성현〉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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