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하이에크 /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팔락 2012. 3. 16. 16:59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 II 中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진보적 자유주의의 시각 -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보수주의는 대안적인 목표를 제공하지 못한다.

 

사회주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 삼각구도의 정당 관계 - 흔히 세 정당의 상대적인 입장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이들의 진정한 관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흔히 사회주의자는 좌익, 보수주의자는 우익, 자유주의자는 중도노선으로 표현되고 있으나, 이보다 더 잘못된 것은 없다.

 

정확히 표현하려면 (일직선 선형으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주의자가 한 꼭지 점을 차지하고, 사회주의자가 두 번째, 자유주의자는 세 번째 꼭지 점에 놓이는 삼각형이어야 한다. (하이에크, 자유헌정론 II, p.316 이하 같은 책)

 

지난 수 십여 년 동안의 발전이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적 방향이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나 자유주의자 모두 주로 그러한 움직임을 저지시키는데 열중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요점은 머물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결코 과거 지향적 교리가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는 (보수주의와는 달리) 진화와 변화에 적대적이지 않다. 자생적인 변화가 정부통제에 의해 질식되었던 곳에서 자유주의는 급격한 정책변화를 요구한다. 자유주의자에게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가장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자유로운 성장의 방해물을 철저하게 일소시키는 것이다. (pp.316-317)

 

▶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근본적 차이 - 자유로운 성장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찬양은 일반적으로 과거에만 해당된다. 그들은 인간노력의 새로운 도구들을 나타나게 한 비의도적 변화를 받아들일 용기를 결여하고 있다. 이처럼 보수주의적 태도의 근본적인 특징들 중 하나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다.

 

반면에 자유주의자의 입장은 설사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을 때조차 용기와 확신 및 변화가 모든 과정을 밟아가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물론 급격한 변화를 싫어하고 신중함과 느린 변화를 지지하는 정도라면 이는 타당하다. 그러나 변화를 막고 그 속도를 제한하기 위해 정부의 권력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생적인 조정능력에 대한 신뢰를 결여하고 있다. 보수주의자는 단지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이 변화를 감시하고 감독한다는 것을 확신할 때만, 그리고 오로지 당국이 변화를 질서 있게 유지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만 안전과 만족을 느낀다. (pp.318-319)

 

통제되지 않은 사회적 힘에 맡기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보수주의의 다른 두 특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선호와 경제적 힘에 대한 이해결여이다. 보수주의는 추상적 이론과 일반원리 모두를 불신하기 때문에 자유의 정책이 기초하고 있는 자생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책원리를 형성할 기초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원리를 준수한다는 것은 사회의 노력들이 상호 조정될 수 있는 일반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바로 그러한 사회이론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으며, 특히 경제메커니즘에 대한 이론을 결여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의 저작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맥컬리, 토크빌, 액튼 경, 렉키, 에드먼드 버크 등은 자유주의자이다. (pp.319-320)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는 정부의 권력이 어떻게 제한될 수 있을까보다는 누가 그 권력을 행사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는 스스로 채택한 가치를 타인에게 강제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자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정당한 목적에 사용되는 한 강제나 자유 재량적 권력에 반대하지 않는다. 보수주의자는 만약 정부가 건전한 사람들의 수중에 있으면 엄격한 규칙들에 지나치게 많이 구속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보수주의자는 본질적으로 기회주의자들이고 원칙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의 주된 희망은 현자나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통치하는 것이다. (pp.320-321)

 

보수주의자가 원칙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할 때 도덕적 확신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는 실제로 상당히 강한 도덕적 확신을 소유한 사람이다. 단지 그는 정치적 원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정치적 원리가 하나의 정치질서 하에서 상이한 도덕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서로 공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질서 하에서는 양자 모두 자신들의 확신을 따를 수 있다.

 

최소한의 권력으로 평화로운 사회의 확립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상이한 가치집합의 공존을 허용하는 원리를 승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싫어하는 많은 것을 용인하는 데도 동의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자에게는 어떠한 도덕적 종교적 이상도 강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보수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모두 그러한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다. 타인의 보호 영역을 직접적으로 침해하지 않는 한 도덕적 신념도 강제를 정당화할 수 없다. 회개한 사회주의자들이 새로운 정신적 고향을 자유주의가 아닌 보수주의에서 찾는 것은 이에 대한 인식의 결여 때문이다. (pp.321-322)

 

보수주의자는 특정한 기존의 위계를 보호하려는 성향이 있고 그가 가치를 부여한 사람들의 지위를 보호해주도록 당국에 요구하지만, 자유주의자는 기존의 가치들을 존중한다 해도 경제적 변화의 힘으로부터 그러한 사람들을 보호해주기 위해 특권이나 독점 또는 국가의 다른 강제력에 의존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자는 문화적 지적 엘리트들이 문화의 진화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엘리트들도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규칙아래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증명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p.323)

 

보수주의자들이 우리 시대의 폐해를 민주주의 탓으로 돌릴 때 이는 자기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부해야할 것은 다수결이나 민주주의가 아니라 제한받지 않는 정부이다. 확실히 권력이 다수의 손에 있을 때 정부권력에 대해서 더 이상 제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점에서 민주주의와 제한받지 않는 정부는 연관이 있다. 그러나 이 권력들이 소수 엘리트의 손아귀로 들어가는 것은 훨씬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수결 원칙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또 민주주의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정부형태 중에서 최소 악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평화로운 변화 및 정치교육의 한 방법으로서 장점을 가지고 있고 다른 어떤 체계의 장점보다 크므로 우리는 보수주의가 반민주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pp.323-324)

 

보수주의자는 정부의 통제에 대해서 모순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들의 생각이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목적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는 흔히 산업영역에서 공산주의자 및 관치경제주의자의 조치에 반대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농업에 관해서 보호주의자로서 사회주의자들의 조치를 지지해왔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산업영역에서 보수주의자들과 동맹하지만, 농업에서는 그러하지 않다. (p.324)

 

▶ 보수주의의 약점 -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는 지식의 진보를 상이하게 바라보고 있다.

보수주의는 새로운 사상에 대립할 스스로의 고유한 원리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론에 대한 불신, 경험적으로 증명된 것 이외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상상력 결핍 등은 스스로에게서 사상투쟁의 무기를 빼앗아버린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주어진 시점에서 전수받은 사상들의 더미에만 묶여있다. 보수주의는 논증의 힘을 진정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우월한 자질에 기초하고 있는 탁월한 지혜에 대한 주장으로 피난한다. 보수주의는 새로운 지식으로 인해 빚어질 몇몇 결과들을 싫어하기 때문에 훌륭하게 입증된 새로운 지식마저 거부한다.

 

물론 유행 중에 있고 최신이론으로부터 끌어낸 결론을 받아들일 때는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거부할 때는 나름대로 그 근거들이 합리적이어야 한다. 새로운 이론이 우리가 아끼는 믿음을 뒤엎는다고 해서 유감을 표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진화이론, 또는 생명현상을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거나 이 이론들로부터 도출되는 도덕적 결론을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욱이 이 물음들 자체를 부적절하고 불경하게 간주하는 것도 옳지 않다. 우리의 도덕적 믿음이 옳지 않은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면 사실을 거부하면서 그런 믿음을 옹호하는 것이 오히려 도덕적이지 못하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자는 지식의 진보를 인간노력의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생각한다. 나아가 우리가 해결하기를 바라는 문제나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이 지식의 진보로부터 나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인간 성취의 핵심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는 새로운 지식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있다. (pp.325-326)

 

새로운 것 생소한 것에 대한 보수주의의 불신은 국제주의에 대한 적대 그리고 강력한 민족주의에 대한 굴종으로 이어진다. 사상의 성장은 국제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만이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나의 사상이 미국적인 것, 영국적인 것, 독일적인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문명을 바꾸는 사상은 국경을 갖지 않는다. 새로운 사상을 외면하는 것은 그 사상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빼앗는 것일 뿐이다. 보수주의의 반국제주의는 흔히 제국주의와 결합된다. 마치 이율배반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이 생소한 것을 싫어하고 자신들의 방식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다른 사람들을 문명화시키는 것을 그들의 사명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효율적인 정부의 은총을 내림으로써 그렇게 하려고 한다. 보수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의 밀접한 관련이 보수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다리를 놓는다. ‘우리의’ 산업 또는 자원이라는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은 국가적 자산을 국가적 이득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요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pp.326-328)

 

▶ 보수주의는 대안적인 목표를 제공하지 못한다. - 보수주의 그 자체는 급격한 변화에 대한 합법적이고 필연적인 그리고 광범위한 반대의 태도이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그 본성상 우리의 발전방향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줄 수 없다. 보수주의는 현재의 경향에 저항함으로써 바람직스럽지 못한 발전 속도를 완화하는데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다른 방향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경로로 이끌려 들어갔다. (방향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격렬한 싸움은 결국 속도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진보라는 차량에 브레이크가 필요하더라도 그것을 돕는데 만족할 수는 없다. 자유주의자는 어디로 움직여야 하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pp.314-315)

 

사실상자유주의자는 오늘날 보수주의자보다는 급진적 공산주의자와 더 많은 차이가 있다.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많은 운동들이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지지할 때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그것을 반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것 같다.

자유주의자는 어느덧 자신들이 습관적으로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같은 쪽에 서있는 것을 발견한다. 특히 오늘날 통용되는 정책문제들에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pp.313-314)

 

▶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개념 혼동의 정리 - 프랑스 혁명 이래로 보수주의는 150년 동안 유럽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사회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와 대립했다. (사회주의의 등장 이후에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한편이 되었다)

 

미국의 역사에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이라는) 이 갈등에 상응하는 것이 없다. 미국의 정치체제가 기초하고 있는 공통의 전통은 바로 유럽의 자유주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 전통의 수호자들(conservatist→보수주의)은 유럽적 전통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미국의 급진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혼동이 발생하였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자유주의자’라는 용어는 오늘날 계속되고 있는 오해의 원천이다. (pp.314-315)

 

▶ 자유주의 정치운동의 이름 - (하이에크) 내가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오늘날 그 이름으로 진행되는 정치적 운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미국에서는 대신 자유체제론자(Libertarian)라는 용어가 대신 사용되고 있으나 이것도 지나친 조어(造語)라는 느낌을 주고 심지어 대용품이라는 느낌을 주어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하이에크) 내가 원하는 것은 자유성장과 자생적 진화를 옹호하는 그러한 정당, 삶의 정당(the party of life)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이다. (pp.331-332) cf. 구 휘그

 

▶ 자유진보주의 :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과 자유주의의 새로운 만남을 위하여 - 19세기 초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인간의 어리석음이 세워놓은 (사회주의라는) 방해물로부터 자생적 성장과정을 해방시키는 것이 지금의 주요 과제이다.

 

여기서 정치철학자의 희망은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 사람들은 비록 지금은 잘못된 방향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지만, 적어도 현존 제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또 필요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했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pp.336-337)

 

# 영국 정당사에서 1688 명예혁명과 1689 권리장전을 계기로 토리당(왕당파)과 휘그당(자유당)이 대립하여 근대 법치주의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1885년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노동문제에 대한 휘그당의 대응실패로 인해 1893년 노동당이 출범하고 노조에 기반을 두어 급속히 세력을 확대한 노동당이 토리당과 대립체제로 전화하자, 자유당은 소수당이 된다.

 

사회주의에 반대하여 토리당의 보수주의자와 휘그당의 자유주의자들이 한편이 된다. 그러나 1979년 아이엠에프를 거치면서 세계화에 적응하기 위해 토리당의 대처수상이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수용하면서 토리당의 환골탈태를 이루어내고 자유주의 토리당 18년 집권의 길을 열었다.

 

1997년 토니블레어도 대처리즘을 수용하되 생산적 복지를 내걸고 신노동당의 집권을 이룩했다. 따라서 하이에크의 사상은 케인즈주의를 극복하고 영국의 주류사상이 되었다.

 

--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 II 中 -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