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市場도, 정부도 만능 아니다.

팔락 2012. 1. 10. 10:20

[데스크의 눈/이병기]市場도, 정부도 만능 아니다.

 

“당 강령에서 보수(保守)라는 단어를 삭제하자”는 김종인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의 발언은 도발적이면서도 보수의 뿌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찬반양론이 분분하지만 아직 분명하지 않은 논점이 많아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주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의 보수에는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박제품도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보수를 ‘부자(富者)만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추락시킨 시장(市場) 만능주의 경제학이다.

 

미국의 헤지펀드 투자가 조지 소로스가 탈레반에 빗대 ‘시장 근본주의’라고 부른 시장 만능주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부른 주범이다. 금융위기를 부른 부채담보부증권(CDO)과 시장 만능주의는 유전자가 같다. 제대로 따져 보면 사기에 가깝지만 복잡한 수학을 사용해서 일반인의 이해를 불가능하게 해놓고 “시장만 믿으면 된다.” “부동산은 영원히 상승한다.”며 단순하면서도 달콤한 거짓말을 줄기차게 외쳐댔다.

 

경제학에서 보수가 시장 근본주의에 영혼을 내준 시기는 인간을 합리적인 로봇으로 본 ‘합리적 기대가설’과 시장은 언제나 옳다고 주장한 ‘효율적 시장가설’이 주류 경제학을 장악한 1980년대 이후다. 현실 정치에서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공산주의의 몰락과 보수 정당의 라이벌인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와 미국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시장이 계획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보수당이나 공화당의 정책을 대폭 수용하면서부터다. 진보가 진보의 위기임을 인정하고 제3의 길을 고민한 순간 아이로니컬하게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은 시장 만능주의로 폭주하고 보수는 동맥경화의 길로 들어선다.

 

경제학은 물론이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어떤 이론이라도 여백 없이 극한으로 치달으면 본래의 미덕을 잃어버리는 것이 인류의 경험이다. 결국 정부를 악(惡)으로 취급하고 시장을 신(神)처럼 떠받들던 시장 근본주의 경제학은 2008년 경제위기를 부르면서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 보수의 제사장(祭司長)을 자처했던 오만한 경제학자들도 제단에서 내려와야 할 때다.

 

시장 만능주의를 삭제한 보수 경제학이 서둘러 복원해야 할 가치는 겸손, 개방성, 유연함이다. 본래의 보수는 이성을 절대시하지 않는다. 최근 각 분야의 첨단학문들도 인간은 제한적인 합리성의 동물이며, 시장은 각 경제주체가 독립적인 판단을 할 때는 최고의 효율을 보이지만, 쏠림현상을 보이면 광기(狂氣)에 사로잡히기도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합리성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거나 시장과 정부 중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힘을 실어주기 어렵다. 인간, 시장, 정부의 장점과 한계를 잘 알고 마음을 열고 매 순간 유연한 자세로 균형을 잡으며 한발 한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경제학이 ‘사회과학의 여왕’ 자리에서 내려와 주변 학문들에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병기 경제부 차장 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