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서경
이덕일 역사평론가
이번 총선은 논문 표절, 막말 시비 등 자질 시비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후보들도 일단 당선되었을 경우 다른 방법이 없다. 옛날에는 이런 경우를 막기 위한 제도로 서경(署經)이란 것이 있었다. 관직 임용자의 고신(告身 : 임명장)에 대간(臺諫 : 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서명해야 관직에 나갈 수 있게 한 제도다. 이를 고신서경(告身署經)이라고도 하는데, 설사 임금이 재가했어도 대간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취임할 수 없었다. 그만큼 인사에 신중을 기하기 위한 제도였다.
후보자 본인뿐 아니라 부친, 조부, 증조부와 외조부를 뜻하는 사조(四祖)의 행적까지 조사했다. 그래서 부적합 사유가 발견되면 ‘작불납(作不納)’이라고 써서 서명을 거부하거나 ‘정조외(政曹外)’라고 단서를 붙여 문·무관의 인사권이 있는 자리에는 나가지 못하게 했다.
서경 제도는 고려 때 더 강력했다. 『고려사』 ‘이공승(李公升) 열전’에는 의종 12년(1158)에 의종이 갓난아기 때부터 자신을 돌본 환관 정함(鄭?)을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임명했으나 3년 동안이나 서명을 거부했다고 전한다. 화가 난 의종이 “만약 서명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을 모두 죽여 젖[?]을 담글 것이다”라고까지 위협했으나 이공승은 끝내 서명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서경의 문제도 있었다. 명가 출신 사대부가 대부분인 대간에서 한미(寒微)한 출신의 진출을 막기 위해 악용하는 경우다. 『태종실록』 8년(1408) 2월조에서 서경할 때 “조상들의 계보를 상고해서 혹 한미한 데서 나왔거나, 혹 흠이 있을 때 반드시 ‘작불납(作不納)’ 세 자를 쓰고, 심한 자는 ‘정조외(政曹外)’ 세 자를 썼다”고 전하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세종 17년(1435)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가 박욱(朴彧)을 도사(都事)로 천거했다. 도사는 관찰사나 절도사를 보좌하고 유고 시 그 직을 대신하기 때문에 2인자라는 뜻에서 아사(亞使), 또는 아감사(亞監司)라고도 부르는데 인사권이 있었다. 『태종실록』은 박욱을 초래(草萊:초야)에서 일어났다고 전하고 또한 그 부친 박계생(朴桂生)도 요언(妖言)에 연좌되어 경주에 구금된 적도 있었기 때문에 대간에서 정조외로 서경하려 했다. 그러자 세종은 ‘김종서가 천거했는데 어찌 선대(先代)의 하자 때문에 사람을 버릴 수 있겠는가?’라면서 정조외 세 글자를 없애게 했다.
고려는 모든 관리에게 서경이 적용되었지만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5품 이하의 관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후퇴했다. 국왕의 인사권을 제한하기 때문이었다. 유권자 다수의 현명한 선택에 따를 수밖에 없겠지만 서경처럼 거부하는 권리도 필요하리란 생각이 든다.
고신서경 제도와 당선무효 제도
전자는 임명직에 적용되고 후자는 선출직에 적용되므로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고신서경 제도는 인사권자가 특정인을 임명하려고 할 때 타 기관에서 동의를 해주어야 공직(관직)에 나갈 수 있는 제도고, 당선무효 제도는 선거로 선출된 당선인에 대해 특정한 사유가 발생하면 당선을 무효화시켜 공직에 취임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이미 취임한 자리에서 퇴임하게 하는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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