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팔락 2017. 4. 14. 10:56


<권력에의 의지>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사상 전체를 압축해 놓은 가장 중요한 저술이다. 모두 1,067개의 단편, 우리 말 번역본으로 600쪽에 이르는 이 거대한 분량의 책 속에 담긴 사상은 도대체 무엇일까? 간단히 설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생성은 무죄임을 밝히고 모든 도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길잡이를 제시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에 큰 영향을 줌)


제목이 말해 주듯이 니체가 보기에 세계의 본질은 권력을 추구하는 본능과 의지다. 여기서 권력이란 물론 정치권력 같은 세속의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힘, 활력이다.


니체가 "삶은 권력에의 의지"이고 "이 세계란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힘.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소모되는 게 아니라 변화하기만 하는 힘"이며, 또 "이 세계는 권력 의지다 ....... 그리고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또 여러분 자신도 이 권력에의 의지다"라고 강조할 때 이 수수께끼 같은 말들의 의미는 모두 똑같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물론 당시의 자연과학, 특히 진화론이 있다. 진화론이 나온 뒤 유럽에서는 인간의 삶과 사회, 역사까지도 생존 욕구나 본능적 충동, 생명력의 우월을 가지고 설명하려는 경향이 생겨났는데 니체는 이것을 무생물의 세계나 우주 전체에까지 적용하여 형이상학적 원리로 삼았던 것이다. (칸트는 뉴턴의 과학적 업적을 통해 인간이성의 위대함을 접하고 이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니체는 이 원리를 바탕으로 먼저 2, 500년 동안 유럽 문명을 지배해 온 철학, 종교, 예술, 과학, 도덕, 정치사상 들을 건강한 삶을 약화시키는 니힐리즘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니힐리즘은 문 앞에 서 있다. 모든 방문객 가운데 가장 기분 나쁜 이 존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회적 빈곤 상태나 생리적 변질 또는 부패를 니힐리즘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빈곤은 정신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그 자체로는 결코 니힐리즘을 낳을 수 없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빈곤에 대해 전혀 다른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특정한 해석, 즉 기독교 도덕적 해석 속에 니힐리즘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지금까지 절대자인 '신'의 보호막 아래서 우리의 이성으로 절대 진리와 가치를 알 수 있고 세계와 삶의 목적과 통일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와 과학의 발달로 그 확신이 흔들림에 따라 거꾸로 이 세계 전체가 아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보는 병적 상태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니힐리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 진리나 가치,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첫걸음이다. 이런 믿음은 허약한 인간들. "가축 떼 같은 저급한 종자들"이 좋아하는 것일 뿐이며 그 믿음에 대한 반발인 니힐리즘도 실은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처럼 기만적인 자기 위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니힐리즘(허무주의)란 ‘삶의 목표’를 ‘세속의 행복과 안정’에 두어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순응하는 속물 군상, 절대 진리와 가치에 대한 독단적 확신에 빠져있는 사람들, 나약함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세기 말 유럽의 정신적 상태를 이렇게 진단한 니체는 그 때까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진 종교, 도덕, 철학을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신이 아닌 인간 자신이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설교함으로써, 삶의 원리에 비워 볼 때 멸망해야 마땅한 허약자들을 변호하는 기독교와 전통 도덕과 철학은 삶 그 자체를 부정하는 '노예의 도덕'이며 고귀하고 힘 있는 자들에 대한 비천하고 왜소한 자들의 '분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진리라는 이름의 두건을 쓴 경멸스러운 방탕아들"일 뿐이며 "철학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도덕군자들을 목매달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 새로운 가치는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그는 과학의 발전에 발맞추어 인간의 인식 능력을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절대 지식의 주춧돌을 찾으려 애쓴 근대 철학자들의 노력을 헛수고라고 빈정거린다. 니체에 따르면 참과 거짓, 선과 악의 구별은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므로 중요한 것은 오직 적나라한 삶 그 자체, 순수한 자연적 생성,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같은 것이 되풀이되는 영겁 회귀뿐이다.


"모든 생성은 무죄"라는 니체의 말은 삶 자체를 위해서는 모든 게 정당화되므로 더 이상 객관적 진리나 도덕 따위는 필요 없다는 선언인 것이다. 이제 니체에게는 권력에의 의지 즉 강한 것을 추구하는 본능만 남고, 종래 미덕이 라고 여겨진 평등, 정의, 진리, 겸손, 동정심, 검소함, 인내심 등은 악덕이 되는 반면 강하고 우월하고 재능 있는 모든 것이 말뜻 그대로 덕이 된다. 한마디로 노예근성에 반대되는 주인다움, 승리자의 속성이 새로운 가치 기준으로 찬미되는 것이다.


니체는 이 새로운 가치 기준대로 살기 위해 '삶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방해하는 모든 것에 맞서 단호히 투쟁하여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을 것을 호소한다. "고통과 긴장과 상심의 시기에는 싸움을 택해야 한다. 싸움은 우리를 단련시키며 근육을 늠름하게 만든다." 그는 이런 삶을 '기독교적 삶'과 대비하여 '디오니소스적 삶'이라고 부르면서 세속의 행복을 거부하고 이 비극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강하고 고귀한 자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비극적 인간은 가장 가혹한 고뇌도 긍정한다. 그는 그 정도로 충분히 강하고 풍요로우며 신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운명도 부정한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삶 때문에 고뇌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허약하고 가난하며 쇠락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신은 삶의 저주이며 스스로를 이 삶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표시다...... 토막토막 잘린 디오니소스는 삶의 약속이다. 그것은 영원히 재생하고 파괴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사람들이 흔히 '자유'라고 부르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사실상 '권력에의 의지'며 이 의지는 영원히 생성하는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에서 '영겁 회귀'를 깨달음으로써 기존의 가치와 위계질서를 초극하고 운명애를 터득한 인간을 '초인(위버멘쉬)'이라 불렀는데 그 초인의 모습은 이제 쓸쓸한 철학자의 독백으로 재현된다. "독수리는 결코 무리지어 날지 않는다. 그런 건 참새나 찌르레기한테 맡기는 게 좋다 .... 높이 날아오르고 발톱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천재의 운명이다."


<나치즘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

'생에의 의지'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권력에의 의지'로서 보다 힘차고 보다 충실한 생으로 무한한 향상을 수행하려는 것이 생의 실상(實相)이므로 기존의 일체 가치의 전환 후에 창조되어야 할 가치정립의 새 원리는 생의 본질인 권력량(權力量)의 증대에서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니체의 권력의지 설은 후에 나치즘의 권력 사상을 합리화하는 반동이론으로 악용되었으나 니체의 권력의지설의 참뜻은 냉혹한 자기초극(自己超克)을 위한 내면적인 사상 원리를 명백히 하려는 데 있으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외적 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투(Entwurf, 企投)와 피투(Geworfenheit, 彼投)  (0) 2017.04.14
실존주의  (0) 2017.04.14
[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잘못된 친구 관계  (0) 2016.10.15
새삼 실존주의  (0) 2016.05.21
몸의 철학  (0) 2015.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