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릿적
먼 과거의 일을 언급할 때 상투적으로 쓰는 말들이 있다. ‘옛날옛적’, ‘호랑이 담배 피울 적’, ‘소싯적’, ‘고릿적’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이 과거를 지시하기는 하지만 똑같은 과거의 시간대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 옛적’은 그야말로 지정되지 않은 먼 과거를 지시한다. 이는 “옛날 옛적에 깊은 산골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요”와 같이 옛날이야기의 서두에 많이 쓰인다. ‘옛날 옛적’을 ‘아주아주 먼 옛날’로 바꾸어 표현하기도 한다. ‘호랑이 담배 피울 적’은 ‘호랑이가 사람처럼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라는 뜻이니, 지금과는 형편이 아주 다른 옛적을 지시하되 호랑이가 담배를 피울 때라는 지정된 과거를 지시한다. 상식적으로 호랑이가 담배를 피울 수 없으므로 ‘호랑이 담배 피울 적’은 도저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던 먼 옛날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오히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변형된 구조로 널리 쓰인다.
‘소싯적’의 ‘소시’는 한자 ‘少時(소시)’다. 이 ‘소시’에 ‘시’와 의미가 같은 ‘적’이 덧붙은 어형이 ‘소싯적’이다. ‘소시(少時)’나 ‘소싯적’은 ‘젊었을 때’라는 뜻이다. 나이가 어렸을 때를 지시하므로 지정된 과거이며,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이다. 이 ‘소싯적’은 “내가 이래 봐도 소싯적에는 한가락했지”와 같은 표현 속에서 확인되듯 어느 정도 나이 든 사람이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쓰는 말이다. 앞서 설명한 과거 지시 표현들과는 달리 ‘고릿적’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어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또 고릿적 얘기는 꺼내고 그래?”와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이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를 지시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고릿적’은 ‘고리’와 ‘적’ 사이에 사이시옷이 개재된 어형이다. ‘적’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울 적’, ‘소싯적’ 등에 쓰인 ‘적’과 같이 ‘때’를 지시한다. 지금은 ‘때’라는 단어에 밀려나 ‘~할 적에’와 같은 특수 표현이나 ‘소싯적, 고릿적, 돌마낫적(아주 어렸을 때)’ 등과 같은 관용어투의 표현, ‘그저께, 어저께’와 같은 시간어에서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문제는 ‘고리’다. ‘고릿적’의 ‘고리’를 ‘고리나 대오리로 엮어서 상자 같이 만든 물건’으로 이해하고, ‘적’을 ‘짝’으로까지 바꾸어 ‘고릿적’을 ‘고리짝’으로 바꾸어 쓰기도 한다. ‘고릿적’이 지니는 ‘과거’의 의미와 ‘고리짝’이 지니는 ‘낡고 오래된 물건’이라는 이미지가 맞아떨어져 ‘고릿적’을 쉽게 ‘고리짝’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리짝’은 ‘낡고 진부한 것’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웬 고리짝 같은 소리냐?”와 같은 표현에서 이와 같은 의미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고릿적’의 ‘고리’는 ‘고리짝’과는 무관하다. ‘고리’는 ‘고려’의 변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려’라니 이것이 무엇인가. 나라 이름 ‘高麗(고려)’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릿적’은 ‘고렷적’으로 소급하고 ‘고려 때’라는 의미를 띤다. 더 정확히는 ‘고려 시대’를 가리킨다. ‘고려’라는 시간대가 과거의 일이므로 이 표현은 적어도 조선 시대 이후에서나 쓰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 시대에 그 이전 왕조인 고려 시대를 회상하며 ‘고려 때에는 이러이러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렷적’이라는 말을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만들어 쓰던 사람들은 조선 시대 사람들이다. 아마도 조선 시대는 고려 시대와 달라진 것이 많아 그것을 비교하기 위해 이와 같은 말을 만들어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고렷적’이라는 말을 쓰면서 당시보다 좋았던 고려 시대를 추억했을 수도 있고, 지나간 시기와 단절하며 새로운 시대 상황에 적응하기를 모색하였을 수도 있다.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고릿적’은 그리움의 대상이자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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