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이정렬의 병원 이야기]미국에서 바라본 한국의 건강보험제도
[의사 이정렬의 병원 이야기]미국에서 바라본 한국의 건강보험제도
이번 미국 방문에서 미국의 건강보험제도를 일반 국민 눈으로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역시 한국 제도가 ‘세계 최고’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미국은 국민총생산(GNP)의 17%(한국은 7%)나 되는 돈을 건강 관련 재원으로 쓰고 있고 세계 최고 의료 품질과 첨단 의료를 선도하고 있지만 건강보험제도에 관한 한 불편한 점이 많다.
우선 ①보험료가 너무 비싸고 ②진료 과정이 복잡하며 ③치료까지 무제한 기다려야 하고 ④원하는 의사나 병원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미국 사람들은 민간 사(私)보험에 가입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는 보험 가입자(환자와 가족)가 민간 보험회사에 지불하는 보험료를 ‘프리미엄(premium)’이라 부르는데 2011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개인당 연평균 우리 돈 480만 원(4800달러)이 든다. 가족 단위로 가입하면 최소 연 1500만 원(1만5000달러)이 필요하다.
이에 비해 한국의 건강보험은 1인당 연평균 84만 원 정도의 보험료를 지불하고 있다. 미국 사보험의 경우 보험사가 15% 정도 이윤을 먼저 떼고 환자에게 의료비(총 낸 보험료의 85%)를 지출하는 반면에 한국은 1인당 평균 76만 원 정도(보험료의 약 90%)가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지불된다.
미국에서는 건강보험이 민간 영역이므로 가입자는 자신의 경제적 능력과 건강상태에 맞는 보험 상품을 쇼핑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잘잘못에 대한 책임과 부주의로 인한 불이익에 대한 책임은 모두 가입자에게 있다.
이렇게 이윤추구 논리로 운영되다 보니 마음 편히 가입하는 사람이 드물고 보험료가 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으며 보장 내용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가입자도 별로 없다. 설상가상으로 건강보험 가입자는 미국 전 국민의 64% 정도밖에 안 된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아예 어떤 건강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은 국민이 4800만 명이나 된다.
문제는 더 있다. 미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보험료가 비싼 만큼 지불 범위를 벗어나는 질환이나 진료가 적을 것이고 회사는 군소리 없이 가입자들에게 의료비를 내주고 고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보험사들은 가입자(환자와 가족)에게 지불할 수 있는 최대 상한 금액을 미리 정해 놓고 이를 넘는 부분은 가입자 본인 부담(out of pocket cost)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것은 가입 전 가입자의 책임하에 계약 형태로 사전 약속을 한 것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보험사들은 또 매달 받는 보험료는 높이지 않되 천문학적인 진료비 폭탄이 예상되는 상황에 대해서만 확실히 보장을 해주는 이른바 ‘공동보험(co-insurance)’ ‘공동지불(co-payment)’ ‘보험금공제(deductible)’ 등 제도를 도입하고 있었다. 공동보험이란 보험사와 가입자(환자) 사이의 지불 배분율을 미리 정하는 것인데 비율이 20%라 가정하면 이는 의료비의 20%는 환자 본인이 내야 한다는 의미다.
또 공동지불이란 환자가 의사나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고정액을 내는 것으로 지불 금액을 20달러라고 계약하면 무조건 진료를 받을 때마다 20달러를 본인 부담으로 내야 한다. 보험금공제 제도는 환자 본인의 결정에 따라 보험 적용 범위의 시작을 정하는 과정으로 이 기준에 따라 매달 보험료를 낮출 수도 있고 급하거나 비용이 많이 드는 경우에 청구를 집중시킬 수 있다.
어떻든 이 모든 것은 보험 가입자들에게 추가 부담을 가중시키는 회사가 동원한 편법이라 할 수 있다. 비싼 의료보험에 가입했다 하더라도 추가 비용을 내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심지어 보험 상품 중에는 환자 본인부담 상한선을 아예 없앤다(Excluded from out-of pocket expense cap)는 조항을 둔 상품도 있는데 이는 자칫 보험에 들고도 본인 부담이 무한정일 수 있어 환자 입장에선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다.
가입자들은 보험 적용 대상 질환도 하도 많아서 가입 전 자신의 질환이나 건강 위험요소와 관련된 검사 등이 빠져 있는지 꼼꼼히 확인해야 하고 현재 먹고 있는 약이 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되는지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평생 먹고 있는 약을 건강보험으로 살 수 없는 해프닝을 피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국민들은 한 번도 걱정해 본 적이 없는 것들이다.
미국의 건강보험 회사들은 철저하게 영리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가입자를 받는 시점부터 위험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보험회사가 ‘갑’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 테면 ‘보험 플랜 선택권(plan selectivity)’이 보험회사에 있는데 이는 과거 병력(病歷)이나 신체검사 결과를 보고 그 가입자의 가입 허용 여부를 보험회사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다. 가입자의 건강 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또는 가입자의 신용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거나 고비용 발생이 예상되는 경우 회사는 가입이나 보험료 지불에 제한을 둘 수 있다. 알다시피 우리 건강보험은 어느 누구에게도 진입 장벽이 없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미국에서는 ‘의료보험 고르는 8가지 팁’은 물론이요 ‘보험회사에 속지 않는 요령’을 일러주는 상담전문가가 어엿한 직종의 하나가 될 정도였다. 물론 우리 제도에 개선할 점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다음 회에는 한국의 건강보험제도가 세계를 선도하기 위해 풀어야 할 숙제들을 골라내보기로 한다.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