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 ( 性善說 ), 성악설 ( 性惡說 )
성선설 [ 性善說 ]
정의
인간의 성품이 본래부터 선(善)한 것이라고 보는 맹자(孟子)의 학설.
내용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과 대립되는 이론이다.
맹자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한 ≪중용≫의 내용을 계승해 성을 만물에 내재된 하늘의 작용, 즉 천명으로 파악함으로써 만물은 성, 즉 천명을 중심으로 볼 때 모두 하나라고 하는 만물일체사상(萬物一體思想)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하늘의 작용이 천지 자연의 대조화(大調和)를 연출하고 있으므로 그 하늘의 작용을 성으로 이어받은 인간도 성의 움직임을 따르면 인간 사회는 저절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의미에서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하늘의 작용인 천명은 만물을 낳고자 하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맹자에 의하면 이 천명의 작용은 여천지동류(與天地同流)로 표현된 바와 같이 유(流) 즉 ‘흐름’의 개념으로 파악된다. 모든 존재자의 근저에서 흐르고 있는 이 ‘흐름’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맹자에 의하면 모든 존재자의 존재하는 현상들은 이 ‘흐름’에 편승하여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유지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흐름’을 존재의 본질로서 이어받고 있는 인간의 성은 남을 사랑하는 작용으로 나타나는데, 만물을 낳고자 하는 천명이나 남을 사랑하는 인성(人性)은 모두 인간의 의식이나 감정의 밑바닥에서 흐르는 인간 행위의 원동력이다.
인성의 내용으로서 설명되는 구체적인 예는 맹자에 의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설명된다. 인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나타나는 바탕이 된다.
측은지심의 구체적인 예로 맹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언뜻 보면 다 깜짝 놀라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제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동네의 친구들에게 어린아이를 구해 주었다는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며, 어린아이를 구해 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싫어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측은지심과 같은 성의 작용은 인간의 생각이나 판단을 초월해 존재하는 만인 공통의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를 천명이라 설명하는 것인데, 이러한 성이나 천명의 작용을 맹자는 선(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성선이라고 했을 때의 선은 인간의 의식이나 생각이 개입된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 도덕적 행위를 표현한 말이 아니라, 의식을 초월해 그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성의 움직임 그 자체를 표현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의 선은 ≪주역≫의 ‘계지자선 성지자성(繼之者善 成之者性)’이라 했을 때의 선의 개념처럼 악에 대립되는 상대 개념이 아니라 상대 개념의 선악을 초월한 절대 개념이다.
맹자의 성선설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맹자≫ 고자장(告子章)에서 펼쳐진 고자와의 논쟁에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성은 기류(杞柳) 즉 버드나무와 같고 의는 배권(桮棬 : 나무를 구부려 만든 술잔)과 같으니, 인성을 가지고 인의라 하면 버드나무를 가지고 그릇이라 하는 것과 같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한 고자의 말에 대해, 맹자는 답했다.
“자네는 능히 버드나무의 성질을 이용해 그 그릇을 만드는가 아니면 버드나무의 성질을 없애어 그릇을 만드는가, 만약 버드나무의 성질을 없애서 그릇을 만든다면 사람의 본성을 없애서 인의를 만드는가”라고 되물으며, 버드나무로 만든 그릇은 버드나무의 성질을 이용해 만드는 것처럼 성과 인의도 일직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함을 설명하였다.
② 성은 고여 있는 물과 같아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르게 되어 물의 흐름이 동서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것처럼, 인성에도 선과 악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고 하여 성선설에 반대한 고자에 답했다,
맹자는 물의 흐름은 동서로 나누어져 있지 않지만 상하로는 나누어져 있는 것이니, 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고 함으로써 성선의 선이 절대 개념임을 강조하였다.
③ ‘생지위성(生之謂性)’이라 하여 성을 생(生)으로 해석함으로써 성을 육체적인 생명 현상으로 파악한 고자에 대해, 맹자는 개의 성과 소의 성, 사람의 성은 천명으로서의 근원은 같지만 현상 속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날 때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함으로써 성은 육체적인 생명 현상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임을 설명하였다.
④ 식(食)이나 색(色)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육체적인 생명 현상이 성이며 또 맹자가 성의 내용으로 설명한 인의예지 가운데 인은 심(心)의 안에 있지만 의는 저 사람이 연장자이기 때문에 내가 연장자 대접을 해주는 것과 같이 심의 바깥에 있는 것이므로 인의예지의 성을 인간의 심 내부에 있는 선험적(先驗的)인 것이라고 한 맹자의 성설(性說)을 옳지 않다고 고자가 비판하였다.
고자의 비판 대해, 맹자는 연장자를 보고 연장자로 대접하는 심의 작용이 의이기 때문에 연장자로 대접하는 작용은 심(心) 속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성의 내용이 된다고 답변해 성의 내면적 선천성을 설명하였다.
성선설에 반해, 인간의 육체가 가지는 기본적인 욕구를 성으로 파악한 순자는 투쟁으로 나아가는 육체적인 욕구의 방향성에 주목하여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그 밖에 중국 철학 사상에서 전개된 성설을 보면, 성에는 선이나 악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고자의 성무선무악설(性無善無惡說), 모든 사람의 성에는 선과 악이 동시에 내재해 있다는 양웅(揚雄)의 성선악혼효설(性善惡混殽說), 사람 중에는 선한 성을 가진 자, 악한 성을 가진 자, 그리고 선으로 인도하면 선하게 되고 악으로 인도하면 악하게 되는 중간자의 삼품(三品)으로 구분된다는 한유(韓愈)의 성삼품설(性三品說) 등이 있다.
송대에 완성된 성리학에서는 특히 맹자의 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 순자의 성을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파악해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통합하였다.
한편, 인성론(人性論) 중심으로 발달한 한국 유학에 있어서는 성론이 철학의 중심 과제가 되어온 것은 사실이나, 맹자의 성설이 주로 수용되고, 다른 성설은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설이 다양하게 전개되지 않고 맹자의 성설을 전제한 상태에서 주로 성을 실천하기 위한 수양 철학(修養哲學)이 발달하였다.
퇴계 철학에 있어서의 경사상(敬思想)이나 율곡 철학에 있어서의 경사상이 바로 성의 실천을 위한 수양 철학인 것이다. 그리고 기질지성의 문제는 한원진(韓元震)의 인물성상이설(人物性相異說)을 중심으로 전개된 호학(湖學)과 실학(實學)에서 취급되었으나 한국 유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성악설 [ 性惡說 ]
순자는 성악설을 제창하여 "인간의 성품은 악하다. 선한 것은 인위(人爲)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선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임을 지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은 타고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결과인 것이다.
순자의 성(性)은 인간의 감성적 욕구의 측면을 지칭한 것인 만큼, 맹자가 비감성적이고 순수한 인간 본성을 일컬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그 지칭하는 대상이 다르다.
그러므로 순자의 선(善)은 인위(人爲)로써 인간이 노력하면 성취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화성기위(化成起僞)'라 하였다. 이것은 후천적인 작위에 의하여 기질을 변화시킴으로써 선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자의 관점은 행위 규범으로서의 예(禮)의 준행을 강조한 점에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