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의료 정책에 대한 총체적 불만
정부의 의료 정책에 대한 총체적 불만
시장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든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케인즈 학파 경제학자든, 가격정책에 대해서는 정부가 함부로 간섭하면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모두 동의하고 있다.
국가는 중립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로 인간보다 도덕적이거나 효율적인 것으로 가정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의료정책과 관련하여 국가의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가 뚜렷하다.
먼저 한방 관련 정책을 보자. 엘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라는 책에서 진실을 가리는 기준으로 합의, 일관성, 권위, 계시, 내구성 그리고 과학의 여섯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그중에서 과학만이 진실을 검증하는 기준이라 하였고, 사회가 과학에 근거한 판단이 가능할 경우 이를 중시하여야만 발전이 있다고 하였고 대다수가 이에 동의할 것이다.
한의학은 기, 음양오행, 경락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기, 음양오행, 경락은 초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과학 교과서에 한 구절도 언급되지 않는 비과학적 용어이다. 이러한 비과학적인 한의학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정부의 정책은 비합리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정부의 의료에 대한 정책 태도를 보자.
2000년 의약 분업에서 정부가 내세운 각종 명분은 전혀 통계적 근거를 갖추지 못하였고, 의료비에 대학 약제비의 비중이나 OECD의 ‘한국의료 질 검토보고서’ 등의 자료를 보면 통계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정부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을 자의적으로 해석 발표하고 있다. 아마추어인 나의 분석으로도 그 부당함이 눈에 보이는 문제이다. 그런데도 정부의 관료들이 이를 모르고 있다면 심한 무능이고, 알고도 그런 자료를 배포했다면 그 도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의료 정책을 추진할 때, 의료계의 반발이 예상되는 경우에는 어김없이 의사들의 비도덕성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내보낸다. 과연 의사들이 비도덕적일까?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의사들이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쌍벌제를 도입하고, 도가니법에 명시되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의사들만이 유난히 비윤리적 집단이라고 매도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형사정책연구원이 1999년 9월에 실시한 직업별 부정부패 정도 조사(한겨레, 1999.9.27, 14면)에 의하면 의사들은 우리나라 사회의 다른 직업인에 비해 청렴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송** 전 심사평가원장은 의사들의 부당 청구에 관해 연구한 바를 몇 차례 걸쳐 논문, 조사 결과로 발표하였는데, "허위, 부당 청구율이 0.5%에 불과하다. 어느 분야를 보더라도 99.5%가 정당하고 타당하게 이뤄지는 분야는 많지 않다."면서 의료계의 청렴성을 인정했다. (2009.05.24 메디게이트 뉴스)
김** 전 국세청장은 봉급생활자를 제외하고 탈세가 가장 적은 사업장으로 개원 의사만한 직업군은 없다고 발표했다.
과학적인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인간을 집단으로 분류할 때, 도덕성은 성별, 직업, 지능지수, 종교의 유무와 종류와는 무관하게 거의 비슷하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다만 의사가 일반적인 사회 인식과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청렴한 것은 의료법이나 의사 윤리 선언과 같은 엄격한 제도 윤리 시스템을 차별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도덕적인 집단을 비도덕적인 집단으로 모는 행위야말로 오히려 비도덕적인 행동이며 이런 일을 정부가 하고 있다. 그로 인해 왜곡되는 의료와, 국민과 의사들 간의 신뢰성 저하로 인한 사회적 손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나라처럼 값싸고 접근이 용이하며 질이 높은 의료는 전 세계적으로 찾기 힘들 것이다. 이는 누구의 덕분인가? 그 공(功)의 상당 부분은 희생하고 있는 의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의 의료에 대한 불만은 상당히 높다. 이런 괴리는 누구의 책임인가? 의사들의 도덕성에 그 책임을 돌리는 것은 옹졸한 짓이며 위에서 보았듯이 그 근거도 없다. 홍보를 잘 못했던지 아니면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하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 당국에 있다.
공자가 국가의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한 말은 사실이다. 그리고 국민들 간의 신뢰성은 그 사회의 가장 큰 자산 중의 하나이며, 사회학적 연구에 따르면 선진국일수록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신뢰도가 높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자발성과 창의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데 힘을 써는 데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지, 국민을 차별하고 한 집단을 공격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공공재(公共財)는 어떠한 경제주체에 의해서 생산이 이루어지면 구성원 모두가 소비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재화 또는 서비스를 말한다.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을 그 특징으로 하며 따라서 의료는 경제학적으로는 공공재가 아니다. 서구의 많은 선진국들이 의료를 공공재로 취급하는 것은 생명과 건강에 대한 경외심과 복지에 대한 요구, 평등과 박애에 대한 욕구 등을 감안한 사회적 합의에 의한 정치적 결단을 통해서이고 그래서 그들 국가에서는 의사를 양성하는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 미국의 경우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문화적 전통이 있어 의료 제도에 있어 국가의 간섭이 적고 시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나는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제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의료에 국간의 간섭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간섭의 방법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국가의 간섭이 수행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첫째는 그 보호제도의 <법률적 틀>을 설계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정부가 세워 놓은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 국가의 권력기관이 어떤 범위 내에서 조처를 취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첫번째 절차를 <제도적> 혹은 <간접적> 간섭이라 부르고 둘째 것을 <對人的> 혹은 <직접적> 간섭이라고 말할 수 있다(물론 여러가지 중간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민주주의적 통제의 견지에서 볼 때 어느 방법이 더 나은 것인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든 민주적 간섭이 취해야 할 분명한 정책 수단은 첫째 방법이며, 첫째 방법이 부적합한 경우에만 둘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의료 정책에 관한 한 대부분 두 번째 방법인 직접적 방법을 쓰고 있고 그로 인한 의료의 왜곡이 심화되고 있으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악의(惡醫)가 양의(良醫)를 구축하는 현상도 생기고 있다. 아덴만의 이국종 교수가 탄식하는 응급의학의 문제, 현재 말썽이 되고 있는 흉부외과의 PA 문제, 산부인과의 ‘의료분쟁 조정법’ 전면 거부 문제 등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앞으로 어떤 문제들이 계속해서 이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 모든 문제들과 국민들의 불만을 의사의 탓으로 돌리는 정책은 정부 스스로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속죄양을 찾는 부도덕의 증거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회 문제는 인간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결함이기 때문이다.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다."는 말은 실제로 의심스러울 수도 있지만 "정직이 정책보다 낫다."는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칸트의 말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부의 의료 정책을 보면 정직을 찾아보기 힘들다. 과학적인 마인드로 무장하여 합리적 판단을 내리고 의사와 국민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정책을 펴려면 그 기초에 정직성이 자리하지 않으면 힘들다. 부디 정부 당국자는 열린 마음으로 의료 문제의 기초부터 의료인과 성실히 상의하여 점진적인 개선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