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화

[한비야]21세기 시대정신은 세계시민의식!

팔락 2012. 2. 4. 09:49

[문화칼럼/한비야]21세기 시대정신은 세계시민의식!

한비야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유엔 자문위원

 

며칠 전 성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면대에서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컵에 물을 받아 이를 닦고 있었다.

“아이, 착해. 컵에다 물을 받아서 닦네?”

 

아이는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이렇게 말했다.

“아줌마는 그렇게 안 하세요? 물을 아껴야죠. 엄마가 그러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물이 없어서 죽기도 한대요.”

 

웃으며 말했지만 안 한다면 오늘부터 당장 해보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이 아이는 수돗물을 틀어놓고 양치질을 하면 하루에 약 10L, 아프리카에서 두 명이 하루에 쓸 만큼의 물이 든다는 것까지는 몰랐을 거다.

 

그러나 단지 수돗물값 때문이 아니라 물 부족으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 사람을 생각하며 실천에 옮기는 그 마음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물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지구촌 모든 사람들과 나눠 써야 한다는 그 마음 말이다. 그런 아이가 기특해 어깨를 감싸 안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당신을 훌륭한 세계시민으로 임명합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하느냐면 올해 1월 1일자로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의 초대 교장이 됐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지도 밖 행군단’이라는 청소년 캠프 운영, 서울랜드의 세계시민교육 체험관을 통한 국민체험교육, 세계시민교육 교재 발간, 그리고 학교와 지역사회 등에서 활약할 교사 양성 등을 한다. 한마디로 세계시민의식을 키우는 학교인데, 궁극적인 목표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훌륭한 세계시민이 되도록 하는 거다.

 

글로벌 시대엔 세계가 공동운명체

세계시민의식! 각 시대에는 저마다의 시대정신이 있게 마련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주독립, 1950∼1960년대에는 절대 빈곤을 벗기 위한 산업화, 1970∼1980년대는 군부독재에서 벗어나려는 민주화가 시대정신이었다면, 21세기에는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이자 세계시민이라는 세계시민의식을 갖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자 과제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말 하면 ‘이 정도로 우리가 세계를 걱정하기는 아직 이르잖아?’ 혹은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거창하게 무슨 세계시민의식…’이라는 반응도 없지 않다.

 

한편으로는 세계시민의식을 스펙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예전에 한 초등학생에게서 “저는 꼭 글로벌 리더가 될 거예요. 그래서 반장선거에 나가려고요. 반장을 하면 나중에 유엔 사무총장 되는 데 유리한 거 맞죠?”라는 e메일을 받았다. 기특하기는커녕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엔 사무총장이 되려면 화려한 스펙이 필요한데 반장도 그 스펙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듯해서였다. 글로벌 리더가 되는 건 좋지만 세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세계를 이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는가? 내가 10년 전에 국제구호를 처음 시작할 때 거의 매일 듣던 말이 “우리나라에도 도울 사람 많은데 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도와야 하나요?”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까지 세계 긴급구호 현장에 써 달라며 주머니를 털어 주는 사람이 많다. 놀랍게도 대부분은 학생들이다. 어제도 충남 보령시에 사는 김진솔 중학생이 자신이 올해 받은 세뱃돈 10만 원을 몽땅 보내왔다. 내가 올 5월부터 남부 수단에서 현장 근무를 한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며 그곳에 우물 파는 데 써 달라면서.

 

이런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정말 기분이 좋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도울 때 그저 불쌍해서 도와주는 게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친구들, 마음을 다해 남을 돕는 것이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이라는 걸 아는 친구들. 이 아이들의 세상은 이미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나라를 넘어 우리 아시아, 전 세계다. 세계를 자신의 무대로 생각하고, 세상 모든 사람을 공동 운명체이자 친구로 여기며 세상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진짜배기 세계시민이다.

 

2006년, 상업광고를 하지 않는다는 나의 원칙을 깨고 한 지면광고료 1억 원을 마중물 삼아 세계시민학교를 열 때만 해도 세상이 이렇게 금방 변할 줄 몰랐다. 요즘은 국제회의나 각국의 구호요원들이 모이는 현장에 갈 때마다 내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빨리 물어보았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는 순간, 질문이 쏟아진다. 너희 나라는 어떻게 50년 만에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 그것도 모자라 잘 주는 나라가 됐느냐며. 그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곳에 써 달라며 내게 돈을 주는 우리 아이들 얘기를 하며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먹고살기 바빠도 어려운 나라 도와야

이런 아이들을 더욱 멋지게 키우기 위해 나는 교장 임기 3년간 내가 가진 재능과 시간과 열정을 몽땅 쏟아 부을 결심이다. 더불어 1년에 6개월간의 현장 근무를 바탕으로 살아있는 세계시민교육, 신나고 재미있는 세계시민교육을 펼칠 생각이다. 이렇게 잘 키운, 아니 컵에 물 받아 이 닦던 꼬마처럼 스스로 세계시민으로 잘 커가는 아이들이 세계무대에서 맹활약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생각만 해도 뿌듯하지 않은가? 말만 나와도 뻐기고 싶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