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망각, 생존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

팔락 2011. 11. 8. 12:11

1886년에 태어난 러시아 기자 솔로몬 셰레셰프스키는 기억용량이 거의 무제한인 듯했다. 기억의 저장과 인출 두 가지 모두에서 그랬다. 과학자들은 그에게 숫자와 글자로 이루어진 암기 목록을 준 다음 그의 기억력을 테스트했다. 그는 각 항목을 3~4초 동안 '시각화'만 하면 모두 완벽하게 기억했다. 외워야 할 것들이 70개가 넘어도 말이다. 목록을 거꾸로 뒤에서부터 암기하기도 했다.

 

한 실험에서 과학자가 셰레셰프스키에게 글자와 숫자로 이루어진 복잡한 공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인출 실험을 딱 한 번 한 다음(이때 셰레셰프스키는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기억했다) 공식 목록을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15년을 기다렸다. 15년이 지난 어느 날, 그 과학자는 그 목록을 꺼내어 셰레셰프스키에게 공식을 외워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공식을 외웠다.

셰레셰프스키는 모든 것을 무척이나 명료하고, 상세하고, 영구히 기억하는 나머지, 기억을 의미있는 패턴으로 구성하는 능력을 잃었다.

 

그는 마치 끝도 없이 계속되는 정보의 눈보라 속에 사는 것처럼, 인생의 많은 부분을 서로 아무 관계 없는 감각정보들의 눈보라로 보았다. 그는 '큰 그림'을 볼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서로 관련 있는 경험들 사이의 공통점을 알아차리거나 더 크고 반복적인 패턴을 찾지 못했다. 사실 그는 아마도 지금 이 문장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셰레셰프스키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못했고, 그것은 그가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서술기억을 처리하는 마지막 단계는 망각이다. 망각이 인간의 능력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까닭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는 망각 때문에 인생의 우선순위를 논할 수 있다. 생존과 무관한 일과 생존에 아주 중요한 일을 같은 순위에 놓는다면 인지공간을 낭비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관한 기억을 일부러 덜 안정되게 만들어버린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망각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망각 연구의 아버지라 할 만한 댄 쉑터는 저서 <기억의 7가지 원죄 The Seven Sins of Memory>에서 어떤 사실을 알고 있지만 혀끝에서만 맴돌 뿐 말로 나오지 않는 '설단현상Tip-of-the-tongue issues', 안경이나 열쇠 등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거나 약속을 잊어버리는 '방심absent-mindedness', 사실인데 막상 기억하려고 하면 떠오르지 않는 '차폐blocking', 정보의 출처를 잘못 기억하는 '오귀인misattribution', 현재의 기분이 과거의 기억을 왜곡하는 '편향biases', 실제로 있던 일이 아닌데도 그렇다고 암시를 받으면 실제로 있었다고 생각하는 '피암시성suggestibility', 등으로 망각의 범주들을 정리했다.

 

망각은 종류에 상관없이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른 정보들을 위해서 어떤 정보들을 버린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망각은 인류가 지구를 정복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 브레인 룰스

 

러시아 심리학자 A.R. 루리아가 1920년대부터 30년 동안 셰레셰프스키를 연구했다. 셰레셰프스키가 가진 완벽한 기억력의 단점은 세부가 이해를 방해한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셰레셰프스키는 얼굴 인식에 애를 먹었다. 우리는 보통 타인의 얼굴에서 일반적인 속성만을 기억에 저장하고, 아는 사람을 만나면 눈앞에 보이는 얼굴을 한정된 목록 속의 한 얼굴과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람을 알아본다. 그러나 셰레셰프스키의 기억은 살면서 만난 모든 얼굴들의 수많은 버전을 일일이 저장했다. 그에게는 하나의 얼굴도 표정이 바뀌거나 조명이 달라지면 다른 얼굴이 되었고, 그는 그것들을 모두 기억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얼굴이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였다. 셰레셰프스키가 아는 사람을 만나서 그 얼굴을 기억 속 얼굴들과 비교할 때는 방대한 이미지 저장고를 뒤져서 눈앞의 이미지와 정확히 같은 것을 발견하는 지난한 작업을 거쳐야 했다.

 

셰레셰프스키는 언어에 대해서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에게 한 말을 정확하게 따라 읊을 수는 있었지만, 말의 요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애를 먹었다. 기억과 언어의 비교는 적절하다. 언어도 나무와 숲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언어 구조에는 표층 구조와 심층 구조의 두 종류가 있다. 표층 구조는 어떤 생각이 표현되는 특정한 방식으로, 가령 사용된 단어들이나 그 순서를 말한다. 심층 구조는 생각의 요지를 가리킨다. 보통 사람들은 요지를 남기되 세부를 마음대로 버림으로써 잡동사니에 뒤덮이는 문제를 피한다. 따라서 심층 구조 - 말의 뜻 -는 오래 보유하지만, 표층 구조 - 말에 사용된 단어들 - 는 겨우 8-10초 정도만 정확하게 기억한다.

셰레셰프스키는 표층 구조의 모든 세부사항에 대해서 정확한 장기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로 그 세부사항들이 말의 요지를 뽑아내는 능력을 방해했다. 그는 가끔 부적절한 것들을 잊지 못하는 스스로의 현실에 사무치게 좌절할 때면, 종이에 그것들을 적어서 태웠다. 불꽃과 함께 기억도 타버리기를 바랐던 것이지만, 효과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