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발생유전학과 호메오박스

팔락 2011. 6. 22. 11:36

발생유전학의 가장 극적인 성공은 아마도 호메오박스의 발견일 것이다. 미국의 생물학자 루이스(E.B.Lewis)는 1940년대부터 초파리의 체절 형성을 조절하는 호메오 유전자를 연구했는데, 197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두 명의 독일 생물학자가 그 염기서열(호메오박스)을 밝혀냈다.

 

그 이후로 연구자들은 이 호메오박스(180개의 염기로 구성된 특정 DNA단편)가 초파리의 모든 세포 내에서 전사(transcription) 과정의 스위치를 정교하게 작동시킴으로써 세포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스터 스위치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루이스와 두 명의 독일 생물학자는 호메오박스 유전자를 발견한 공로로 1995년에 노벨 생리 의학상을 수상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똑같은 호메오박스들이 초파리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쥐와 인간과 같은 척추동물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발견들은 1980년대부터 그야말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초파리의 발생 과정에서 배아의 전후 축을 결정하는 염기서열은 포유류의 척추와 골격 형성에 관여하는 유전자에도 같은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유사한 염기서열이 계통적으로 아주 동떨어진 종에서도 매우 유사한 기능을 하게끔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칭돔울에서 발견된 호메오 유전자인 혹스 유전자는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초파리의 혹스 유전자를 생쥐의 배아에 이식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혹스 유전자들은 생쥐에 들어가서도 생쥐의 정상적인 혹스 유전자들이 담당해야 할 몫을 잘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Pax-6 유전자는 더욱 흥미롭다. 눈 발생을 조절하는 유전자는 척추동물에서는 Pax-6이고 초파리의 경우에는 아이리스(Eyeless)이다. 물론 곤충의 눈은 겹눈으로서 척추동물의 눈과는 구조, 구성 재료, 그리고 작동 방식에서 엄청난 차이를 갖고 있다. 그런데 만일 초파리의 아이리스  유전자를 생쥐의 배아에 이식시키거나 반대로 생쥐의 Pax-6를 초파리의 배아에 이식시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 놀랍게도 두 경우 모두 정상적인 눈이 발생한다. 즉 생쥐의 배아에서는 생쥐의 눈이, 초파리의 배아에서는 초파리의 눈이 정상적으로 발생한다. 심지어 사람의 Pax-6 유전자를 거미의 배아에 삽입하면 그 배아는 거미의 정상적인 눈을 발생시킬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Pax-6와 아이리스 유전자가 배아 발생의 꼭대기에서 미분화된 세포의 운명을 조절하는 스위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Pax-6 유전자를 발견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스위스의 발생학자 게링(W.J.Gehring)은 이런 유형의 유전자를 '마스터 조절 유전자(master control genes)'라고 명명했다. 곤충과 척추동물의 심장 발생을  동일한 방식으로 관장하고 있는 틴먼 유전자도 그런 마스터 조절 유전자들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