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런드 러셀의 회의주의, 정치인과 전문가
나는 상식에 깃든 일반적 믿음을 이론적 차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실천적 차원에서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즉 잘 정립된 과학적 결과라면 그것이 명백한 진실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성적 행동강령이 될 만큼 충분한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제안하고 싶은 회의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문제의 경우, 비전문가는 그에 반하는 의견은 의심해야 한다.
둘째, 전문가들이 동의하지 않는 문제의 경우, 그에 대한 어떤 의견도 비전문가는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셋째, 전문가들이 받아들일 만큼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의견이라면, 비전문가는 그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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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정치 문제는 서로 다른 두 특수 집단이 다루고 있다. 첫째 집단은 각 정당의 실제 정치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집단은 주로 공무원이고 그 외에 경제학자, 재정가, 숙련된 의료인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이다. 이 두 집단은 각각 독특한 기술을 갖고 있다.
정치인들의 기술은 사람들이 무엇을 이득으로 생각하게 할지 예측하는 능력이고, 전문가들의 기술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실제로 무엇이 이로운가를 계산하는 것이다.(이것은 필수 전제로, 심한 분노를 조장하는 정책이 아무리 장점이 크다고 해도 이로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인이 힘을 얻으려면 보통 사람들의 눈에 그럴 듯해 보이는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 정치인에게, 깬 사람의 관점에서 봤을 때 좋은 것을 대변하라고 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 이들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 의견을 예상하는 데 필요한 직관력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능력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 이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정당 정치에서 봤을 때 유능한 이들 중 다수가 대중들은 좋게 생각하지만 전문가는 나쁘게 생각하는 정책을 옹호하는 처지에 서게 될 것이다. 이처럼 뇌물을 금하는 직접적 방법 외에 정치인에게 도덕적 훈계를 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정당 정치가 있는 모든 곳에서는 정치인들이 특수 계층에 호소하면, 이들의 반대 세력은 그 반대 계층으로 눈을 돌린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인들의 성공은 한 계층을 다수 집단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데에 달려 있다. 모든 계층에 똑같이 호소하는 정책은 대체로 모든 정당들의 공통적 기본 틀이기에, 정당 정치인에게는 별 쓸모가 없다. 따라서 그 반대파의 핵심 지지자 집단이 싫어하는 정책을 집중 공략할 수밖에 없다.
이무리 뛰어난 정책이라도 그 근거를 정치인이 연단에 서서 보통 사람들에게 먹히게 설명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따라서 정당 정치인들이 중요시하는 정책이 성공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그 정책이 국민 일부만을 겨냥해야 한다. 둘째, 정책을 합리화하는 논변은 극히 단순해야 한다.
정치인들의 특별한 기술은 격한 감정들이 쉽게 자극받고 유발되었을 때는 그것들로부터 자신과 관련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정치에도 통화의 `그레셤의 법칙`(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같은 것이 있다. 즉 이상주의가 혁명처럼 이기적 열정이 바탕이 된 운동과 손을 잡는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숭고한 목적을 가진 이들은 정치판에서 쫒겨날 것이다. 나아가 정치인들은 라이벌 집단끼리 갈리기 때문에, 전쟁 시처럼 외부의 적에 대항해 뭉칠 때 외에는 나라 전체를 분열로 몰고 간다. 즉 그들은 의미 없는 소리와 분노(맥베스에 나오는 구절)를 삶의 원칙으로 삼는다.
설명하기 힘든 것이나, 국가들 간에 혹은 한 국가에 분열을 조장하지 않는 일, 나아가서는 정치인들 계층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은 이들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정치인과 비교할 떄 전문가는 확실히 다르다. 대체로 전문가에게는 정치적 야망이 없다. 정치 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자연스런 반응은 무엇이 인기를 끌까보다는 무엇이 이익이 될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전문가는 어떤 방면에 기술적으로 뛰어난 지식이 있다. 만약 전문가가 공무원이나 대기업체 사장이라면 개개인들을 오랫동안 상대한 경험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리하게 판단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전문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에 상당히 유리한 힘을 실어줄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에게는 대체로 이에 상응하는 단점이 있다. 그의 지식 자체가 전문적이다 보니 자기 분야의 중요성을 쉽게 과대평가한다. 만약 우리가 치과 사나 안과 의사, 심장 전문의, 폐 전문의, 신경 전문의 등을 한 사람씩 차례로 접견하면,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 분야의 질병 예방책을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열심히 조언해 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말을 그대로 따르다 보면 우리는 하루 24시간을 건강을 돌보느라 건강을 누릴 시간이 없을 것이다.
유능한 공무원 혹은 전문가의 둘째 단점은 설득이라는 방법을 뒤에서 몰래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터무니없이 높게 잡고 있거나 혹은 비밀스런 방법을 선호하는데, 흔히 이 비밀스런 방법은 정치인들이 아무 생각없이 중요한 사안을 통과시키게 만든다.
전문가의 셋째 단점은 그가 경영권을 가진 전문가라면 대중의 정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위원회 임원들은 잘 알지 몰라도 대중들은 제대로 모른다.
대중 정서란, 별일이 아닌 일에도 대중 정서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충분히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으레 정부가 지출을 전반적으로 줄이기를 바라지만, 막상 어느 분야에 재정이 긴축되면 정부에 불만을 품게 된다. 그것은 그런 정책의 도입으로 해고된 노동자들을 동정하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넷째 단점은 셋째 단점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들 전문가들은 행정 정책에 동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하고, 또한 사람들이 기피하는 법률을 집행하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의학자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고, 법규가 잘 지켜지는 환경이라면 그들은 전염병을 퇴치할 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제정할 법규가 대중 의견을 훨신 앞서가는 것이면 오히려 대중들에게서 외면당한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행정력을 가진다면, 독재자가 되려는 그들 내부의 충동 때문에 자신이 더는 우호적이고 고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환경이 인격에 미치는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자신이 소수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 버트런드 러셀의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