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기투(Entwurf, 企投)와 피투(Geworfenheit, 彼投)

팔락 2017. 4. 14. 11:43


기투(Entwurf, 企投)와 피투(Geworfenheit, 彼投)

피투성; 인간에게 공통되게 자의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져있는 존재로서의 특성. 이런 피투성은 기분, 그중에서도 불안을 통해 자각된다.


특히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왜 나는 여기에 존재하는가?'라는 불안으로부터 자신이 이 세상에 던져졌고 여기에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피투성)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일단 피투성을 자각할 때, 인간은 언젠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며 이 세계를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이라 불렀다. 이런 죽음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포착해서 재구성 하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이런 시도는 '기투'라고 불린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세계 속에 자의와 상관없이 던져진 인간은 불안을 통해서 이런 상황을 자각하는 동시에 새로운 자신을 포착해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한다.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던져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을 통해서 피투성을 직면하지만, 역으로 이런 상황 때문에 최초로 존재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의 패러독스에 대해 하이데거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불안과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진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답한 것이다.


삶에 있어서 피투성(被投性)과 기투(企投)에 관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의 확립은 피투성 으로서 이루어진다. 자신의 의지와는 조금의 상관도 없이, 세상에 던져질 뿐. 애초부터 존재에 기투라고는 조금도 없는 상태에서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기투성, 즉 선택만을 요구한다. 인간은 매일매일, 평생을 선택의 기로에서 살아가며, 그 와중에서 자신의 선택, 즉 기투를 실현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가 행운이든 불행이든, 인간이 자신의 선택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즉, 선택의 결과는 다시금 피투성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죽음 역시도 기투가 아닌 피투성이다. 그 누구도 - 자살을 제외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죽음 -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으며, 자신의 선택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음은 찾아온다. 즉, 인간의 죽음 역시 태어남과 같이 기투가 아닌 피투성이다.


어쩌면 이렇듯, 태어남과 죽음의 순간은 피투임은 분명하다. 거기에 삶의 결과 역시 피투성이다. 어쩌면 살아감에 있어서 유일한 기투는 피투에 의해 발생된 선택의 기로에 있어서의 선택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런데 그 선택이 과연 기투라고 할 수 있을까?


선택 역시, 어쩌면 운명론과 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출생도 죽음도, 그리고 살아온 삶에 대한 자신의 평가도 어쩌면 피투에 불과한 것이 사실인데, 알량한 선택의 기로에서의 선택만으로 삶이 기투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 어렵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 발리스 듀스 지음, 남도현 옮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