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야기

[김상욱 교수의 과학 에세이]노벨상 발표장에 도넛이 등장한 까닭은

팔락 2016. 11. 1. 10:45


[김상욱 교수의 과학 에세이]노벨상 발표장에 도넛이 등장한 까닭은

― 위상수학과 우리의 삶


옷을 다 입은 상태에서 속옷만 벗는 것이 가능할까. 이론물리학자로서 진지하게 답한다면 “그렇다”이다. 다만 속옷이 위상수학의 적용을 받는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위상수학이란 대상을 마음대로 늘이거나 줄여도 변하지 않는 성질을 다루는 분야다. 남자의 러닝을 예로 들어보자. 러닝에는 구멍이 세 개 있다. 하나는 목이 들어가고 나머지 둘에는 팔이 들어간다. 이제 어깨에 걸려 있는 러닝부분을 주욱 늘여보자. 팔 길이보다 길게 늘이면 팔을 벗어난 셈이다. 몸통에 걸린 부분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위로 이동시키면 팔과 목을 차례로 지나 머리를 통해 러닝은 위로 빠져나가게 된다.


 위상수학의 관점에서 보면 당신이 입은 옷들에 대해 안과 밖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귤같이 껍질을 까야 내용물을 볼 수 있는 경우, 안과 밖이 존재한다. 옷은 그냥 순서대로 포개어 놓은 거다. 단지 옷이 충분히 늘어날 수 없기에 안과 밖이 있는 듯이 보일 뿐이다. 늘어난 옷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위상수학의 입장에서는 (뚜껑이 없는) 콜라병과 A4 용지는 같다. 콜라병의 주둥이 부분을 좌악 벌려서 아래로 내리며 펼치면 편평한 판같이 만들 수 있다. 그런 다음 두께를 줄이고 적당히 사각형으로 만들면 A4 용지처럼 된다.


 난데없이 위상수학 이야기를 하는 것은 2016년 노벨 물리학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올해의 노벨 물리학상은 그 내용이 어려운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수상자 발표 후 물리학자들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리를 쥐어뜯었으니 기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노벨 물리학상 발표 후 며칠이 지나자 그 이야기가 순식간에 언론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위상수학을 물리학에 도입하여 이상한 현상을 설명했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인데, 이걸 재미있게 포장하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축구공, 농구공, 탁구공은 위상수학 입장에서 모두 같은 거다. 하지만 도넛은 이들과 다르다. 구멍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구멍이 있는 것을 아무리 늘이고 줄여도 구멍을 만들거나 없앨 수 없다. 따라서 공과 도넛은 위상수학적으로 다르다. 도넛은 수영 튜브나 팔찌와 같다. 위상수학에서 구멍의 개수가 다른 것은 서로 다르다. 노벨물리학상위원회에서 수상자를 발표할 때, 도넛과 프레첼을 들고 나온 이유다. 프레첼은 구멍이 세 개 뚫린 빵 혹은 과자다. 우리나라였으면 연근을 가지고 나갔으려나.


 인간의 배아도 발생과정에서 공에서 도넛으로의 위상수학적인 변화를 겪는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면 수정란이 된다. 그 이후 가장 중요한 단계는 공 모양의 배아가 구멍을 만들어 도넛 모양이 되는 것이다. 나중에 구멍의 한쪽 입구는 입이 되고 다른 쪽 입구는 항문이 된다. 누누이 강조했듯이 이것은 위상수학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늘이거나 줄이는 것으로는 실현 불가능하다. 즉, 세포의 일부가 죽어서 없어져야 한다. ‘아폽토시스’라 불리는 세포 자살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상상을 초월하게 차갑고 (영하 270도 이하) 무지하게 얇은 (A4 용지 두께 1만분의 1 이하) 물질에서도 위상수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질에 자기장을 가하면 전기전도도(전기를 통하는 정도)가 대개 연속적으로 바뀐다. 하지만 이 경우는 자기장을 변화시켜도 전기전도도가 변하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된다. 더구나 특정한 자기장들에서만 갑자기 두 배, 세 배로 커진다. 양자홀 효과라 불리는 상태이다. 올해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이런 물질상태의 전기전도도가 위상수학적인 특성을 가진다는 것을 보였다. 전기전도도가 구멍의 개수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거다. 그렇다면 이런 특성은 구멍의 개수가 바뀌지 않는 어떤 종류의 변형이나 간섭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실제 양자홀 효과는 고체의 종류나 불순물, 소자구조 등의 세부사항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위원회도 위상수학을 아는 것 같다. 수상자로 가수 밥 딜런을 선정한 것을 보면 그렇다. 책으로 출판되지 않은 노래가사도 문학으로 본 것인데, 이에 대해 파격이라는 말들이 많다. ‘문학’을 정의하는 구멍의 개수를 바꾸지 않으면서 한껏 변형을 시도해본 것이 아닐까. 내가 살아가며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들을 구멍의 개수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멍의 개수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자유롭게 변형하며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위상수학적으로는 모두 동등한 삶이다. 삶의 겉모습을 몇 배로 늘이는 것에는 집착하면서 정작 구멍의 개수가 변하는 것에 무심했던 적은 없었을까. 위상수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당신의 인생에서 위상수학적인 구멍의 개수는 무엇인가.


김상욱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