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디지털 정보기술은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단축시켜서 복잡한 절차와 오랜 시간이 걸리던 업무를 간편하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이동 중에 웬만한 용무를 처리할 수 있다. 온라인으로 연결되고 자동화된 환경 덕분에 과거처럼 육체적, 정신적 수고를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시간과 자유가 주어진 셈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과거에 비하면 숨 돌릴 틈 없이 바빠졌다.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늘어났고 이메일을 비롯해 스마트폰으로 문자메시지, SNS 알림이 수시로 찾아온다. 팔다리 근육을 사용해서 처리해야 하는 일은 줄었지만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일은 훨씬 늘어났다. 자연히 뇌가 한가하게 쉴 겨를이 없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멀티태스킹에 능한 사람들을 보게 되면 한 가지 일만 하거나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왠지 불안할 정도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뇌의 휴식
기능성 자기공명영상, 양전자 단층촬영(PET) 장치 등 뇌의 활동을 관찰할 수 있는 첨단 영상 장비를 활용한 연구는 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대 의대의 뇌과학자 마커스 라이클(Marcus Raichle) 교수는 인간 뇌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던 현상에 관한 논문을 2001년 발표했다. 사고, 기억, 판단 등 인지 활동을 할 때만 두뇌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무런 인지 활동을 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는 뇌의 특정 부위들이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실험 결과 뇌의 특정 부위는 실험 대상자들이 문제 풀이에 몰두할 때는 활동이 오히려 감소하는 반면 실험 대상자들이 아무런 인지 활동을 하지 않고 멍하게 있을 때는 평소보다 활성화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뇌가 인지 활동을 할 때가 아니라 아무런 생각을 안 하고 있을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있다는 이 발견은 학계에 일대 흥분과 논란을 가져오며 이후 수백 편의 논문을 쏟아지게 만든 신호탄이 됐다.
라이클 교수는 쉬고 있을 때, 즉 뇌가 활동하지 않을 때 작동하는 일련의 뇌 부위를 일컬어 ‘휴지 상태 네트워크(rest state network)’ 또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고 명명했다. 이는 눈을 감고 누워서 가만히 쉬고 있어도 뇌가 여전히 몸 전체 산소 소비량의 20퍼센트를 차지하는 이유도 설명해준다.
이는 “뇌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판단과 같은 과제를 수행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한가로이 있을 때 상당 부분이 활성화되는 이유는 무엇을 위해서일까?”라는 새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연구들에 따르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자아 성찰, 자전적 기억, 사회성과 감정의 처리 과정, 창의성을 지원하는 두뇌 회로다. 편안히 쉬고 있을 때만 작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 이런 인간 고유의 성찰 기능이 명상이나 휴식할 때 활성화된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과학적 연구와 뇌 사진을 통해 비로소 확인됐다.
쉴 때 활성화되는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평소 인지 과제 수행 중에는 서로 연결되지 못하는 뇌의 각 부위를 연결시켜준다. 스웨덴 출신의 뇌 연구자 앤드류 스마트는 이때 창의성과 통찰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새로운 발견과 창의성은 쉴 새 없이 정보를 습득하고 판단하며 신경을 집중해 멀티태스킹을 하는 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뇌 활동을 멈추고 휴식하는 상태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독일 쾰른대학교 신경과학자 카이 포겔라이(Kai Vogeley)는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야말로 사람을 비로소 사람답게 하는 능력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21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밝혀진 뇌 과학의 최신 연구 결과는 우리가 두뇌 활동을 멈추고 멍하게 쉬는 무위(無爲)가 시간을 허비하는 무기력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뇌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자 적극적인 충전 활동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무위도식(無爲徒食)이란 말에 담긴 부정적 어감이 말해주듯,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위는 추방해야 할 게으름인 반면 근면과 성실은 추앙받는 가치였다. 16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청교도 운동은 한가로움과 여유를 죄악시하고 근면한 노동이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동아시아의 유교에서도 근면, 성실, 검소함이 존중받았다. 효율성과 성장을 중시하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과학적인 공정 관리와 시간 관리 경영을 통한 부단한 생산성 향상 추구로 나타났다.
푸시 서비스의 역설
빈둥거림과 무위는 디지털 세상에서 갈수록 병립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과 SNS 사용자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되고 있다. 스마트폰은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늘 휴대하고 다닐뿐더러 사용자가 각자의 관계와 기억을 의존하고 있는 소셜미디어와 각종 앱 등 스마트폰의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사용자에게 끊임없이 ‘알림’을 밀어넣는(push)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뇌와 연결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라는 외뇌에는 인간 뇌와 달리 무위와 휴식의 개념이 없다.
알림과 같은 푸시 서비스는 사람이 기술과 맺는 관계가 어떤 동기로 출발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푸시 서비스는 달리 표현하면 ‘배달’ 서비스다. 일부러 시간과 비용을 들여 구하러 가지 않아도 사용자 앞에 배달되는 편리한 서비스다. 신문이나 우유가 대표적인 배달 상품이다. 배달 서비스 덕분에 직접 구매하기 위해 외출할 필요가 없고 앉은 자리에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편리함은 물론이고 전에 없던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겨난다. 빈둥거릴 수도 있게 해준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푸시 서비스의 역설이 생겨나고 있다. 이용자는 직접 찾아가는 대신 앉은 자리에서 이용하기 위해 푸시 서비스를 활용하지만 여유가 생기는 대신 오히려 반대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수많은 알림은 여유를 가져다주는 대신 이용자의 끊임없는 관심을 요구한다. 그 때문에 사용자는 자극으로부터 벗어날 겨를이 없다. 스마트폰의 각종 앱과 SNS는 이용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푸시’를 보내 사용자에게 직접 다가간다.
정보기술은 기술로 발생한 문제를 기술에 의지해 해결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무어의 법칙은 지속적으로 강력해지는 성능이 결국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술 낙관론의 대표적 논리다. 하지만 제록스의 팔로알토 리서치센터(PARC) 소장을 지낸 존 실리 브라운은 이런 눈먼 정보기술 낙관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기능이 강력할수록 그로 인한 문제도 그만큼 치명적이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정보기술 내부가 아니라 해당 기술의 바깥에 있는 요소들에서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의성은 뇌가 그냥 쉴 때 활성화된다.
디지털 기술은 정교하고 다양한 필터를 통해 정보를 걸러내고 각종 자동화 기술, 멀티태스킹과 푸시 알림 기술로 업무 처리 시간을 줄여줌으로써 인류에게 시간적 여백을 가져다준 것 같지만 현실은 반대다. 시간의 여백을 가능하게 하고 여유로움을 가져올 것이라 기대를 받은 기술들이었지만 그 기술들로 인해 확보된 시간이 여유로움 대신 새로운 분주함과 수고로움으로 채워지고 있다.
근대 산업사회 이후 게으름의 상징으로 여겨진 무위가 인간의 사고와 숙고를 가능하게 하고 가장 창의적인 두뇌 활동을 준비해준다는 사실을 최근의 뇌 과학은 알려주고 있다.
사람이 가진 여러 능력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사물들의 연관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으로, 이는 창조적 사고의 핵심을 이룬다. 인간의 인지와 판단 기능은 다른 동물의 반사적 반응과 달리 숙고와 상상력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무한한 연상 작용인 창의성은 뇌가 아무런 임무를 부여받지 않고 그냥 쉴 때 활성화된다. [다중지능]의 저자인 하워드 가드너 하버드대 교수는 사색에는 집중력과 시간이 필요한데, 무료함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강력한 기제라고 말한다.
아르키메데스나 뉴턴도 연구실이 아닌 곳에서 멍하게 지내다가 놀라운 발견을 했다. 거대한 조직을 맡아 수시로 주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지도자들 중에도 멀티태스킹 대신 무위의 시간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전설적 경영자로 불리는 잭 웰치(Jack Welch)는 제너럴 일렉트릭(GE) 회장 시절 매일 1시간씩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고,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1년에 2주씩 외딴 오두막에 처박혀 지내는 ‘사유 주간’을 갖곤 했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환경 덕분에 인간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손에 쥐고 오랜 시간이 걸리던 일을 재빨리 처리함으로써 시간적 여백을 누리게 됐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무한한 자극에 노출됨에 따라 제한된 인지능력과 실행력을 지닌 인간은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더 분주해졌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개인에게는 동시에 신경 쓰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늘어났다. 해결을 위해 더 빠르고 더 강력한 기술이 쏟아져 나오지만 기술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결국은 기술 사용자인 우리가 그 무한 요구의 쳇바퀴로부터 가끔은 한 발씩 빠져나와 거리를 두고 성찰하고, 때로는 멍하게 머리를 비우고 바라봐야 한다.